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작스러운 메스키트의 등장에 당황스러웠다. 지금은 내 신변이 큰 위험에 처한 것도 아니었다.
다이아 이야기만 나오면 내가 누구와 이야기하든 꼭 끼어드는 엘더와 다르게, 메스키트는 내 커뮤니케이션을 존중하여 본인이 끼어드는 일은 잘 없었다.
그렇기에 전투 때 외엔 잘 착용하지도 않는 투구까지 착용하고 만반의 준비로 나타난 그녀에게 많은 당혹감을 느꼈다.
등장과 동시에 주변의 분위기를 압도하는 메스키트에게로 모두의 시선이 향했다.
“그 드라이어드는…. 설마 벨벳 메스키트?”
그리고 중앙 행정 관리부의 사람들은 놀랍게도 메스키트를 한눈에 알아보았다.
내 아티팩트에서 나온 드라이어드니 당연히 주인은 나. 그들은 경악스러운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단순히 스페셜 등급이라서 놀란 눈은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이 자리에 데저트 필드의 가디언을 불러내 선보였다는 것은, 그 뜻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맞습니까?”
내가 부른 건 아닌데. 마치 그들에게 일부러 내가 메스키트를 소환했다는 투였다. 조금 의아했던 건 그들이 메스키트를 칭하는 호칭이었다.
그녀의 자생 필드가 데저트 필드인 건 맞는데 가디언? 메스키트의 드라이어드 정보에 사막의 수호신이란 칭호가 있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들이 부르는 칭호는 조금 이질적인 느낌이었다.
나는 그들의 물음에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메스키트가 왜 갑자기 이 타이밍에 스스로 나왔는지, 그녀가 직접 말해 주길 원했다.
“그대들이 생각하는 것이 맞습니다. 나의 주인, 나의 작은 세계수는 오랫동안 어지럽혀진 필드의 규율을 바로잡기 위해 세계수에게 선택된 순례자입니다. 위대한 세계수가 내 주인의 앞길을 밝히고 축복할 것이며 그녀는 저를 비롯한 ‘굽어보기를 외면하고 눈을 감은’ 가디언들을 모두 모아 일깨울 것입니다.”
메스키트가 하는 말을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스스로를 감히 세계수의 묘목이라 자칭하는 것입니까?”
세계수의 묘목이라고?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내 주인이 나를 앞세워 뜻을 밝히는데 ‘감히’라고 칭하는 건가요?”
메스키트가 노골적으로 불쾌함을 표현했다. 마치 전투 때처럼 살벌한 기세가 회의실을 가득 채웠다.
“단지 스페셜 등급의 드라이어드를, 그것도 필드의 가디언을 운 좋게 손에 넣었다고 모두가 순례자가 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어디서 그런 잊힌 전설을 들었는지는 몰라도 세계수의 가장 가까운 가지, 1번째 테라리움의 중앙 행정 관리부를 상대로 그 전설을 실현하겠다고 공표한 것이 얼마나 큰 의미를 가지는지 알고 있습니까?”
“어….”
“내가 나의 작은 세계수의 영혼에 닿은 건 세계수가 인도한 운명, 다른 가디언들도 모두 내 주인에게 모이는 것 또한 운명이지요. 내 주인은 도움이 필요한 세계수의 가지를 영혼에 담아 가며 오랫동안 준비해 온 순례자의 걸음을 비로소 시작하고 있습니다.”
뭔가 일개 쪼렙인 내가 감당할 수 없는 대단한 이야기들이 오가는 것 같은데 가만둬도 되는 걸까? 메스키트는 왜 갑자기 이런 말을 하는 걸까?
“정말 당신이 세계수 묘목의 길을 걷길 마음먹었다고 받아들여도 되겠습니까?”
어…. 그게 뭔데? 내가 세계수의 묘목이라니? 당황스러운 나머지 술이 확 깨는 기분이다.
아무 말도 못 하고 메스키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녀는 어쩐지 미안하다는 얼굴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나와 상의도 없이 모르는 이야기를 마구 해 놓고 갑자기 왜 그런 얼굴을 하는 거야? 다 내 생각 하고 한 것이 아니었어?
평소와는 다른 메스키트의 모습, 그녀가 이런 얼굴을 보이면서까지 내게 맡기려는 일에 어쩐지 조금 긴장되고 작은 두려움이 밀려왔다. 그래서 남자의 물음에 쉽사리 답할 수 없었다.
갑자기 메스키트의 주위로 금빛 오라가 하늘하늘 피어났다. 뒤이어 그녀에게 거대한 나무가 투영되었다. 아티팩트에서 보았던 그녀의 모체인 벨벳 메스키트였다.
이렇게 모체가 투영되는 경우는 엘더와 그래프트를 시전했을 때도 겪었다. 하지만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
아티팩트를 채운 왼팔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팔에서 시작된 온기는 점점 심장을 향해 번졌다. 팔에 문신처럼 자리하고 있던 나무줄기의 문양이 떠올라 발현했다.
문양은 빙글빙글 돌며 복잡하게 얽혀 있던 나무줄기를 풀어내더니 메스키트를 향해 뻗어 나갔다. 그리고 메스키트를 제외한 모두가 마치 일시 정지를 누른 것처럼 시간이 멈췄다.
줄기는 그녀에게 도달하자 서로 뒤엉키더니 거대한 바위의 형상을 만들어 갔다. 그러자 곧 벨벳 메스키트 나무가 바위 속에 갇힌 것처럼 되었다. 위로 길쭉한 거대한 바위의 형태는 언젠가 본 적 있는 모습이었다.
내가 가이아 길드를 만들었을 때, 넓은 초원의 환영이 펼쳐지고 그 위에 솟아난 열 개의 거대한 바위의 모습과 닮아 있었다.
이동하는 뿌리가 비로소 한곳에 붙박여 있던 나의 발이 되어….
온실의 석판처럼 거대한 바위에 금빛으로 반짝이는 글자가 새겨졌다.
나의 눈먼 축복이 영혼에 투영된 곳곳의 세상을 살피며 눈을 뜨게 되고….
세상을 나선 나의 방황하는 아이들이 옳은 선택을 할 수 있도록 이끄는….
메스키트 위로 덧입혀진 바위의 형상에 새겨지는 문구를 읽고 있는데 불현듯 주변의 풍경이 바뀌었다.
좀 전까지 난 밝은 회의실에 있었는데 어느새 어두운 방 안이었다.
타닥타닥, 장작 타는 소리를 내며 은은하게 빛을 내는 벽난로만이 유일하게 빛을 내는 곳이었다. 굵은 통나무로 만든 벽과 낡은 카펫이 깔린 흙바닥이 보였다.
“미안해…. 내가 좀 더 건강했으면…. 너의 뜻을 이뤄 줬을 텐데. 하필 이렇게 볼품없이 태어나서. 이런 보잘것없는 사람이 드루이드라 항상 미안해.”
누군가의 가녀린 목소리와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보니 어둠 속에서 두 사람이 조촐한 식탁에 앉아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중 한 명은 내가 아주 잘 아는 모습이었다.
“그런 말 하지 말아요. 태어나기를 그렇게 선택한 자는 없어요. 당신은 항상 최선을 다했어요. 오히려 제가 당신에게 너무 큰 짐을 지게 해서 미안해요.”
머리끝까지 두꺼운 담요를 쓰고 있는 여자의 반대편에 앉은 사람은 놀랍게도 메스키트였다.
“그래도 기뻤어. 별 볼 일 없던 내가 너와 함께하는 동안은 정말 대단한 사람이 된 것 같았어. 멋진 여행을 하게 해 줘서 고마워.”
“저 역시도 당신과 함께하는 모든 길이 즐거웠어요.”
“난 이제 곧 내 여행을 끝내지만 넌 그래선 안 돼.”
“…제게 주인은 오로지 당신뿐이에요. 내게 다른 주인을 섬기라 강요하지 마세요.”
“아냐. 넌 세계수의 품으로 돌아가야만 해. 나를 따라서 소멸을 각오한 거 알고 있어. 하지만 네가 떠나면 너의 필드는 가디언의 자리가 아주 오랫동안 공석이 돼. 데저트 필드의 규율을 수호하는 네가 사라지면…. 다음 벨벳 메스키트가 태어날 때까지 큰 혼란에 휩싸일 거야.”
“당신은 드루이드와의 영혼의 연결이 내 모든 것을 버릴 만큼 소중하고 애틋하다는 것을 가르쳐 줬어요. 이런 내가 어떻게 당신이 아닌 다른 드루이드를 섬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요?”
“나의 처음이자 마지막 드라이어드…. 내 깨진 영혼은 너를 담는 것만으로도 벅차 세계수의 소망을 실현시킬 수 없었어.”
“내겐 세계수보다 나의 작은 세계수가 먼저예요.”
나를 대할 때처럼 애틋하게 다른 이를 대하는 메스키트의 모습은 매우 이질적이게 느껴졌다. 어쩐지 심장이 세게 뛰고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내가 보고 있는 이 광경은 대체 뭐지? 설마 메스키트의 과거? 그녀가 섬기던 전 주인의 모습인 건가?
어느새 식탁과 메스키트의 모습이 사라졌다. 그리고 여태 메스키트와 이야기를 나누던 여인이 내 앞에 걸어와 섰다. 그녀는 내가 아닌 내 뒤편의 공간을 공허하게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내 약한 영혼이 메스키트의 대의를 보는 눈을 멀게 만들었어. 메스키트에겐 꼭 해야만 하는 일이 있어. 내게 소망이 있다면, 메스키트가 세계수보다 우선시해 줄 죽기 전 내 마지막 소망이라면…. 나를 잊고 새로운 드루이드를 만나. 그리고 새로운 여행을 다시 시작해. 그 어떤 주인을 만나도 나보단 강할 거야. 더 이상 주인이 언제 죽을지 몰라 전전긍긍하는 나날은 없을 거야. 메스키트가 걱정하는 시련들도 새 주인이라면 전부 이겨 낼 수 있을 거야.”
그녀는 무척이나 지쳐 보였다.
“그것이… 당신의 마지막 소망이라면…. 내 주인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은 어둠 속에서 메스키트의 슬픈 목소리가 들려왔다.
“메스키트라면 정말 좋은… 믿음직한 드루이드를 만나게 될 거야. 그러니… 과거인 나에게 얽매이지 마. 난 더 이상 너의 주인이 아니야. 나와 함께했던 메스키트의 기억은 내가 영원히 안고 갈게. 그러니 새로운 주인에겐 그 주인만의 메스키트가 되어 줘. 지고 피어난 꽃은 더 이상 예전과 같은 꽃이 아니야. 새롭게 피어난 꽃은 새로운 햇살을 받고 새로운 비를 맞은, 새로운 미래 속에서 태어난 꽃이야. 내가 만난 꽃은 이미 열매를 맺었으니 이젠 다음 주인을 위해 새로운 결실을 맺어 줘.”
뚜렷했던 그녀의 모습이 어느새 점차 투명해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품속에서 가죽 커버의 노트를 한 권 꺼냈다. 버클을 풀고 노트를 펼치자 그녀의 모습이 사라지는 속도도 박차를 가했다.
그녀가 노트의 한쪽을 힘 있게 잡고 페이지를 파르르 빠르게 넘겨 마지막 페이지에 도달했을 때, 그녀의 모습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허공에 떠 있던 노트가 떨어지던 것을 얼떨결에 잡아챘다. 노트의 마지막 페이지엔 그녀가 했던 말이 그대로 반듯한 글씨로 적혀 있었다.
앞장을 읽어 보려 했지만 전부 풀을 바른 듯 페이지를 넘길 수 없었다. 노트는 내 손을 떠나 이젠 불이 꺼지고 재만 남은 벽난로 위로 날아갔다.
오래전부터 거기 있었던 것처럼 어느새 먼지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마치 앞장을 읽고 싶으면 자신이 있는 곳에 찾아와 직접 읽으라는 것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오로지 그 노트만 눈에 들어왔다.
문득 어둠 속에서 환하게 빛을 발하는 것이 있었다. 내 주머니에 있는 핸드폰이었다. 내 왼팔의 문양이 갑자기 발현된 것처럼 폰에서도 문양이 빛을 내며 발현되었다.
이동하는 뿌리가 누군가의 과거에 닿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