곳곳에서 푸른빛의 분수가 터져 나오고 예쁜 꽃들이 소복하게 담긴 투명한 공들이 둥실 떠다니는 모습은 꼭 놀이공원 퍼레이드를 보는 기분이었다.
몽환적인 풍경이 가슴을 뭉클하게 만들었다. 쪼렙에 불과했던 내가 어느새 이렇게 아름다운 광경을 만들어 낼 수 있다니.
오래도록 눈에 담고 싶었지만 언제까지 동산에 있을 순 없었다. 1번째 테라리움의 중앙 행정 관리부가 곧 이곳을 방문할 것이라 했다. 내가 완전히 이 행정 관리원 자리를 먹기 위해선 책잡힐 구석들을 모두 정리해야만 했다.
파필리온에게 가드닝 스킬을 전수받음으로써 선금을 치르게 했지만 손바닥 뒤집듯 곧바로 자리를 갈아타는 그를 신뢰하긴 탐탁지 않았다. 이놈이 날 워낙 괴롭혔어야지.
조직을 배신한 칼롱 역시 파필리온과 같은 케이스였으나 많은 다이아라는 목줄이 존재했다. 그는 자신의 목숨이 위태하여 내 편에 붙었다곤 하지만 좀 더 확실한 목줄이 필요했다. 말만 내 편이지, 언젠가 내 뒤통수를 칠지도 모를 일이고.
“월렛 내놔.”
아직까지 이 세계에서 월렛이 가지는 정확한 가치에 대해선 잘 모른다.
처음엔 사람들이 하나씩 가지고 다니는 폰뱅킹 어플 깔린 스마트폰과 같은 개념으로 여겼고, 월렛으로 확인할 수 있는 자잘한 일들이 많아서 없으면 생활이 많이 불편한 정도로 생각했다.
내 세계의 것처럼 고장이 나거나 잃어버리면 언제든지 새 스마트폰으로 갈아탈 수 있는 반소모품 정도로 생각했다.
하지만 추적을 막기 위해 월렛을 포기한 어닝과 추적이 붙음에도 불구하고 월렛을 포기하지 못해 16번째 테라리움 밖으로 나가길 겁내는 파필리온을 보면 월렛이 가지는 의미는 기본 스마트폰의 개념보단 좀 더 중요도가 높은 것 같았다.
그래서 도박을 걸어 보았다. 당장 그에게 무엇을 빌미로 목줄을 걸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어쩐지 계약서를 쓰자고 해도 배신할 것 같았다.
다행히 도박은 성공한 것 같았다. 파필리온은 내 말에 크게 망설였다.
“좋은 판단이라고 생각해요. 목숨과 월렛, 둘 중 하나만 선택해야 한다면 답은 알겠지?”
“월렛을 빼앗아 버리신다니. 역시 마스터님은 화끈하시네요. 가족끼리도 공유하지 않는 것이 월렛인데.”
이리스와 제퍼가 내 선택을 옹호했다. 이제 와서 월렛의 특별함에 대해서 은근슬쩍 물어보기도 늦었다. 나는 이 세계에 대한 상식이 아직 매우 부족했다.
“월렛을 압수하는 건… 내 눈을 빼앗아 버리는 것과 다름없는데. 행정 관리 일은 월렛 없이 불가한걸.”
“그건 네 사정이고. 지금은 내게 너의 쓸모를 증명해야 하지 않아? 지금 행정 관리원은 나니까 네가 굳이 월렛을 이용할 필요는 없지. 월렛 없이 얼마나 유능하게 일을 처리하는지 보여 줘 봐.”
파필리온은 제 손에 쥔 월렛을 말없이 바라보다 결국 내 손에 넘겼다.
“그대, 그거 알아? 일생에 단 한 번 만들 수 있고 영혼의 신분증이나 다름없는 자신의 월렛을 넘기는 건 청혼의 의미가 있다는 걸.”
“개소리에요, 제이 님.”
이리스가 질겁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술자리에서 지갑이나 시계를 맡기는 개수작은 겪어 봤는데 같은 선상이니?
그나저나 월렛을 일생에 단 한 번만 만들 수 있다니. 그 정도라면 정말 중요하지. 영혼의 신분증이라는 표현에 많은 생각이 들었다.
드루이드의 영혼에 맺히는 다이아가 쌓이는 월렛. 사람끼리 소식을 주고받을 수 있는 메신저 시스템을 대체하는 벌이 정확하게 먼 거리를 찾아가는 것도, 알람 팝업이 귀신같은 타이밍에 뜨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영혼의 신분증이라는 표현이 정말 잘 어울리는 것 같았다.
“인간 사회에선 그런 관습이 있군요.”
칼미아 드라이어드가 수업을 열심히 듣는 모범생처럼 무척이나 흥미로워했다. 이리스가 태클 걸었던 건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한 투였다.
남의 월렛을 만지는 것은 처음이었다. 가까이서 직접 만지고 보니 생김새는 스마트폰과 비슷하긴 해도 좀 더 묵직하고 투박해 보였다. 내 사과 폰과 비교하면 철판때기에 유리판만 붙여 놓은 수준이었다. 전원이나 볼륨 버튼도 없었다.
막 발명된 초기 스마트폰 모델을 본다면 이런 느낌일까? 마치 스마트폰에 대한 생김새를 대강 들은 누군가가 흉내 내어 만들 물품 같았다.
월렛으로 파필리온의 목줄을 잡고 난 후, 길드원들과 여관으로 자리를 옮겨 앞으로의 일에 대해 상담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파필리온이 있는 자리에서 중대사에 대해 논의하고 싶지 않았다. 파필리온에게 당장 처리할 문제 해결을 명령했다.
“어닝의 시체를 수습해 줘. 비록 그녀와 사이가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원수지간도 아니니 아무렇게나 버려둘 생각은 추호도 하지 마. 그리고 연금탑 앞에 개미 떼처럼 모여 있는 군중들도 해산시켜 줘. 저대로 내버려 두기만 하면 정말 큰일이 일어나겠어.”
행정 관리원 안내 창에 따르면 난 아직 사람들에게도 정식으로 인정받지 못한 상태였다. 꾸준히 행정 관리원으로 얼굴을 비춰 온 그가 나서는 것이 초면인 내가 나서는 것보다 효과적일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인공 개량으로 여론이 좋지 않은 상황, 그가 과연 성난 군중을 해산시킬 수 있을까? 현재의 좋지 못한 여론은 곧 내 것이 될 16번째 테라리움의 미래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기에 걱정이 되기도 했다.
아무리 앞 번호의 테라리움을 손에 넣었다고 하더라도 외부 인식이 나빠져 사람들이 계속 빠져나간다면 결국 내 손해잖아.
여관으로 돌아가기 전 파필리온에게 내 핸드폰을 들어 보여 주었다. 네가 나를 감시했던 것처럼 허튼짓하면 이제 내가 폰으로 너의 위치를 다 볼 수 있다고 알려 주기 위해서였다. 그는 씁쓸한 웃음만 지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여관에 오는 길에 잠시 과수원을 방문했다. 처음엔 파필리온의 지시로 내 출입을 금지하던 과수원 직원들이었다.
하지만 지금 행정 관리원은 그가 아닌 나. 행정 관리원이 테라리움의 심장부나 다름없는 과수원을 마음대로 출입하지 못하는 건 말이 안 되지.
갑자기 바뀐 직권에 그들은 머릿속에 물음표를 수백 개는 띄우고 있을 것 같은 표정으로 날 세계수의 가지로 안내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세계수 가지의 아주 처참한 모습을 확인했다. 28번째 테라리움에 비하면 어찌 그리 단시간에 바짝 말라 병들어 죽을 수 있을지 놀라울 따름이었다.
새하얀 것은 매한가지이나 백옥 같은 매끄러움과 아름다움은 어디 가고, 버짐이 핀 것처럼 하얗게 뜨고 칼로 난도질당한 것처럼 갈라진 나무껍질의 상태가 차마 말이 나오지 않을 정도였다.
하얀 기름이 둥둥 떠다니는 검은 진물이 껍질 틈새로 뚝뚝 흘러내렸으며 석조 기둥처럼 우람했던 가지가 건조기에 돌린 것처럼 바짝 쪼그라들어 있었다.
정말 검은 나뭇가지에게 힘을 양보하기 위해 생명을 털어 버린 모습이잖아?
몇 시간 전만 해도 외부인이었던 내가 테라리움의 치부나 다름없는 병들어 죽은 세계수 가지를 낱낱이 살피고 있으니 과수원 직원들은 어두운 얼굴로 차마 고개를 못 들었다.
하지만 땅만 보고 싶은 것은 나였다.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곧 중앙 행정 관리부가 내려와 이 모습을 확인할 것이었다.
이 세계에서 신성시되는 세계수의 가지였다. 가지를 해하면 수배가 내려지고 매번 앞 번호의 테라리움에서 품질 체크를 위해 파견까지 오는 듯했다.
그런 그들에게 위대한 세계수의 가지가 병충해로 죽은 모습을 보여 준다? 내 임시 딱지를 떼기는커녕 행정 관리직도 먼지처럼 사라질 터였다.
아놔, 이걸 어떻게 변명해야 하지?
***
16번째 테라리움에 와서 처음 내가 묵었던 여관의 방에 길드원 모두를 초대했다.
우리가 검은 나뭇가지에 대해 논의했던 자리가 이젠 모든 걸 수습하기 위한 자리가 되었다. 연금탑에 갇혀서 모두의 생사도 모른 채로 바쁘고 힘든 시간을 보냈던 기억이 짧게 스쳐 갔다.
중간에 잠깐 헤어졌던 제퍼와 헤르마는 며칠 사이 핼쑥해진 루프를 데려왔다. 일반인이나 다름없는 그녀는 적의 추적을 피해 이리스 파티와 미리 점찍어 둔 장소를 이리저리 오가며 몸을 숨기고 있었다고 했다.
모두가 무사한 모습을 보자 그녀는 울 것 같은 얼굴로 다행이라고 중얼거리더니 긴장이 탁 풀렸는지 침대 한쪽에 스르르 쓰러졌다.
그녀는 외투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검고 거친 천을 잎사귀를 싸맨 애벌레처럼 붙들고 코까지 도롱도롱 골며 깊은 잠에 빠졌다.
한시도 긴장을 늦추지 못하고 편히 쉬지 못했을 그녀의 고생이 상상되어 미안했다. 괜히 내 부름에 여기까지 와서 온갖 고생은 다 하고.
우리가 논의할 거리는 많았다. 또한 당장 이리스 파티는 내가 맡겨 둔 길드 의뢰 때문이라도 더 이상 16번째 테라리움에서 시간을 허비해선 안 됐다. 루프와 필라의 가족들이 28번째 테라리움으로 안전히 이주하기 위해선 그들의 도움이 절실했다.
“제이 님의 가드닝 스킬로 죽은 가지를 어떻게 할 순 없나요?”
“그렇지 않아도 시도해 보았는데… 제가 조종할 수 없었어요.”
28번째 테라리움에서 어떻게든 겨우 숨만 붙어 있던 세계수 가지와 다르게 과수원의 가지는 생명이 다한 건지 아니면 응답할 기력도 없는 것인지 움직이지 않았다.
꿈에선 분명 과수원의 가지가 포기한다고 하긴 했어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기회를 달란 식으로 이야기했었다. 그 말은 즉 둘 다 살 수 있는 방안이 아니었을까?
기계를 껐다 재부팅하는 것처럼 죽고 나서 다시 부활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정말로 죽어 버린 것이 아닌, 조금도 움직일 기력이 남아 있지 않은 것이라 믿고 싶었다.
동산의 세계수 가지는 지금도 28번째 테라리움의 가지와 경쟁하듯 다이아를 빨아먹고 있었다. 분명 부위는 잔가지나 다름없으나 동산을 만들 정도로 힘이 있고 과수원의 가지보다 크기가 거대한 가지이므로 완전히 회복하는 데 시간이 걸린다고 믿어 본다.
자신을 회복하는 것에 모든 힘을 쏟으면 28번째 테라리움의 가지를 살려 낸 것처럼 다이아를 과수원의 가지로 순환시켜 병을 치유할 수 있을 거야.
다만 그것이 중앙 행정 관리부가 도착하기 전에 완벽히 이루어져야만 한다. 그들이 세계수 가지를 보고자 하면 과수원의 문을 열어 줄 수밖에 없으니 숨길 수도 없을 터. 이건 정말로 시간이 최선의 답인 문제이므로 일단 제쳐 두었다.
“만약 그가 정말 자신의 목숨을 위해서 16번째 테라리움에서 보호받기를 원한 거라면… 그 자신을 위해서라도 테라리움 내의 조직 잔당들을 다 쫓아내야만 할 거예요. 그는 현재 조직의 배신자나 다름없으니 제이 님을 위해서라기보단 자신을 위해서 하루빨리 처리해야겠죠.”
파필리온이 제시했던 또 다른 도움. 인페르노 조직의 아지트나 다름없었던 16번째 테라리움 내를 정리하는 것을 돕겠다는 것. 이리스의 주장대로라면 이건 쉬운 일이겠지.
그런데 잔류한 조직의 간부인 연급탑의 최고 학장 크레아시온 영감은 어떻게 처리한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