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내가 따로 떨어져 있던 사이 알게 된 일들에 대해서도 털어놓았다. 그들은 내가 연금탑으로 향한 지 일주일 정도 된 것 같은데 벌써 비밀스러운 정보들의 최중심까지 도달한 것에 놀라워했다.
그 정도면 몇 개월은 연금탑에 잠입해서 오래도록 수사해야 얻을 수 있는 정도가 아니냐며.
그들의 말을 들으니 그런 것 같기도 하네. 마치 주어진 퀘스트에 이끌리듯 순차적으로 내가 알아야 하는 정보들이 오픈됐으니까.
여태 얻은 정보들과 앞날을 점치며 중앙 행정 관리부가 16번째 테라리움에 도착하면 어떻게 할지 고민했다.
벌어진 일들이 커서 숨기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다고 의견이 모였다. 16번째 테라리움에서 벌어진 일 중 어느 하나라도 덮고 묻을 수 있는 것들이 없었다. 오히려 숨기려 할수록 더욱 수상하니 차라리 대놓고 드러내는 것이 어떠냐고 할 정도로. 어차피 내가 저지른 일이 아니니까.
“그럼 결국 인페르노에 대해서도 알려야 한다는 거겠네? 이걸 믿어 줄까?”
“전 반대예요.”
차라리 파필리온을 고발하고 악을 처단한 상이라도 받자고 말하던 제퍼는 이리스가 반대 입장을 들고 나오자 입을 꾹 다물었다.
“아이언비스트가 수배당한 이야기는 유명해요. 뒤쪽 테라리움까지 수배서가 쫙 깔릴 정도죠. 하지만 전에 이야기했던 것처럼 불을 숭배하는 집단이 있다는 소문은 무성할 뿐 수배됐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 없어요. 조직의 이름이 인페르노인 것도 이번에 알게 되었고요. 화재와 관련된 사건에 괴담처럼 그 조직이 저질렀다는 소문이 따라붙는 편이지만 여태 그 집단이 특정된 적은 없었어요. 죄질로 따지자면 아이언비스트보다 훨씬 위험한 정도인데 저희처럼 여행을 오래 다닌 드루이드가 아닌 이상 잘 알지도 못할 거예요.”
이리스가 동의를 구하듯 시들링을 바라보자 그가 입을 열었다.
“서로를 흉터로 알아보는 불을 숭배하는 집단에 대한 소문은 나도 들은 적 있다. 나 역시도 화상 흉터 때문에 오해를 샀던 적이 있으니까. 어딘가의 테라리움을 통째로 불에 태워 버렸다는 소문도 있었지.”
“그 소문은 우리도 알지요. 그래도 항상 뒷말이 더 붙어요. ‘사실인진 모르겠지만.’”
직접 그 조직의 수장까지 만나고 그들의 아지트나 다름없는 16번째 테라리움에서 보고 겪은 일들로 보면, 세계수에 해를 끼치는 인페르노는 확실히 수배를 당해야 했다. 테러리스트나 다름없는데 사람들이 자주 보는 위치에 위험도를 알리는 수배서를 붙여야 하는 거 아닐까?
문득 카나비스를 구출해 데려갔을 때, 18번째 테라리움의 과수원에서 겪었던 일이 떠올랐다.
내 손목을 살폈었지. 그 뒤에 그가 했던 말과 카나비스를 구하며 맞닥뜨렸던 사람들에게 화상 흉터가 있던 걸 보면, 분명 18번째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원은 내게서도 화상 흉터가 있나 확인하려 했던 거겠지. 교습소를 습격했던 것이 인페르노였단 걸 알고 있었던 게 아닐까?
“인페르노가 공식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건 그들이 정말 비밀스럽게 행동하는 것도 있지만 어쩌면 앞 번대 테라리움에 그들의 첩자가 있어서 정보를 가리는 걸 수도 있어요. 그래서 제이 님이 나서서 인페르노에 대한 정보를 수면 위로 올리려고 하면 정말 위험해질 거예요. 수면 아래서 비밀스럽게 움직이는 인페르노를 감당하는 것도 큰일인데 수면 위에서 대놓고 행동하는 자들의 견제까지 받게 되면 정말 위험해질 거예요.”
“위험해지면 내가 지킨다.”
시들링의 말에 이리스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게 당신이 아무리 강하다 하더라도 개인이 감당할 일이라고 생각해? 이미 테라리움 하나를 자신들의 입맛에 맞춰 바꿔 놓을 정도로 엄청난 조직이야. 세상엔 무식하게 힘만 세다고 전부 해결되는 일만 있는 건 아냐.”
이리스는 ‘무식하게’라는 말을 유독 강조했다.
“말과 머리와 정보로 하는 싸움들이 얼마나 무서운데. 세 사람만 있으면 없던 불로초(不老草)도 만들어 낸다고 했어. 돈에 눈이 먼 하인 셋이 주인에게 먹으면 영원히 늙지 않는 약초가 있다고 속여 기약 없는 여행을 보내 내쫓고 집을 차지한 옛날이야기도 안 들어 봤니? 세 명만 작정하고 제이 님을 매도해도 아이언비스트 수배서 옆에 제이 님 수배서까지 나란히 걸릴 수도 있어.”
“그… 그 정도예요?”
이리스의 말을 들으니 간담이 서늘해졌다. 정말 그 정도라고?
“제이 님께 그에 준하는 뒷배가 없는 이상 인페르노를 공식적으로 끌어 올리는 건 위험할 거예요. 만약 가이아 길드가 앞 번대 테라리움에 스톤헨지를 둔 대형 길드였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을 텐데. 오히려 악을 처단하는 길드로 유명세를 떨쳤을 거예요. 도움이 못 돼서 죄송해요. 이럴 줄 알았다면 부지런히 유명세 좀 올릴걸….”
“아니 이리스가 죄송할 일이 뭐가 있어요! 그런데 시들링도 유명하긴 하잖아요?”
“저 사람은 악명이 높잖아요. 뭘 하든 악영향만 끼칠 거예요.”
너란 사람 참…. 시들링을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쟤가 속이 나쁜 애는 아닌데.
이리스의 파티는 내가 솔플 유저라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있었다. 그들에게 보호받기 위해서 솔직하게 털어놓았으니까.
“내가 28번째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원인 걸로 날 지킬 수 없을까요? 내 뒤에 날 받쳐 주는 엄청난 조직이 있다고 이야기해 왔는데.”
“그러고 보니 28번째 테라리움을 얻으신 과정에도 인페르노가 개입되어 있죠.”
이리스 파티에게 28번째 테라리움에 일어난 비극에 대해 이야기했었지.
“28번째 테라리움까지 악영향을 끼치면 어떡하죠? 제이 님이 28번째의 세계수 가지를 구해 내는데 사용한 엄청난 양의 다이아…. 그 다이아의 출처를 납득시킬 수 있는 조직을… 중앙 행정 관리부에 댈 수 있나요?”
“어….”
온전히 내 편인 자들조차 모르는 정말 큰일. 전 행정 관리원인 파필리온을 꺾어 버릴 정도로 수많은 다이아의 출처. 이게 정말 큰일이었다.
개인이 부리기엔 너무나 큰 수량. 이리스의 질문이 어떻게 그렇게 많은 다이아를 가지고 있냐는 것이 아니라서 다행이었다.
다른 이들을 속여 왔던 것처럼 내 뒤엔 거대한 조직이 있다는 거짓말이, 어쩐지 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있는 1번째 테라리움 사람들에게 순순히 먹힐 수 있을까?
만약 통하지 않는다면 난 어떻게 되는 거지? 무한의 다이아를 소유한 이질적인 내 존재는 어떻게 되는 거지?
신뢰할 수 있는 자들에게도 내 무한 다이아의 비밀을 털어놓을 수 없다. 설령 그것이 내 드라이어드들이 될지라도.
지쳐 있을 모두를 위해 홀로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핑계로 각자의 방으로 돌아가 휴식을 권했다. 묵혔던 샤워도 하고 그럴싸한 식사도 하고 모처럼 푹신한 곳에 누워 잠도 잤는데 닥쳐올 앞날이 두려워 불안에 떨어야만 했다.
항상 앞날의 모험이 기대되기만 했는데 너무 단시간에 과분한 것들을 손에 넣었기 때문일까? 내가 아직 그 정도 그릇도 안 되는 걸까?
***
겨우 이틀이 지났을 뿐인데 중앙 행정 관리부의 사람들이 도착했다는 소식을 받았다.
만전을 기하기 위해 정장을 샀다. 아무리 맞춤 장비를 착용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내 모습은 잘 쳐줘 봐야 갓 초보 딱지를 뗀 모험가였다.
파필리온이 입는 것처럼 남색의 고급스러운 걸로 맞췄다. 방어력에 하등 도움 안 되고 움직이기에 불편할 뿐인 옷이었지만 거울로 본 내 모습엔 부티와 여유가 줄줄 흘러나왔다.
면접 보러 가는 취준생 느낌이 나면 어쩌나 했는데 역시 옷이 사람을 만든다. 아무렇게나 묶고 다니던 머리도 풀어 제대로 손질을 받으니 높은 자리 꿰찬 사람이 된 느낌이었다.
스케어크로우의 집무실에서 봤던 액자 속 그녀의 당차고 올곧은 표정을 떠올리며 열심히 연습했다. 홀로 28번째 테라리움을 이끌었고 말하는 이마다 좋은 평을 받는 그녀였으니 비슷한 모습을 보이면 도움이 될지도 몰랐다.
룸 밖엔 파필리온이 마중 나와 있었다. 중앙 행정 관리부가 도착한 직후부터 보좌관 흉내를 내려는 것이었다. 문을 열고 나가려다 갑자기 덜컥 긴장되어 멈췄다.
“와… 잠깐…. 이 세계에는 청심환 없겠지?”
아직 어떻게 대처할지 완벽하게 구상한 것이 아니었다. 옷을 갈아입을 때만 해도 작게 파문이 일던 긴장이 지금은 해일처럼 파도치고 있었다. 내가 말을 잘해야 16번째 테라리움을 온전하게 손에 넣을 수 있다.
줄담배라도 피워 대면 좀 나았을까? 어쩐지 이 세계에 오래 머무를수록 담배 생각이 차차 사라졌다. 꼭 온몸은 물론 머리까지 정화되어 가는 중인 느낌이었다. 그렇다면 힘을 좀 빌릴 만한 게….
문득 다이닝 룸 진열장에 있던 고급스러운 병에 담긴 호박색 액체에 눈이 갔다. 한눈에 봐도 도수가 꽤 높아 보이는 술.
내 주사는 겁대가리가 없어지는 거였다. 카나비스의 힘에 취해 되는 대로 지껄였던 과거가 떠올랐다.
“슬슬 나와야 할 텐데.”
밖의 파필리온이 재촉하기 시작했다. 다 차려입고도 표정 연습하느라 꽤 시간을 잡아먹은 터였다. 더 이상 고민하지 않고 진열장의 유리문을 열어 술병을 꺼냈다. 찻잔을 꺼내 가득 따라서 원샷 했다.
“어우 씨.”
식도가 타들어 가는 줄 알았다. 코에 지독한 알코올 향이 훅 올라오며 뇌가 날아가는 줄 알았다.
내가 하는 양을 엘더가 미쳤냐는 얼굴로 바라보았다. 술에 그렇게 강한 편이 아니니 한 잔이면 되겠지. 좀 알딸딸해지고 근거 없는 자신감이 수맥 터진 샘처럼 퐁퐁 솟아오르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초 단위로 술이 깨어 가는 느낌이었다.
“술은 대체 왜?”
내가 하는 걸 잠자코 지켜만 보고 있던 엘더가 드디어 어이없다는 목소리로 물었다.
“좀 취하면 내가 입을 잘 열어.”
“네가 취할 수 있는 몸이라 생각해?”
“응? 그건 무슨 말이야?”
“최고의 회복형 드라이어드인 나와 영혼의 연결을 맺은 너야. 내 영혼의 힘이 너의 정신을 해롭게 하는 기운들이 널 갉아먹게 놔둘 것 같아?”
설마 요즘 들어 담배 생각도 안 나고 이렇게 술이 지독한 알코올 향만 남기고 취기는 초 단위로 증발되는 게 드라이어드와 영혼의 연결을 유지 중이었기 때문이다고?
“한 잔 가지고 안 되겠네.”
연거푸 두 잔을 더 들이켜고 생수를 병째 들이마셨다. 어찌나 코가 찡한지 눈물이 앞을 가릴 정도였다. 메스키트가 어쩐지 심란하다는 얼굴로 아무 말 없이 날 바라보고 있었다. 그 상태로 급하게 문을 열고 나갔다.
“오… 이게 대체 무슨 술 냄새야?”
파필리온이 재밌다는 투로 물었다.
“약발 떨어지기 전에 빨리 가자.”
고작 십여 분짜리의 유지 시간 짧은 정신력 강화 물약을 들이켠 기분이었다. 과수원에 도착하기도 전에 취기 다 떨어질 걸 고려해 걸음을 빨리했다. 여관을 막 나서는 도중 낯선 차림의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하나 같이 나와 맞춘 듯한 정장을 차려입고 양옆에 시립한 길드원들이었다. 심지어 시들링마저도 갑옷을 벗어 던지고 정장을 입고 있었다. 저 떡 벌어진 어깨에 맞는 정장이 있을 줄은 몰랐네.
“가시죠. 모시겠습니다.”
솜사탕 같은 하늘색 머리칼을 단정하게 올려 묶은 이리스는 평소의 활발한 모습은 완전히 사라지고 차가운 이미지가 되어 있었다.
작정해서 차려입고 각 잡힌 행동을 하는 길드원들을 보니 꼭 내가 조직의 보스가 된 느낌이었다. 그리고 내가 술에 의지해 상승시켰던 자신감보다 몇 배는 더 큰 자신감이 샘솟는 것이 느껴졌다.
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길드원들이 함께해 준다면 어려운 일도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좋아, 가자. 16번째 테라리움을 완전히 차지하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