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리스는 회의실에 다시 들어온 순간부터 제퍼와 함께 호들갑이었다.
“제이 님, 정말 대단했어요. 어떻게 그렇게 감쪽같이 연기할 수 있어요? 다른 사람을 보는 것 같았어요.”
“마스터, 여태 보여 줬던 모습들이 전부 연기였나요? 중앙 행정 관리부 사람들을 대할 때가 마스터의 진짜 모습 아닙니까? 알고 보니 진짜 어디 대형 조직의 보스쯤 되는 분 아니신 건가요?”
“그렇게… 대단했어요?”
술기운을 빌리길 잘한 건가?
“어찌나 위험한 기운을 풀풀 풍기던지 마스터님께서 콘셉트로 뿌리신 술 냄새가 정점이었습니다! 아무리 높으신 중앙 행정 관리부 사람들이라도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느낌이었어요.”
절대 진짜 술을 마셨다곤 이야기 안 해야지.
“금발의 남자가 가져온 그 퍼 코트는 또 어떻고요. 처음엔 웬 거적때기를 제이 님께 들이미나 했는데 은근히 잘 어울렸어요. 그런 해괴한 디자인은 이 세상에 또 존재하지 않을 것 같지만 굉장히 비싼 옷 같잖아요? 다이아를 물 쓰듯 쓰는 제이 님만이 재미 삼아 구매할 듯한 코트였다고요.”
내 이미지가 이리스에겐 그렇구나. 하지만 아무리 다이아가 넘치는 나라도 이런 코트는 절대 직접 안 살 거야.
이젠 그럴 필요가 없어졌으니 코트도 벗고 정장 재킷도 벗었다. 꽤 답답했다. 넥타이도 풀어서 책상 위로 던지고 단추도 풀고, 머리끈을 꺼내서 공들였던 머리를 하나로 모아 묶었다.
이제 좀 숨이 트였다. 드디어 거대한 프로젝트 하나를 마무리한 느낌이었다. 이게 조별 과제였다면 A+는 맞았을 것 같은 좋은 결과였다.
“그 사람들 나가면서 아이언비스트 이야기도 하던디.”
내내 굳은 표정을 유지하는 것이 곤욕이었는지 헤르마가 입가를 연신 문지르며 넌지시 이야기를 꺼냈다.
“아, 맞아. 그가 어떻게 제이 님의 관리하에 놓이게 됐는지 수군거리더라고요. 대형 길드가 수배 중인데 담도 크게 그를 교화시킬 마음을 먹었다고, 역시 세계수의 묘목이 되기 위한 길을 걷는 자는 다르다고 했어요.”
회의실을 나가는 중앙 행정 관리부의 사람들을 특별히 배웅하진 않았다. 난 메스키트와 이야기하기 위해 남았고 길드원들만이 그들과 함께 나갔었다.
나 없는 자리에서 나왔던 이야기들을 그들이 전부 말해 주었다. 뭐, 시들링의 이야기가 나올 것도 어느 정도 예상했었다. 쟨 그 유명한 수배범이니까.
“악명이 높은 그라고 해도 제이 님과 함께 있는 한 다시 그에 대한 평가를 검토해 봐야 할 것 같다고 했어요. 아이언비스트의 악명이 조금이라도 희석된다면 우리 길드에 더 좋은 일이겠죠?”
“네가 끼어들어서 한 말을 빼먹으면 안 되는디. 제이 님이나 되니까 목줄 잡고 길들이고 있다고 수틀리면 문다 했는디.”
“분위기를 타서 저도 모르게….”
이리스는 시들링과 날 번갈아 보며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난 짐승이 아니다. 하지만 그녀에게 해를 끼친다면 가만있지 않는 것은 맞는 말이다.”
시들링은 덤덤하게 말했다. 제퍼는 그 뒤로 자신들이 험상궂게 표정을 굳히고 있던 것보다 시들링이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서 있는 것이 분위기 잡는 것에 몇 배나 더 큰 효과를 보였다고 조잘거렸다.
“이리스가 최대한 얕보이지 않게 인상 팍 쓰고 있으라고 지시했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화난 기분을 유지하려 전 길드에서 있었던 일들을 떠올렸는데 제가 아무리 눈썹 모으고 있어 봤자 아이언비스트의 위엄은 못 따라가겠던데요? 그 사람들 아이언비스트 말곤 저희에겐 시선도 안 줬어요.”
역시 이리스의 지시였구나. 나름대로 꽤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자, 이제 정말로 여러분들을 모이게 한 이유를 이야기해 볼까요? 회의실에서 이야기 나왔던 세계수의 묘목, 순례자에 대한 이야기예요.”
운을 띄우고 메스키트를 바라보았다. 이제 그녀가 설명할 차례였다.
“그렇다면 이것부터 짚고 넘어가야겠군요. 저의 존재에 대해서 나의 작은 세계수에게 제대로 소개해 드려야겠어요.”
메스키트가 인자하게 웃으며 날 바라보았다. 그녀는 나와 이야기를 위해 벗어 두었던 투구를 다시 썼다. 양쪽에 투구 깃의 자리를 대신한 벨벳 메스키트의 노란 꽃대가 전장의 승기처럼 우뚝 섰다. 내 몸집보다 큰 거대한 방패를 두 손으로 바로 들자 그녀를 처음 개화시켰을 때의 모습이 떠올랐다.
“저는 세계수가 최초로 빚은 10그루의 필드 가디언 중 데저트 필드의 규율을 수호하는 단 한 그루의 나무랍니다. 세계수의 굳건한 뿌리에서 태어났지요.”
그동안 메스키트를 본 사람들이 ‘필드의….’ 하고 말을 꺼냈지만 한 번도 끝맺지는 못했던 단어의 정체가 나타났다. 메스키트는 스페셜 등급이라는 특징 외에도 정말 대단한 존재였구나.
“최초라는 건 메스키트는 태초부터 있었다는 거야?”
“후후, 그건 아니랍니다. 역대 벨벳 메스키트의 모체를 이어받아 오고 있답니다. 제게도 선조는 있어요.”
“그래도 정말 오래된 드라이어드는 맞다는 거네?”
왜냐면 메스키트가 세상에 다시 나온 건 수십 년 만이라고 했으니까….
“와, 역시 맞는가 본디. 우리가 본 석상의 정체가 필드의 가디언들을 조각해 놨던 거였네.”
헤르마가 둔탁하게 손뼉을 마주치더니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대체 그럼 우린 길 잃고 뭘 발견한 거야? 고목 드라이어드들 사이에서 전설로 내려오는 필드의 가디언 석상이 10개 다 있는 곳이면 우리가 가선 안 됐던 곳을 간 거 아냐?”
“필드를 수호하는 단 한 그루의 나무들이 있다고 했는데 진짜였어? 난 정말 그냥 옛날이야긴 줄 알았는데.”
“그 전설 중 하나가 여기 있다니. 여태 우리가 해 왔던 모험 중 가장 놀라운 일들은 다 최근에 일어나네.”
이리스와 제퍼가 헤르마의 말에 맞장구를 치며 높은 톤의 목소리로 재잘거렸다. 그들이 석상을 봤다던 던전 같은 장소, 나도 가 보고 싶다. 석상으로 조각된 메스키트는 얼마나 멋있을까?
그러고 보니 필드의 가디언…. 어디서 들어봤다 했더니 내가 메스키트에게 선물한 아티팩트 하우스 중 태양의 신전의 홍보 문구가 그러했었다.
내 드라이어드에게 필드의 가디언이 된 기분을 느끼게 해 주라고 했지. 단순히 멋진 단어를 사용하는 줄 알았는데 실제 전설을 인용한 문구일 줄은….
그렇다면 태양의 신전은 진짜로 필드의 가디언인 메스키트의 집인 거 아냐? 메스키트는 짝퉁을 보고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 아니 내가 좀 더 눈치가 빨랐다면 금방 유추해 낼 수 있었던 정체이지 않았을까?
“전설, 전설 하는데 가디언은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 거야? 드라이어드의 신인가? 가디언은 규율을 수호한다는데 정확히 무슨 일을 하는 건데?”
메스키트가 정말 대단한 존재인 건 알지만 더 자세히 알고 싶었다. 더 많이 풀어 줘.
세상 사람들! 필드의 가디언인 드라이어드가 무려 제 드라이어드예요! 스페셜 등급보다 더 대단한 것 같아요! 확성기 들고 밖에 뛰쳐나가 외치고 싶다.
“그거라면 그녀를 대신해 떠들어 줄 존재가 있다.”
무려 메스키트가 대단한 비밀을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무덤덤한 시들링이 말했다. 그와 동시에 그의 아티팩트가 환하게 빛을 내며 야단법석을 떠는 드라이어드가 나타났다. 첫 만남부터 메스키트의 광팬처럼 행동하던 카돈 드라이어드였다.
아마도 자생 필드가 데저트 필드임이 분명한 그 드라이어드를 소개할 때, 사막의 왕자라고 했던가?
“오오! 위대한 필드의 가디언을 뵙게 되어 정말 영광입니다!”
그는 등장과 동시에 우렁차게 소리쳤다. 분명 그도 메스키트를 향해 ‘필드의…’까지 말하다가 제지를 당했지. 그가 하는 행세를 보니 그동안 말하고 싶어서 얼마나 안달이 났을지 상상이 갔다.
나름대로 한 수다를 떠는 제퍼보다 더한 위인이었다. 무릎이라도 꿇을 것처럼 요란을 떠는 카돈의 등장에 시들링을 제외한 모두가 절로 눈을 찌푸렸다.
“데저트 필드의 절대자! 모든 사막 꽃들의 인도자! 존재 자체로 규율을 수호하는 위대한 존재!”
참느라 병나지 않았을까? 여간 시끄러운 것이 아니었다. 봇물 터지듯 터져 나오는 메스키트를 향한 찬양에 내가 다 민망할 정도였다.
하지만 메스키트는 아무 말 없이 카돈이 하는 양을 그저 내버려 두고 있었다. 그 모습에서 어른으로서의 원숙미가 느껴졌다.
아, 그녀가 카돈을 대하는 태도는 꼭… 엘더를 대하는 태도와 비슷했다. 결국 카돈을 어린 묘목 드라이어드 보듯 하고 있었구나.
던전에서 본 석상에 대해 이야기했던 이리스 파티, 메스키트를 광신도처럼 찬양했던 카돈…. 그녀에 대한 힌트가 숨어 있었던 이전의 일들을 하나둘 떠올리다 보니 종자 보관소에서 파피루스와 메스키트가 나눴던 대화도 떠올랐다.
“필드의 규율이 빚어 준 정체성이 그 어떤 곳도 세계수의 축복이 닿지 않는 곳이 없도록 하라는 뜻.”
“너무 오래 공허한 역사가 흘렀으며 그 정체성이 많이 무너졌다는 것….”
그리고 메스키트가 중앙 행정 관리부의 사람들에게 했던 말.
“자신을 비롯한 ‘굽어보기를 외면하고 눈을 감은’ 가디언들을 모두 모아 일깨울 것.”
“메스키트… 혹시 세계수의 묘목이 되는 길은… 메스키트 같은 필드의 가디언들을 내가 다 모아야 한다는 거야? 그리고 그 드라이어드들이 자신의 일을 하도록 내가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것 같은데….”
내 물음에 메스키트는 또다시 미안하다는 얼굴이 되었다.
“어…. 제이 님. 그렇다는 건 자생 필드는 총 열 개가 있으니까…. 가디언도 열 그루고…. 가디언이라면 분명 스페셜 등급이겠죠? 제이 님이 메스키트를 제외한 스페셜 등급의 드라이어드 아홉 그루를 모두 찾아야 한다는 뜻 아닌가요?”
그게 가능해? 메스키트는 26번째 테라리움의 과수원에서 10년 만에 나타난 스페셜 등급이었다. 그녀를 뽑은 것은 정말 내 일생에 다시 없을 수도 있는 행운이었다.
“내 주인, 제이. 그것이 순례자의 사명이에요. 이래서 제이에게 아무것도 말하고 싶지 않았답니다. 책임을 지겠다고 한순간, 정말 고된 시련이 나의 주인을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요. 자신의 지위를 외면하고 방황하는 가디언들이 어느 곳에서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소멸하여 새로운 자리를 이을 탄생을 기다리고 있을지, 세계수의 품 안에서 깨지 않는 잠을 자고 있을지 아무것도 알 수 없답니다.”
내가 죽기 전에 다 모을 수나 있을까? 이거 클리어 가능한 퀘스트 맞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