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6화 (166/604)

고위층이 모이는 자리가 곧 마을의 위엄을 나타내는 법.

18번째 테라리움에선 보지 못했던 강연장도 으리으리하게 지어 놓더니, 테라리움의 간부급들이 사용하는 회의실도 내가 방문했던 16번째의 것보다 훨씬 넓고 좋아 보였다.

아마 여기서 인페르노 놈들이 세계수를 파괴하는 회의도 하고 그랬겠지. 무슨 사이비 종교 집단처럼 오컬트적인 요소라도 있으면 어쩌나 했는데 굉장히 환하고 깔끔한 느낌이었다.

파필리온의 우려대로 중앙 행정 관리부에서 파견된 사람들은 먼저 도착해 있던 터였다.

하얀 로브를 입고 후드를 쓴 다섯 명의 사람들이 손을 모은 채 앉아 있는 것이 유리창 너머로 보였다. 모르고 봤다면 어디 성당이라도 잘못 들어왔다 착각했을 정도로 꽤나 경건한 장면이었다.

우린 늦게 온 주제에 액션 영화 속 한 장면처럼 세련되게 정장을 빼입고 우르르 회의실 안으로 들어갔다.

도중에 파필리온이 제 전 집무실에서 주워 온 붉은 털에 검은 줄무늬가 있는 퍼 코트(fur coat)를 어깨에 걸치고 있으니, 내가 정말 위험한 거래 현장에 온 마피아 두목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얘 패션 취향 참 이상하네. 무슨 이런 옷을 가지고 있어? 혹시 옵션이 개쩌는 템인가?

파필리온은 마치 이런 일에 꽤 익숙하다는 듯 먼저 가서 가장 상석의 의자를 빼 내게 정중하게 손짓했다.

저기가 내 자리, 오케이. 퍼 코트가 워낙 털로 부피가 커서 내가 그곳으로 걷자 꼭 동면 준비 중인 거대한 짐승이 묵직하게 이동하는 느낌이었다.

지나는 족족 뭔가 경악이 담긴 눈길들이 와 닿는다. 혹시 술 냄새 많이 나나? 내게 풍기는 알코올 향도 장난 아니었지만 퍼 코트에 배어 있는 코가 매운 향수 냄새도 장난 아니었다. 맨정신이라면 감당 불가능한 화려한 코트에 짙은 향수 냄새라니. 진짜 언제 입는 옷이니, 이거?

자리에 앉자 코트에 푹 파묻혀 모피로 마감한 소파에 앉아 있는 느낌이었다. 깍지를 낀 손을 테이블 위에 올리고 다리를 꼬았다.

탁 트인 회의실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내 뒤를 따라 주르르 들어온 길드원들은 비어 있는 자리에 앉지 않고 약속이라도 한 듯 내 뒤에 일렬로 시립했다. 진짜 마피아 보스 같잖아. 이거 누구 생각이야? 무척 든든하다.

딱히 뭐라고 인사를 꺼내야 할지 몰라서 입을 다물고 있는데 한쪽 눈만 내놓은 결이 거친 나무 가면을 쓴 사람이 먼저 인사를 건넸다. 이제 보니 모두 모양은 조금씩 다를 뿐, 밀가루색의 나무 가면을 착용하고 있었다.

입만 가린 사람도, 반대로 입만 내놓고 눈까지 모두 가면으로 가린 사람도 있었다. 가면의 뻥 뚫린 구멍으로 응시하는 갈색의 눈이 예리하게 날 관찰하는 것이 느껴졌다.

“네, 안녕하세요. 이번에 16번째 테라리움을 접수한 제이라고 합니다.”

바로 곁에 선 이리스가 몸을 움찔 떠는 것이 느껴졌다. 내가 생각해도 말투가 나답지 않게 좀 건방지긴 했다.

솔직히 오는 길에 엘더의 영향으로 술이 전부 깰 줄 알았다. 내 안에서 샘솟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나를 지지하는 길드원들에게서 나오는 거라고 생각했다.

아니었다. 아무리 봐도 이건 내 주사의 도입부였다. 사람마다 자신에게 잘 맞는 술이 있다고 하던가.

소주만 마시면 두통을 호소하던 사람이 막걸리는 기깔 나게 사발로 들이켠다든지 맥주만 마시면 속이 더부룩하다던 사람이 양주를 마시면 밤을 찢는 것처럼.

아무래도 내가 여관에서 버프 약처럼 들이켰던 술이 내게 오죽 잘 맞았나 보다. 술발 한껏 세우니 이 자리의 나는 그 무엇도 두렵지 않은 느낌이었다. 살짝 흥분도 되었다.

“너무 이른 시간에 찾아온 것 같아 죄송한 마음이 드는군요.”

그리고 평소보다 남이 하는 말이 몇 배나 또렷하게 들려왔다. 머리도 기름칠한 톱니바퀴처럼 맹렬하게 잘 돌아간다.

솔직히 이른 시간은 아니었다. 내가 머리에 신경 쓰느라 시간을 좀 허비해서 그렇지 남들이라면 여유롭게 점심 식사를 끝냈을 시간이었다. 저 말은 즉… 술 냄새를 풀풀 풍기며 들어오는 나를 에둘러 비판하는 듯했다.

보통 사람이라면 해 떠 있을 때 이렇게 퍼마시지는 않았을 테니 전날 과음하고 채 냄새를 지우지도 못하고 나타난 내 이미지가 그려진 것으로 보였다. 첫인상부터 꽝인 것 같은데, 열심히 스케어크로우의 자신감 넘치는 표정을 연습한 보람도 없었다.

“좋은 날이라 그냥 넘길 수가 있어야죠. 무려 제가 두 개의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원이 되었는데.”

혹시라도 행정 관리원 자리를 박탈당할까 봐 덜덜 떨던 10여 분 전의 나는 없었다. 여유가 철철 넘쳐흐르는 목소리가 절로 튀어나온다. 마치 내가 이미 행정 관리원이 된 것이 기정사실이라는 듯.

이리스가 또다시 몸을 움찔 떨었다. 그녀의 반응에 왠지 더욱더 자신감이 샘솟았다.

그래, 차라리 이게 더 나았다. 어리숙한 나는 최대한 숨겨야 한다. 그녀가 충고했던 것처럼 뒷배가 있는 척, 아무것도 두려운 것이 없는 척. 실상 쪼렙 뉴비에 불과한 내가 이 세계의 상석을 꿰찬 사람들을 상대로 뻥카를 치고 있었다.

“정정해야겠군요. 아직 제이 님께선 임시일 뿐입니다. 안내 드린 대로 비정상적으로 직책이 위임된 것이 확인되었기에 그 일에 대한 확인이 필요합니다. 경우에 따라선 전 행정 관리원에게 재위임하는 것이 아닌 새로운 적격자를 찾을 때까지 중앙 행정 관리부가 16번째 테라리움을 임시로 관리할 수도 있습니다.”

날카롭다. 제대로 칼을 갈고 온 느낌이다. 등을 곧게 편 그들의 자세만 보더라도 그들이 이 세계의 법과 질서를 수호하는 사람들이라는 느낌이 확 들었다. 그런 그들에게 비정상적으로 자리를 차지한 난 결코 곱게 보이지 않을 터였다.

그렇다면 내가 아무리 예의 바르게 행동했어도 안 좋게 찍힐 확률이 높았던 거 아닐까?

“그럼 지금부터 드루이드 제이 님의 세계수의 16번째 테라리움에 대한 행정 관리원 직책 판결 절차를 진행하겠습니다.”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아주 강한 향기가 넓은 회의실을 가득 채웠다. 하얗고 작은 꽃잎이 팝콘처럼 펑 터져 나오며 그 중심에 자주색 열매가 가득 담긴 크고 넓은 나무 광주리를 품에 안은 드라이어드가 나타났다.

무수한 나뭇잎이 녹갈색 실로 수놓아진 새하얀 천이 싸개 담요처럼 광주리를 둘러싸고 바닥까지 늘어져 있었다.

여태 봤던 드라이어드 중 으뜸이라 할 만큼 숱이 엄청 풍성한, 윤기가 줄줄 흐르는 녹갈색 머리칼이 잘게 굽이치며 땅에 겨우 쓸리지 않을 정도로 늘어져 있었다. 관자놀이부터 뒤통수까지 달걀만 하게 머리를 땋아 마디마다 하얀 꽃을 엮어 둥글게 왕관처럼 장식하고 있었다.

치마 끝으로 갈수록 그러데이션으로 연한 연두색이 되는, 펑퍼짐한 수십 겹의 녹색 천이 감춰진 드레스까지.

그때 광주리에 담긴 열매가 파르르 떨리더니 중심이 무너져 내리고 그 안에서 살이 토실하게 오른 새하얀 비둘기가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한눈에 봐도 범상치 않은 드라이어드가 회의실에 나타났다.

“16번째 테라리움에 아주 좋지 못한 소문이 돌고 있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세계수의 가지가 위험에 처해 있다는 소문이었습니다. 또한 차마 입에 담기도 싫은 매우 불경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소문이었지요. 하지만 그것을 전부 제쳐 두고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은 세계수 가지의 안전입니다. 이 테라리움은 본래 매번 평가를 받을 때마다 세계수의 가지가 아주 좋은 상태를 유지하고 있던 곳입니다.”

그는 이젠 보좌관 행세를 하는 파필리온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를 대할 때보다 우호적이었다.

“공교롭게도 드루이드 제이 님께서 행정 관리원의 직책을 위임받은 시기와 위대한 세계수의 가지에 대한 불경한 소문이 도는 시기가 겹칩니다. 우리 중앙 행정 관리부는 드루이드 제이 님께서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세계수 가지에 대한 지분율을 가져간 것이 그 불경한 소문과 연관이 클 수도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소문은 물론 내가 연금탑에 콕 박혀 있을 때 터지긴 했지만 그 전부터 세계수 가지를 혹사시켜 오던 놈은 따로 있었다. 저 새끼란 말이다.

파필리온을 째려보았다. 그는 회의실에 들어온 순간부터 시선을 내리깔며 착실히 조용하고 충실한 보좌관 흉내를 내고 있었다. 저 사람들은 가면을 썼고 얜 아주 얼굴에 철면피를 깔았다.

“여기 이 올리브 나무는 세계수의 축복을 매우 민감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풍요와 번영을 상징하는 이 성스러운 나무는, 먼 옛날부터 세계수의 축복이 닿지 못한 불모지를 찾아내 제일 먼저 씨앗을 심고 세계수에 제 가지를 입에 물린 비둘기를 보내 그곳에 대해 알렸습니다. 연락을 받은 세계수가 그곳까지 축복을 보낼 동안, 올리브 나무는 불모지를 기름진 땅으로 일구며 생물이 살 수 있는 곳으로 만드는 일을 했습니다.”

저 비둘기 날 수 있어? 한국에서 봤던 애들보단 뽀얗고 예뻤지만 부리가 볼 깃에 파묻힐 정도로 살이 토실하게 오른 것은 닭둘기와 다름없어 보였다.

“만약 이곳의 세계수의 축복에 흐트러짐이 있다면 조금이라도 불모지가 될 가능성을 이 올리브 나무가 발견할 것입니다.”

늙은 호박 같은 달짝지근한 갈색의 눈엔 이상하리만치 호의가 가득했다. 올리브 나무라는 드라이어드는 이 자리에 나타난 순간부터 포만감이 가득 담긴 미소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여간 깐깐한 사람이 소환한 드라이어드다 보니 못해도 제퍼의 도깨비바늘만큼 괴이한 성격을 가지고 있을 줄 알았다.

그녀는 광주리를 두 팔 가득 껴안고 내 곁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풍성한 머리 탓에 작은 산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포슬포슬 흰 천과 드레스가 부드럽게 부딪히는 소리가 가까워졌다.

“피어나는 축복의 작은 세계수님을 뵙게 되어 영광이에요.”

발랄한 목소리가 톡 터져 나왔다.

“세계수 안에서 당신의 영혼을 느낀 그 순간부터 정말 만나고 싶었어요. 모든 것이 태어나고 모든 것이 시작하는 강렬한 생명의 태동을 느꼈어요. 세계수가 작은 세계수님을 신뢰하는 만큼 저도 당신을 신뢰해요. 이곳의 세계수 가지가 당신의 영혼에 묶였다는 것은, 이 테라리움은 앞으로 아주 번창하는 땅이 된다는 뜻이 분명해요.”

오늘 나와 처음 만난 올리브 나무 드라이어드의 무조건적인 신뢰에 모두가 놀랐다. 물론 나 역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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