소설리스트

173화 (173/604)

16번째 테라리움의 랜드마크였던 연금탑은 결국 철거 계획이 잡혔다.

이곳 테라리움에선 더 이상 연금탑을 운용할 수 없다. 외부의 시선도 좋지 않고 앞으로 지원자도 없을 거란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종자 보관소를 운영하기 위해 한없이 거대하게만 지어 놨던 연금탑은 유지 비용도 많이 들었다.

다시 그 거대한 건물을 가동하기 위해선 세계수 가지를 태워 열을 얻어 내는 수준의 연료가 없을 경우 추가 공사가 굉장히 많이 필요했다. 그래서 결국 철거 후 다른 건물을 짓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행정권은 물론 월렛도 뺏긴 파필리온은 고액의 자금이 필요한 모든 일에 대하여 일일이 내게 결재를 받아야 했다.

이리스가 옆에서 지켜보다 말하길, 내가 워낙 다이아 가치에 대한 개념이 약해서 그런지 파필리온이 장난스레 툭툭 던진 말도 안 되는 비용 책정을 전부 승인해 주려 한다고 했다.

어쨌든 행정 관리원이 된 후 모든 다이아는 내 월렛에서 빠져나가고 있었다. 얼마가 빠져나가든 상관은 없었는데 그랬다간 16번째 테라리움에 파필리온의 욕망을 실현시켜 주는 꼴이라고 하더라.

영지 건설 게임을 즐기는 유저들의 입장으로 생각하니 무슨 말인지 와닿았다. 알지, 알지. 지을 수 있는 건 다 짓고 다른 영지보다 잘 나가야 하며 끝을 봐야지.

모험을 떠나야 하는 나는 계속 16번째 테라리움에 머물며 결재를 해 줄 순 없으니 아예 다른 방도가 필요했다.

그래서 아예 16번째 테라리움의 1년 예산을 책정해서 빼 두었다. 작년에 16번째 테라리움에서 사용한 다이아를 기준으로 조금 더 후하게.

새로운 세계수의 가지가 동산을 기점으로 활개를 치고 있으니 과수원의 위치를 조정해야 하고 연금탑 철거 후 새로운 무언가를 지어야 하기도 하고. 아무래도 작년보단 다이아가 더 많이 들겠지.

“네 월급은 1년 예산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사용하는지 보고 결정할게.”

아무리 내게 목숨을 저당 잡혔다고 하더라도 돈은 줘가면서 부려야지. 파필리온은 비로소 날 시험하려 든 말도 안 되는 결재 서류들을 깡그리 회수했다.

한 뭉텅이가 빠져나가는 것을 보고 진심 한 대 쳐 버릴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드디어 떠나기를 예정한 날, 뒤 번대의 테라리움으로 갈 마음을 먹으니 겸사겸사 해결할 리스트들이 정리되었다. 어차피 번호가 아주 큰 테라리움이 목적지인 것이 분명했으니 뒤로 계속 내려가기만 하면 될 일.

마침 루프와 필라의 가족들의 이주를 돕는 임무를 수행할 예정이었던 이리스 파티는 물론 시들링까지 동행하게 되었다.

당장은 엘더의 나비가 향하는 곳으로 따라가기로 했다. 가는 길에 엘더의 야생종을 찾는 거야. 나비를 얻고 나서도 오랜 시간이 지났기에 엘더는 이제야 자신의 차례가 왔냐며 들떴다.

이왕 번호를 내려가는 김에 18번째 테라리움에 연구 의뢰를 맡겨 둔 특수 탄환의 개발 경과도 살필 예정이었다.

드라이어드들이 강해지는 것도 좋지만 나를 업그레이드하는 것도 중요했다.

또한 오랜만에 28번째 테라리움에도 정식으로 들를 예정이었다. 드디어 황금 호박 상회, 주얼리 콘, 그레이트 빈 연합의 작물 트리오가 방문하여 개발을 진행 중이라고 했다.

하지만 방문 순서를 뒤엎게 되었다. 데이지2의 이야기 때문이다.

“드루이드님, 지금 이곳에 이상한 분들이 와 계세요.”

본격적으로 개발 작업이 진행되며 28번째 테라리움의 출입 금지 명령을 해제시켰다. 애초에 금지를 시켰던 이유도 파필리온이 보내는 정찰 때문이었는데 16번째 테라리움의 일도 해결했으니 언제까지나 막아 둘 수는 없었다.

그러자 28번째 테라리움에 외부인들이 방문한 모양이다. 이주를 작정한 경우 대환영이긴 한데. 데이지2가 이상한 분들이라고 하니 걱정이 되었다.

“이상한 분들? 어떻길래?”

데이지2의 안내를 받아 아티팩트 안을 살피니 확실히 그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장식이 많이 달린 거대한 보랏빛 천막이 실린 짐마차에 천막과 같은 색의 하늘하늘한 실크 재질의 로브를 입은 사람들이 대여섯 정도 보였다.

서커스단 같은 건가?

“소개하기를 자신들은 유랑 점술단, 유랑을 하며 점을 봐준 대가로 잘 곳과 먹을 것을 제공받는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이번에 강한 이끌림으로 반드시 28번째 테라리움에 방문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고 해요. 드루이드님을 꼭 만나고 싶다는데요?”

“오… 그런 것도 있어?”

유랑 점술단이라…. 이 세계에서도 점을 볼 수 있다니 놀라웠다. 어떻게 점을 보는 걸까? 그런데 왜 갑자기 28번째 테라리움을 방문한 거지? 왜 하필 나를 만나고자 하는 걸까? 수상한 사람들은 아닐까?

직접 확인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16번째 테라리움에 주둔해 있던 황금 호박 상회의 대형 마차를 빌려 다 같이 28번째 테라리움으로 향했다.

가는 동안 목격한 광경이 꽤나 놀라웠다. 다이아로 만들어 낸 가상 아티팩트 공간에 싸여 이동되었던 드라이어드들이 가는 길 곳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작은 불조차 나타나지 않은 것에 의문을 품을 새도 없이 불이 생기는 족족 그들이 모두 처리하는 것이 보였다. 마치 그들은 마을 주변에 접근하는 몬스터를 처리하는 게임 속의 경비병 NPC와 같았다.

많은 수가 빼곡히 자리한 건 아니고, 찾고자 마음먹고 주위를 둘러보면 저마다 마음에 드는 장소에 자신의 꽃을 피우고 터를 잡아 자리하고 있었다. 불에 대한 치안 하나는 우수하겠구나 싶었다.

거둬들인 드라이어드들이 나도 모르는 새 이런 역할을 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협소한 가상 아티팩트 밖으로 나갈 수 없어 갇혀 있는 것과 다름없을 텐데도 드라이어드들은 모두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작은 공간을 살뜰히 자신의 영역으로 가꾸다가 우리가 탄 마차가 지나가면 순식간에 알아차리곤 손을 흔들었다.

“28번째 테라리움으로 모두 이동된 줄 알았는데 어떻게 이런 길목에 저 드라이어드들이 있는 거예요?”

내가 차지한 두 개의 세계수 가지가 연리지 효과를 발휘해 이러한 특권을 얻게 된 것을 길드원들은 알지 못했다. 동산에 있었던 길드원들이야 저 드라이어드들의 정체를 알지만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야생의 자연 발생 드라이어드라고 생각할 수 있었다.

그들에게 28번째 테라리움에 도착할 때까지 내가 얻게 된 특권에 대해 차분히 설명해 주었다.

“그럼 제이 님이 원한다면 16번째와 28번째 사이의 아무 공간에 저들을 불러올 수도 있나요?”

“음… 연금탑이나 동산에서 파필리온은 마음대로 소환을 했으니까 저도 가능하지 않을까요?”

연금탑에선 함정이 발동하듯 가상 아티팩트 공간이 나타났지만 동산에선 수없이 많은 검은 드라이어드들이 일제히 소환되었다. 파필리온도 가능했으니 나도 가능하지 않을까?

“이건 단순히 불에 대한 치안이 좋아진 것뿐만이 아니에요. 길목 곳곳에 제이 님만의 눈과 귀가 되어 줄 존재들을 심어 둔 거나 다름없어요. 저것 보세요. 모든 구역에 있는 건 아니지만 일정 거리마다 그들이 존재해요. 만약 이 길을 통과하는 사람이나 마차가 있다면 적어도 한 그루쯤은 그걸 목격할 거예요.”

즉 감시탑 역할을 한다는 건가? 만약 내 테라리움을 침범하는 것과 같은 불순한 움직임이 보인다면 사전에 방지할 수 있겠네. 이리스의 말처럼 군사적으로도 좋은 기능을 하게 된 것 같아 신기한 기분이었다.

꽤 오랜 시간을 쉴 새 없이 마차를 타고 달려 드디어 28번째 테라리움에 도착했다.

오랜만에 본 테라리움의 주변은 많이 달라져 있었다. 파릇파릇한 묘목들이 듬성듬성 울타리처럼 테라리움을 둘러싸고 있었다.

가막살나무 드라이어드의 소행이 분명했다. 불에 대한 내성이 높은 방화수인 가막살나무는 다 자란다면 아주 좋은 산울타리가 되어 줄 것이다.

또한 놀랍게도 묘목들이 빼곡히 심어진 곳에 적당히 솟은 봉분과 돌을 거칠게 조각한 비석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 비석 앞에 집무실에 걸려 있던 스케어크로우의 초상화와 하얗고 작은 꽃이 소복이 자리한 꽃가지가 함께 놓여 있었다. 그곳은 메스키트의 능력으로 스케어크로우를 땅속 깊이 묻은 곳이었다.

이 역시 가막살나무가 마련한 스케어크로우의 무덤이겠지. 그때 당시엔 불이 드루이드인 그녀의 시신을 삼키지 못하도록 급하게 땅속에 감추고 지금까지 잊고 있었다.

무덤을 마련할 생각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는데, 한때나마 번성한 28번째 테라리움의 전 행정 관리원을 위한 예우를 가막살나무가 잘 챙겨 주어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관리가 잘되어 있고 꽃가지가 방금 꺾은 것처럼 싱그러운 것을 보면, 그는 매일 이곳을 들러 관리하고 있는 듯했다.

드라이어드가 인간들처럼 죽은 이를 기리는 것은, 그가 인간 사회에서 오래 생활했기 때문일까? 항상 인간의 죽음과 함께 사라지는 드라이어드들만 봐 왔기에 생소했다.

일부러 무덤 근처에서 마차에서 내렸다. 길드원들에게 무덤의 정체에 대해 설명하고 짧게 묵념했다. 비록 테라리움 밖에 위치해 있지만 가막살나무가 지키는 이상 어떤 것도 이곳을 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인공 개량 드라이어드들이 길목보다 더 밀도 높게 28번째 테라리움 주변에 자리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덕분에 테라리움 주변은 그 어떤 불도 접근할 수 없는 곳이 되었다. 한 차례 거대한 불이 테라리움을 점령하고 나머지 불들은 세계수 가지의 힘으로 약화시킨 후 쫓아내기만 했었다.

18번째 테라리움에서 28번째 테라리움의 경매가 이뤄질 때도 화제가 되었던 것이 테라리움 주변의 치안에 대한 문제였다.

너무 오래 불에 공격당하고 방치된 탓에 치안을 높이려면 용병을 고용해 정리해야 할 필요가 있어 비용이 많이 들 거라고 28번째 테라리움의 가치를 후려치려고 했었지.

지금 보니 불은 흔적도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오죽하면 이리스는 한 자릿수 테라리움보다 이곳이 불에 대한 치안이 으뜸일 것이라고 했다. 이 정도면 어떠한 식물의 군락지라도 자리 잡을 수 있을 만큼 평화롭다고 덧붙였다.

군락지가 생긴다면… 레드 데이지가 아닐까?

가막살나무의 묘목들에 대항하듯 입구부터 붉게 장식된 레드 데이지 꽃밭을 보니 헛웃음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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