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에서 본 메스키트는 지금의 내게 그렇듯 전 주인에 대한 충성심이 굉장히 높아 보였다.
새 주인을 맞이하길 꺼렸지만 결국 전 주인의 마지막 소망에 따라 지금의 내게 온 메스키트. 그녀가 내게 보이는 모습은 진실한 모습일까? 이 세계에 와서 가장 믿었고 의지했던 그녀였기에 너무나 혼란스러웠다.
그런 내게 동요하듯 어둠을 밝히던 유일한 불빛인 핸드폰의 황금빛 문양이 일렁거렸다. 점차 불빛이 약해졌다. 그럴수록 내 모습은 어둠 속에 녹아들었다.
메스키트가 날 향해 지었던 미안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리고 우연찮게 보게 된 그녀의 과거. 왜 내게 미안해하는 걸까? 그녀로 말미암아 내게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일어나려는 걸까?
그리고… 죽음을 따라서 소멸을 각오할 만큼 굉장히 애틋한 관계였던 전 주인이 있었던 드라이어드가 과거를 잊고 새 주인을 맞이할 수 있을까?
내가 아는 가장 비슷한 사례인 두 명의 주인을 섬긴 인동덩굴의 모습이 떠올랐다. 두 꽃의 자아가 공존하는 인동덩굴은 특이 케이스긴 했지.
과거의 인연을 소중히 여기면서도 새로운 인연마저 소중해 결국 전 주인과의 인연을 끝낸 드라이어드. 그의 소망에 따라 아끼던 자신의 드라이어드를 보내 줘야만 했던 어닝. 하지만 그건 결국 드라이어드 자신의 선택이었다.
메스키트가 내게로 온 건 순전히 전 주인의 소망에 따른 결과였다.
“내 주인, 제이.”
그녀가 버릇처럼 날 부를 때 항상 붙이는 ‘내 주인’이라는 말. 지금에 와서야 생각해 보니 마치 세뇌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그렇게 여겨야만 한다는 듯이.
또다시 떠오르는 의문이 있었다. 엘더와는 쓸 수 있었던 그래프트를 왜 메스키트와는 쓸 수 없을까?
가장 가깝다고 생각했던 그녀와는 왜 그래프트 교감을 느끼지 못했던 걸까? 그건 결국 날 대하는 그녀의 마음이 진실이 아니기 때문인 걸까?
불빛이 갈수록 어두워진다.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어둠이 내 시야를 가린다.
“하지만….”
여태 내게 보여 줬던 메스키트의 모습을 모두 거짓된 연기로 치부하기엔 내가 판단한 메스키트의 모습이 고작 그 정도밖에 안 됐다고 하는 거잖아.
“내 몸을 다해 한 줌 재가 될 때까지 나의 주인이 될 자를 비호하겠다.”
“내 주인, 제이. 당신의 고민을 가장 먼저 알고 싶어요.”
나를 향한 굳건하고 다정한 호박색 눈. 그녀에게서 느끼는 안식을 모두 거짓이라 치부할 수 있을까?
메스키트는 항상 날 진심으로 생각해 줬다. 내게 숨기는 것이 많더라도 그것이 전부 날 위한 것임을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받아들였던 건, 그녀가 날 진심으로 소중하게 대해 줬기 때문이다.
약해졌던 핸드폰의 황금빛 문양의 불빛이 다시 힘을 찾기 시작했다.
설령 그녀가 아직 전 주인을 잊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날 향해 끊임없이 ‘내 주인’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녀 스스로 자신의 마음을 다잡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건 나를 자신의 주인으로 여기기 위한 그녀의 굳은 의지겠지.
맞는 답을 선택했다는 것처럼 불빛이 크게 요동쳤다.
항상 비밀스러웠던 그녀의 과거가 한 꺼풀 벗겨진 건 내가 감당할 수 있을 거란 믿음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기에 메스키트의 과거 모습을 보고 혼란스러워하는 건 그녀의 믿음을 배반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오히려 정말 전 주인을 그리워한다면 내게서 철저하게 전 주인의 존재를 숨기고 과거를 숨기려 하지 않았을까?
또 한 번 요동친 불빛이 크기를 키우고 내가 선 자리를 환하게 밝힐 정도가 되었다.
과거가 어땠든 지금의 메스키트는 내 드라이어드다. 그녀가 지금 내게 온 선택을 후회하지 않도록 최고의 주인이 되어 줄 거야.
그녀가 미안해하면서까지 내게 맡겨야만 했던 일은, 결국 내가 이겨 낼 수 있을 거란 믿음에서 온 걸 거야.
메스키트와 그래프트를 아직 사용할 수 없는 건 뭐 어때. 그녀의 과거가 한 걸음 내게 다가온 것처럼 천천히 교감하면 돼.
나도 메스키트에게 아직까지 말할 수 없는 비밀이 있지만 그건 결코 그녀를 신뢰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설명할 자신이 없기 때문이었다. 메스키트 역시도 내게 그런 걸 거였다.
마침내 불빛이 모든 어둠을 걷어 냈다.
“뿌리는 항상 옳은 자리를 향해 찾아가지 않아요. 바위에 가로막히기도 하며 물길이 전혀 없는 마른 곳을 파헤치기도 합니다. 어떨 때는 양분이 없는 죽은 땅으로 하릴없이 뻗어 나가기도 하고 해로운 독이 가득한 늪에 잘못 들어서기도 하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뿌리 내린 나무가 건강할 수 있는 건, 그만큼 견고한 뿌리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잘못된 곳을 찾아가도 언제라도 다시 뻗어 나아갈 길을 찾을 수 있는 것. 잘못된 곳을 찾아가는 일은 결코 실패한 경험이 아니니 낙심하지 말아요. 더 이상 반복하지 않으면 돼요. 견고한 뿌리는 언제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답니다.”
어디선가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지한 나를 조곤조곤 가르치는 듯한 다정한 목소리. 성별을 구분할 수 없고 들려오는 방향을 알 수 없는 목소리. 꿈과 환영 속에서 수차례 내게 말을 건넸던 세계수의 것으로 추정되는 목소리였다.
나를 현실과 갈라놓았던 이상한 장소가 사라지고 다시 회의실로 돌아왔다. 눈앞엔 여전히 오라를 내뿜고 있는 메스키트가 있었다. 환영이 끝나자 메스키트를 제외하고 멈춰 있던 모든 것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수맥을 찾기 어렵고 메마른 모래만 가득한 데저트 필드의 나무들에겐 견고한 뿌리가 중요합니다. 당신에겐 그런 데저트 필드의 나무들을 이해할 수 있는 견고한 뿌리와 같은 영혼의 믿음이 있어요.”
날 격려하는 듯한 말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성스러운 목소리를 들리지 않았다.
마침내 메스키트를 감싸고 있는 바위의 문구의 마지막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견고한 뿌리를 가진, 나의 축복의 묘목이 되리라.
심장이 세차게 두근거렸다. 온몸이 긴장되었다. 마치 중요한 선택을 앞두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중앙 행정 관리부의 사람들이 내게 묻고 메스키트가 기다리는 선택의 대답.
나의 선택으로 인해 결코 쉽지만은 않은 길이 펼쳐질 것 같지만 이로써 내가 메스키트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된다면. 그녀를 내 드라이어드로 받아들임으로써 져야 할 책임이라면.
“그래요, 전 세계수의 묘목이 되기 위해 준비해 왔어요. 내가 행한 모든 일은 그런 준비가 있기에 가능했던 일들이에요.”
내가 환영을 보던 시간은 길었지만 알 수 없는 힘이 이를 찰나로 만든 듯했다. 그들이 묻고 내가 답하는 것이 아주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이제서야 메스키트가 갑자기 아티팩트에서 나타나 그들 앞에서 그런 행동을 했던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는 내가 지키고 싶어 하는 무한 다이아의 비밀을 지켜 주기 위해 기꺼이 자신의 비밀을 대신 오픈한 것이다.
내가 다이아의 출처를 두고 변명거리를 만들기 위해 전전긍긍하던 것을 메스키트는 가까이서 봐왔다. 결국 답을 내지 못한 날 위해 대신 변명거리를 만들어 준 것이다.
“세계수의 묘목이 되기 위한 길을 걷는 자라면 불의가 일어나는 테라리움을 내버려 두지 못한 것도 이해는 갑니다. 많은 드루이드가 당신의 길을 응원하고 지원해 주겠지요. 부디 그 길을 끝까지 걸어 불로 혼란스러운 이 세상에 위대한 세계수에게 힘이 되어 줄 수 있는 존재로 거듭나길 바랍니다.”
내 대답의 위력은 대단했다. 세계수의 묘목이 되겠다는 선언이 얼마나 대단한 포부인진 잘 모르겠지만, 날 못마땅해하던 중앙 행정 관리부는 그 대답을 듣곤 더 이상의 의심 없이 날 16번째 테라리움의 정식 행정 관리원으로 임명했다.
그들은 크레아시온을 연행한 채 테라리움을 떠났다. 난 회의실의 사람들에게 잠시만 자리를 피해 줄 것을 권했다. 메스키트와 단둘이만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대체 세계수의 묘목이 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야? 바위… 아니 스톤헨지에 새겨진 문구를 읽으면 세계수의 대리자가 되기 위한 길을 걷는다는 느낌이던데.”
“내 주인, 제이. 제이가 이해한 것이 맞답니다. 하지만 상의도 없이 큰 책임이 따르는 자리에 제이의 이름을 올린 것은 정말 미안해요. 제이가 오랜 시간 고민하며 힘들어하기에 도움이 되고 싶었고 이것만이 최선이라 생각했어요. 단순히 제이를 곤경에서 구하기 위해 꺼냈던 이야기니 부담된다면 이 자리에서 전부 잊어버려도 돼요. 제이가 힘들게 책임을 질 필요는 없어요.”
메스키트가 걱정이 담긴 눈이 날 오래도록 바라본다. 역시 날 위해서. 그런 메스키트의 진심을 한순간 의심했다는 것이 부끄러워졌다.
“아냐, 생각해 보니 그거 정말 대단한 일인 것 같아. 세계수의 대리자라니? 순례자라는 어려운 단어를 쓸 땐 와닿지 않았는데 엄청나잖아? 메스키트는 날 곤경에서 구하기 위해 한 핑계라고 여길지 몰라도 세계수는 정말 날 자신의 대리자로 인정한 것 같던데.”
“제이의 꾸준한 선한 행동들이 세계수의 신뢰를 쌓았으니 당연한 거랍니다.”
메스키트가 거대한 메인 퀘스트를 강제로 오픈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난 그걸 기꺼이 수락할 생각이었다. 완료한다면 더 많은 이야기를 알게 되고 큰 보상을 얻을 수 있겠지.
“메스키트는 어때? 내가 못해 낼 것 같아? 만약 메스키트가 판단하기에 내가 아직 그릇이 못 된다면 포기할게.”
하지만 아주 고난도의 퀘스트일 거야. 아주 오랜 시간과 정성을 들여야 할 수도 있어.
포기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토록 내게 알려 주고 싶지 않았던 길이라면 아직 클리어에 도전 못 할 수준일 수도 있으니 다시 생각해 봐야 할 수도 있었다.
“지금의 제이라면 빈말이 아니라 준비가 되었어요. 이건 진심이랍니다.”
드디어 메인 퀘스트를 진행해도 되는 거야?
“그래서 세계수의 묘목이 되려면 내가 뭘 하면 되는 거야?”
“이건 제이의 길드원들도 함께 듣는 것이 좋겠어요. 혼자보단 여럿이 함께하는 것이 더 힘이 되니까요.”
혹시나 메스키트가 비밀을 나에게만 공유하고 싶어 할까 봐 자리를 피해 달라고 했던 건데. 메스키트의 요청에 따라 회의실 밖에 있던 길드원들을 불러들였다.
물론 파필리온은 쏙 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