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1화 (171/604)

이 세계에서 내가 목표로 할 거대한 메인 퀘스트를 시작한 것은 두근거렸으나 당장은 그것보다 처리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았다.

크레아시온이 연행되어 가고 내가 정식 행정 관리원이 된 후 파필리온은 테라리움 내 조직원 색출에 박차를 가했다.

그가 내 편에 섰더라도 그동안 비정상적인 루트로의 위임 페널티로 인해 내 존재가 외부로 드러나지 않았었다.

하지만 이젠 모든 이들에게 나란 존재가 드러났다. 또한 파필리온의 변절까지. 내부의 적을 모두 처리하지 않는 이상 언제든지 습격받을 수 있었다.

연금탑의 일도 큰 문제였다. 버젓이 금지된 연구가 진행되어 오던 곳이었다. 그리고 그 일은 만천하에 전부 공개되었다. 그대로 두는 것은 테라리움의 위상에 결코 좋지 못했다.

난 크레아시온이 파필리온처럼 좀 더 눈치 빠르게 행동했다면, 연금탑의 정리에 관한 일을 그에게 맡길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는 결국 때를 놓치고 말았다. 연금탑의 모든 잘못을 자신이 끌어안고 추락했다.

중앙 행정 관리부가 다녀간 후, 무려 1번째 테라리움의 연금탑에서 공문을 보냈다. 16번째 테라리움의 연금탑에서 진행된 모든 연구에 대한 자료를 전부 넘기라는 지시였다.

연구 자료는 모두 폐기 절차를 밟게 될 것이라고 했다. 또한 이곳 연금탑에 소속된 연금술사 및 연구원들에 대한 페널티도 내려졌다. 간부급 몇 명은 크레아시온처럼 연행되어 가기도 했다.

파필리온이 추린 조직원들 리스트엔 예상외로 연금탑 소속 인원들이 매우 적었다. 다들 돈과 성과를 보고 움직였단 뜻이었다.

하지만 금지된 연구에 연루되고 방관한 죄가 너무 컸다. 강등 조치가 내려지거나 심하면 지위가 박탈당하는 등 다시는 연금술을 할 수 없게 된 사람들이 태반이었다.

더구나 숯으로써 연료 역할을 하던 세계수의 가지가 회복되고 난 후 자원 공급이 차질이 생긴 연금탑은 완전히 정지되어 버렸다.

보존을 위한 환경을 만들어 낼 연료가 없어 썩어 가는 것들이 생기기도 했고 워낙 사람 손을 많이 탔던 곳이라 방치되자마자 흉물로 변하고 있었다.

한때는 위용을 자랑하던 곳이 처치 곤란한 흉가가 되고 말았다.

정식 행정 관리원이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난 파필리온의 집무실을 차지하고 앉아 형식상 집무를 처리해야만 했다. 주요한 일들은 파필리온에게 위임했지만 내가 보는 척이라도 할 필요가 있었다.

그중 가장 많은 민원이 일자리를 잃은 연금탑의 사람들에 대한 일이었다. 가장이 되어 생계를 꾸리고 있었던 과거의 필라와 루프의 모습이 떠올랐다.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잘못된 일인 줄 몰랐다… 알았으면 하지 않았을 것….”

“위협을 받았다. 내게 딸린 가족이 많다.”

“인공 개량과 관련된 일엔 전혀 참가하지 않고 내 연구만 했다. 연금탑 소속이란 이유로 페널티를 받는 것은 너무 억울하다.”

현재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16번째 테라리움에서 실직자가 되었다. 발 빠르게 16번째 테라리움을 떠난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다시 시작할 여유가 없는 사람들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계속 민원을 넣는 중이었다.

아니, 분명 인공 개량은 이 세계에서 금기시되는 일이니 치워 버리는 것은 좋다. 퀘스트 클리어하듯 주어진 목적은 달성했다.

게임은 악당의 소굴을 정화하고 나면 잘했다고 업적만 던져 주지 그 뒤 연루된 NPC들이 어떻게 되는지, 이런 현실적인 문제는 잘 다루지 않는단 말이야.

골머리를 앓고 있을 때, 내 옆을 경호라는 임무로 바짝 지키고 선 시들링이 알 수 없는 차가 담긴 찻잔을 건넸다. 그는 내게 잔을 건네기 전 또 다른 작은 컵에 찻물을 조금 따라 마시곤 내게 주는 것을 반복하고 있었다.

“독은 없다.”

“그걸 네가 일일이 매번 마셔서 확인하는 거야?”

파필리온의 집무실을 이 잡듯이 뒤지고 있던 이리스가 이 모습을 보고 손가락질을 하며 입을 벌린 채 소리 없는 폭소를 터뜨렸다. 누가 귀띔을 해 줬는지 알 것 같다. 전장에서 날고 긴다는 애를 이런 일에 써먹는 건 좀 인력 낭비 아냐?

떨어진 펜을 줍는 일도 암기가 장착되어 있을 수도 있다는 이유로 대신 줍거나, 바람 좀 쐬려 창문을 열면 습격에 대비한다고 큰 몸뚱이로 막고 서서 답답함이 조금도 해소되지 않는 일도 있었다.

그 밖에도 아주 사소한 일들까지 죄다 자신의 손을 거치게 해서 난 시들링에 의해 극진히 모셔지고 있었다.

이리스에게 장난을 그만 치라고 하기엔 시들링이 철석같이 믿고 묵묵히 행하는 것이 웃겨서 내버려 두었다.

이리스와 다르게 제퍼와 헤르마, 노토스는 시들링에 대한 경계가 아직 높은 편이었는데, 그녀의 장난에 이리저리 움직이는 그를 보고 많이 누그러진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한참을 연금탑 소속 사람들에 대한 처분을 고민하고 있을 때, 의외의 인물이 날 찾아왔다.

“어르신, 상의드리고 싶은 것이 있어요.”

깨어 있는 시간은 뭔가를 먹을 때뿐, 그동안의 피로를 모두 태우듯 종일 잠만 자던 루프였다.

16번째 테라리움의 일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면 이리스 파티와 함께 바삐 그녀를 28번째 테라리움으로 내려보내 주려고 했는데.

“피로는 좀 풀렸어요? 너무 고생시켜서 미안해요. 일단 좀 앉아요.”

루프는 아직도 가물거리는 눈을 매만지며 멋쩍게 웃어 보였다. 그녀가 접객 테이블의 소파에 앉자 나도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여기 연금탑에 대한 일은 전부 들었어요. 사람들도 대부분 해고당했다고….”

“그냥 넘어가기엔 너무 큰일을 벌였으니까요. 저도 솔직히 그렇게 될 줄은 몰랐는데 1번째 테라리움에서 압력을 넣으니 뭐 어쩔 수가 없더라고요. 그렇지 않아도 저도 그 문제로 골치를 썩이고 있어서….”

그들이 느끼는 일의 크기와 내가 느끼는 일의 크기는 엄연히 달랐다. 1번째 테라리움에서 내 재량에 일을 맡겼다면 연금탑 사람들의 대부분을 실직시키는 일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르신께선 혹시 연금탑 연구원들을… 전부 테라리움에서 내쫓으실 생각이 있으신가요? 아무래도 세계수에 반하는 연구를 진행한 건 정말 잘못된 일이니까….”

루프가 조심스레 내게 물었다.

“뭐… 솔직히 그럴 생각은 없어요. 오히려 그들을 어떻게 도와줘야 할지 고민이에요. 그들이 전부 인페르노의 소속이었다면 다시 한번 생각해 볼 텐데, 그것도 아니라고 하니.”

난 루프에게 그녀가 없는 동안 동산에서 벌어졌던 일들에 대해 설명해 줬다. 특히 내가 인공 개량으로 태어난 드라이어드들을 전부 포섭한 일들에 대해.

“제가 정말 인공 개량을 경멸했다면 그 드라이어드들도 전부 제가 감싸 안을 마음을 먹지 않았겠죠. 하물며 드라이어드들도 포용하기로 했는데 사람들을 내치고 싶은 마음은 없어요.”

“그렇다면… 제가 하려는 일에 그들을 전부 고용하는 것을 도와주실 수 있으세요?”

어르신은 돈이 많으니까…. 하며 루프는 슬쩍 내 눈치를 봤다.

“무슨 일을 하려는데 전부 고용하려는 거예요? 루프는 28번째 테라리움에서 가업을 물려받아 보석 공예를 하겠다고 하지 않았어요?”

내 질문에 루프는 오래도록 답하지 못했다. 그녀의 이야기에 흥미가 동한 것인지 집무실의 카펫까지 뒤집어 살피던 이리스가 조용히 테이블 곁으로 왔다.

“사실… 어닝 님의 강연회가 있던 날, 그날 들었던 이야기에 전 많은 책임을 느꼈어요.”

그날은 어닝의 입을 통해 루프를 비롯한 사람들이 28번째 테라리움의 참상을 알게 된 날이었다. 루프가 고안한 연구를 어닝이 실현시키고 끝내 28번째 테라리움이 멸망의 길을 걷게 한 일.

“선배 연금술사들이 틀을 잡은 수칙에 대해선 생각해 왔으면서 한 번도 직업 윤리에 대해선 제대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것 같아요. 항상 결과물을 내기 급급했고… 이건 결국 핑계죠. 어쩌면 전 쫓겨난 16번째 연금탑의 사람들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해요. 제 연구는 직접적으로 사람들을 해치는 결과를 낳았어요.”

그녀에겐 잘못이 없다고 말하려는 찰나였다.

“제가 사람들 앞에 제 논문을 선보이지 않았다면 28번째 테라리움은 그런 결말을 맞이하지 않았을 거예요. 전 제 논문이 보탬이 되었다는 것이 밝혀진 순간 합당한 벌을 받아야만 했어요. 하지만 제 잘못을 꾸짖는 사람은 없고 오히려 그 논문을 내고도 지금까지 잘 살아왔어요. 가족들을 28번째 테라리움으로 이주할 기회도 얻었고요. 어르신조차도… 한 번도 제게 그 일에 관해서 이야기를 꺼내시지 않았죠.”

“루프의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그 연구는 결국 잘못 이용한 사람의 죄가 크다고 생각해요.”

옆에서 듣던 이리스가 내 말에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다시 연구를 할까 해요. 어르신의 말처럼 연구물이 잘못 이용되는 것을 막는 연구를 말이에요. 저도 기회를 얻은 것처럼… 지금 연금탑에서 쫓겨난 사람들도 자신들이 벌인 일에 대한 잘못을 바로잡을 기회를… 주제넘지만 얻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주저하던 루프는 내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힘있게 말했다.

“인공 개량에 대한 연구는 이미 꽃을 피웠고 세상 밖으로 나왔어요. 결과가 존재하는 한 분명 다시 악용될 수 있어요. 하지만 그 결과를 낸 사람들을 모아서 예방책을 만들어 낸다면 확실히 막아 낼 수 있을 거예요. 또한 인공 개량뿐만 아니라 시중에 나와 있는 연구물들도 사람에 따라 악용이 될 수 있다면 미리 방지하는 작업도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루프의 생각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자신이 직접 야기한 일도 아닌데 책임감을 느끼고 바로잡는 일까지 앞장서서 하겠다니. 처음 만났을 때도 꽤 강단 있는 성격이라 생각했는데 이토록 바른 인물일 줄은… 새삼 다시 느낀다.

“이미 연금 학회에 인식이 잘못 박혔으니 그들이 전부 정식으로 드러내 놓고 활동할 순 없어요. 아마 연구를 다시 시작하는 일조차 질타를 받을 수 있어요. 그러니 오직 어르신만이 설립하고 지원하는 독립적인 단체에서 연금술사의 이름을 버리고 활동해야만 해요. 하지만 정말 어르신 홀로 다른 곳의 후원 없이 재정적 지원을 해야 하는데….”

“좋은 생각이에요! 그런 대단한 일이라면 물심양면으로 지원해야죠!”

루프는 내 재정을 걱정하지만 다이아야말로 내 주특기였다. 안 그래도 지금 16번째 테라리움에서 발생하는 민원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데 이렇게 돌파구를 마련해 준다면 대환영이다.

하지만 루프의 생각이 이렇다 하더라도 연금탑의 사람들까지 그렇게 생각할지는 모를 일이었다.

그녀는 일사천리로 자리를 마련했다. 어닝이 그러했듯 비어 있는 대강당의 강연회실을 이용하여 연금탑의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강단에 섰다. 홍보 시간도 하루, 그녀가 연설을 준비했을 시간도 고작 하루였다.

하지만 연금탑의 사람들은 빠짐없이 모두 참여했고 아직 연금술사의 직책도 달지 못한, 고작 연구원에 불과한 그녀의 연설을 집중하여 들어 주었다.

“우린 과오를 바로잡아야만 합니다. 새로 태어날 단체는 앞으로 모든 연금술을 위한 윤리의 지붕이 되어 줄 겁니다. 수없이 쏟아지는 오용의 비바람에서 연구물들을 안전히 지키고 장치가 마련되지 않는 한 지붕 밖으로 나갈 수 없도록….”

모두가 루프가 제안한 길을 걸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사상에 감화되지 않더라도 당장의 생계를 위해서 기꺼이 그녀가 설립하고자 하는 단체에 투신하겠다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합리적인 이유로 주어지는 의식주 제공에 연구비 지원의 유혹이 컸기 때문이다.

그들이 계속 16번째 테라리움에 머물기엔 좋지 않은 시선이 컸다. 그래서 그들은 돌아가는 루프를 앞세워 모두 28번째 테라리움으로 이동하기로 했다.

아직 남들의 시선이 크게 닿지 않는 곳. 다시 시작하기에 알맞은 곳. 28번째 테라리움으로 많은 수의 지적 재산들이 이주할 예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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