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3화 (163/604)

“인페르노 수장이랑 형제라니. 더욱 저 사람을 믿을 수 없는데요?”

“말했듯이 그는 날 형제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러니 날 발견하면 주저 없이 죽일 거야. 더구나 난 그에게 일말의 동정이라도 유발할 수 있는 베스탈리스가 아니니까. 그가 혐오하는 드루이드지. 그러니 살려 줘.”

길드원들은 한사코 그를 믿어선 안 된다고 했다. 하지만 난 그가 필요했다.

“아직 테라리움 밖에 인페르노 수장이 있는 건가?”

“1번째 테라리움이 움직인다는 소식이 그에게 들어갔으니 그도 자리를 떠났을 확률이 커. 아무리 통제 불가능한 그라고 해도 인페르노가 아직 수면 위로 떠오를 시기가 아니라고 생각할 테니 이목을 끌기 전에 자리를 피할 거야. 은밀하게 움직이기 위해선 조직이 베일에 가려져 있을 때가 제일이지. 섣불리 눈에 띄어 대형 테라리움들을 상대로 전면전을 벌였다간 조직이 괴멸할 수도 있고. 불을 숭배하는 조직이라니, 누가 봐도 수상하고 좋은 인식을 받기 힘들잖아?”

“그럼 널 추방한다고 당장 죽는 건 아니잖아?”

파필리온은 자신의 월렛을 흔들었다.

“조직에 깊이 관여되어 있던 자들은 모두 월렛에 추적기가 심어져 있어. 이걸 들고 나가면 바로 그에게 발각될 거야.”

어닝은 자신의 월렛을 없앴다고 했다. 그게 추적을 피하기 위해서였다니. 이곳에서 월렛이 얼마나 삶에 깊게 관여하는지는 잘 알고 있다. 당장 다이아가 맺히는 곳이고 할 수 있는 일들이 굉장히 많으니까. 그럼 새 핸드폰을 마련하듯 추적기가 심어져 있는 월렛을 버리고 새 월렛을 마련하면 되는 거 아냐?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닌가…?

“좋아. 당장 16번째 테라리움의 정식 행정 관리원이 되기 위해선 네 도움이 필요하단 건 알겠어.”

“제이 님, 정말 저 사람을 믿을 생각이세요?”

“마스터, 얼굴에 홀리신 건 아니십니까?”

“아무리 제이 님이 잘생긴 얼굴을 좋아한다고 해도 공과 사는 구별하시겠지!”

제퍼의 장난스러운 말에 살짝 양심이 찔렸지만 나 또한 충분히 심사숙고했다. 그를 이용해 먹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그렇다면 그가 허튼짓을 할 수 없도록 내가 감시하겠다.”

여차하면 시들링도 있고. 내 아티팩트 안이나 다름없는 16번째 테라리움 내에서 간 크게 드라이어드로 공격하는 짓은 못하겠지.

“그럼 선수금부터 내놔. 가드닝 스킬부터 전승시켜 줘.”

“블랙 릴리의 그대, 이 가지를 치워 줘야 그대에게 다가가지 않겠어?”

“블랙 릴리라고 부르지도 마.”

왼팔을 들자 문신처럼 박혀 있던 문양이 둥 떠올랐다. 그러곤 새장처럼 파필리온을 가두고 있던 가지들이 스르르 내려앉았다.

그가 걸어 나오자 멍하니 있던 검은 드라이어들이 움찔 반응하는 것이 보였다. 언제 돌발 행동을 할지 모른다면 지금 당장 할 가능성도 있다는 말이었다.

저 살아 움직이는 검은 드라이어드들이 한 때는 적이었다고 해도 모두 죽여 버리기엔 내키지 않았다. 내가 하려는 일을 깨달은 헤르마와 노토스는 조용히 자신들의 드라이어드들을 아티팩트로 돌려보냈다.

성큼 내게 다가온 파필리온은 내게로 손을 뻗었다. 동시에 시들링이 턱 소리가 나게 그의 손을 쳐 냈다.

“그렇게 경계할 거 없어. 전승을 위해선 가깝게 맞닿아야 하니까.”

이번에 그는 반대로 손을 내밀어 내가 잡기를 기다렸다. 내키진 않지만 손을 내밀려 하니 장갑은 벗으라고 말한다. 찝찝. 그의 손은 나보다 훨씬 크고 손가락이 길쭉했다.

손을 얹자 별안간 파필리온의 턱 아래로 기다란 검날이 들어왔다. 시들링의 검이었다. 이빨을 세운 사냥개처럼 허튼짓하면 곧바로 그어 버리겠다고 협박하는 것 같았다.

“난 이제 이 가드닝 스킬을 쓸 수 없어. 느낌만 알아차리면 바로 그대가 사용할 수 있을 거야. 세계수의 축복을 응집시킬 수 있는 건 드루이드의 영혼이야. 영혼을 조각낼 수 없으니 영혼이 담고 있던 생명력을 조각내어 축복을 담을 매개로 써야 하지.”

“잠깐만. 그럼 내가 저 많은 드라이어드들을 위한 아티팩트를 만들어 내려면 그만큼 내 생명력을 엄청 소모해야 된다는 거잖아?”

뒈지라는 거 아냐? 생명력을 소모한다는 점에선 드라이어드와의 그래프트와 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하지만 내가 세계수의 가지를 의지대로 조종할 때 내 생명력이 소모된다거나 피곤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한 번에 모두를 담을 욕심을 내지 말고 차근차근 해야지. 다만 중앙 행정 관리부가 언제 도착할지 모르니 제한 시간은 있는 편이야.”

그와 닿은 손에서 정전기라도 일어난 것처럼 따끔거리는 느낌이 났다. 그 후 마치 그의 기억이 고스란히 전달되는 것처럼 어떻게 하면 세계수의 축복을 조금씩 응집시킬 수 있는지 알게 되었다. 테라리움에 충만한 세계수의 축복을 공기 중에 떠다니다 풀잎에 맺히는 이슬처럼.

그런데 내가 엘더와 사용했던 그래프트는 내 생명력이 아닌 다이아를 사용했었다. 단델리온이 파나케이아의 힘을 응집시킬 때도, 그 힘이 흩어지지 않도록 연금술사가 다이아를 가공한 병을 사용했었다.

생명력 대신 다이아를 소모할 수 있다면…. 축복의 힘이 흩어지지 않도록 다이아에 담을 수 있다면.

하지만 엘더와 그래프트를 사용했을 땐 알아서 다이아가 소모되는 형식이었다. 내가 직접 하려니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테라리움에 가득한 축복을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내 몸에 갇힌 축복이 생명력에 감싸여 밖으로 빠져나간다면…. 그런데 무언가 달랐다. 축복을 받아들이고자 마음먹었는데 그 축복이 내 몸이 아닌 내 핸드폰에 몰리는 느낌이었다.

아니, 착각이 아니었다. 정말로 핸드폰이 금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내가 가드닝 스킬을 깨닫고 팔에 이상한 문양이 생겼던 것처럼, 핸드폰이 케이스를 씌운 듯 황금빛 문양에 감싸이기 시작했다.

오, 스페셜 에디션. 그런데 문양이 처음과 조금 달랐다. 웅장하게 뻗은 나뭇가지 모양의 문신에 조금이지만 잎사귀가 자리한 문양이었다. 내 팔에 있는 문양도 핸드폰의 문양과 같이 늦가을의 낙엽을 대부분 털어 낸 나뭇가지처럼 잎을 조금 쥐고 있는 나뭇가지 문양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황금빛 문양에 감싸여 세계수의 축복을 흡수하던 핸드폰은 곧 변화를 만들어 냈다.

푸른빛이 감도는 비눗방울 같은 투명한 공들이 핸드폰에서 터져 나왔다. 그것들은 필드에 즐비한 검은 드라이어드를 향해 느리게 날아갔다. 투명한 공들이 드라이어드에 닿자 순식간에 몸집을 불렸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자리에서 온천수가 터져 나오듯 푸른빛을 띠는 분수가 터져 나왔다. 28번째 테라리움에서 봤던 것들에 비해서는 물줄기가 비교적 가늘었다. 물줄기는 마치 아티팩트에 수분을 공급하듯 촉촉하게 투명한 반구를 적셨다.

“분수가 터져 나왔다고…? 설마 한 자릿수 테라리움에나 존재하는 다이아 분수…?”

누군가 놀라움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감탄했다.

푸른빛을 띠는 투명한 반구는 마치 뒤집힌 어항처럼 그들을 감쌌다. 파필리온이 만들어 냈던 것들과는 빛깔이 달랐다. 세계수의 축복을 응집시킨 그릇이 내가 의도한 대로 다이아가 분명했다.

검은 드라이어드들의 멍한 눈에 순식간에 생기가 실렸다.

그리고 가상 아티팩트에 감싸인 드라이어드들에게서 투둑, 하고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그들의 검은 머리며 장비며 날개며 장식된 꽃에서 까만 가루들이 떨어져 내렸다.

가루가 떨어지던 것이 점점 면적이 넓은 검은 껍질이 되어 떨어졌다. 그들이 검은 드라이어드가 된 것은 세계수의 축복이 닿기 위해 모체에 벼락을 맞았기 때문이다. 벼락은 모체를 까맣게 태우고 그 벼락에 맞아 타 죽지 않고 살아남은 것들이 드라이어드가 될 수 있었다.

다이아로 응집된 세계수의 축복의 힘이 그들의 검게 탄 부위를 정화하고 치유하고 있었다. 검게 탄 부위를 털어 내자 마치 새롭게 다시 태어난 꽃들처럼, 저마다의 알록달록한 고유한 꽃잎의 색깔들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내가 만들어 낸 가상 아티팩트가 이러한 힘까지 가지고 있을 줄은 몰랐다.

먹구름처럼 암울한 검은빛의 드라이어드들은 이제 맑게 갠 하늘의 무지개처럼 생기 있는 화려한 드라이어드들이 되었다. 형형색색의 드라이어드들이 잔뜩 있는 모습은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가상 아티팩트에 담긴 드라이어드들은 하나같이 날 보고 고개를 숙였다. 그들이 나를 주인으로 인식한 것처럼.

그리고 그들은 하나둘씩 사라졌다. 드라이어드가 사라지자 분수의 물줄기도 멎었다. 파필리온이 불러낼 때처럼 갑자기 나타난 그들은 사라지는 것도 갑작스러웠다.

“뭐야, 다들 어디 갔어?”

내 질문에 대한 답은 내 손목에 채워진 빛을 내는 테라리움 아티팩트로 알 수 있었다. 아티팩트를 통해 들여다본 28번째 테라리움엔 수많은 드라이어드를 담은 투명한 공들이 하늘하늘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얼핏 보이는 테라리움의 밖으로도 투명한 공들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오직 한 방향에서만. 16번째 테라리움으로 향하는 길목이었다.

28번째 세계수의 가지와 16번째 세계수의 가지가 연결된 범위에서 당신의 드라이어드는 드루이드와의 거리에 제한받지 않고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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