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2화 (162/604)

이리스가 의미심장한 눈으로 파필리온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미지에 안 맞는데?”

그녀의 말에는 나도 동감한다. 도대체 어떤 모습이 저 남자의 진짜인지 이젠 가늠이 안 될 정도였다.

그렇게나 우릴 끈질기게 애먹여 놓고 갑자기 깔끔하게 목숨을 구걸한다고? 그라면 큰 바곳처럼 구걸하느니 스스로 목숨을 끊을 정도로 자존심이 높을 줄 알았는데.

“이대로 추방시키면 그 인페르노 수장이란 합류하게 될 텐데 그럼 좋은 거 아닐까?”

길드원들은 새장 안의 파필리온이 혹시라도 헛짓거리를 할까 봐 각별히 주의를 기울였다.

“추방당하면 난 죽어.”

“그럼 추방시켜 버리세요!”

제퍼가 기다렸다는 듯이 소리쳤다.

“수 쓰는 거 아닐까요? 자기 보스랑 합류하려고.”

그 역시 다수의 검은 드라이어드를 움직이며 우리를 무척이나 애먹였던 자였다.

“그는 추방당한 순간 이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원이 바뀌었다는 것을 곧바로 눈치챘을 거야. 그리고 그건 나의 실책이기에 그의 성정이라면 난 죽은 목숨이지. 난 현재 어닝의 상황과 다를 바 없어. 블랙 릴리의 그대, 날 추방시키지 않는 것이 그대에게 도움이 될 거야.”

파필리온은 잘생긴 얼굴은 십분 활용하려는 듯 우수에 가득 찬 눈망울로 내 마음을 녹여 버릴 것처럼 애절하게 바라보았다.

내가 잘생긴 얼굴에 약하긴 한데. 그나저나 자신을 테라리움에 내버려 두는 것이 도움이 될 거라니? 테라리움에서 행정 관리원까지 맡고 있던 그는 인페르노 조직의 간부쯤 되는 위치일 것이 분명했다. 위험한 적을 내 구역에 계속 둘 순 없었다.

“무슨 도움?”

대외적으로 16번째 테라리움의 이미지를 무척이나 좋게 잘 구현해 놨던 그는 머리도 비범한 자일 것이 분명했다. 내게 사기를 치려 드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이럴 때 어닝이라도 있었다면… 그녀는 지능 만렙 캐릭터이니 그의 말의 시시비비를 잘 가려 줄 수 있었을 텐데.

“일단 난 그대를 공격할 의사가 없어. 내 말의 진실성을 보여 주기 위한 행동이니 오해는 하지 말아 줬음 좋겠어.”

그는 그 말과 함께 자신의 아티팩트가 채워진 손을 들었다. 필드에 즐비한 검은 드라이어드들 중 일부만 그의 아티팩트로 돌아갔다. 비록 전투태세는 풀렸으나 아직도 많은 검은 드라이어드들이 멍한 눈으로 우릴 바라보고 있었다.

“더 이상 내가 행정 관리원이 아니기에 가드닝 스킬로 다뤄 온 드라이어드들이 모두 방치 상태야. 세계수 가지의 축복을 집약시켜 만든 아티팩트에 영혼이 묶여 있던 꽃들인데 가드닝 스킬이 전부 해제되면서 영혼의 연결도 전부 끊겼어. 알다시피 저 꽃들은 정상적으로 자연의 이치를 배우며 자라난 드라이어드들이 아니기에 언제든지 돌발 행동을 할 수 있지.”

그 전엔 파필리온의 의지에 따라 움직이던 검은 드라이어드들이 이젠 언제든지 돌발 행동을 할 수 있는 시한폭탄들이나 다름없다고?

“‘강한 꽃이 되어야 한다, 최강이 되어야 한다’를 끊임없이 학습시킨 꽃들이야. 드루이드에 대한 충성과 애정을 못 배운 꽃들이지만 나를 따랐던 건 그들의 영혼을 쥐고 있는 존재가 나인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대뿐만 아닌 다른 드라이어드는 물론 사람들도 그들에게 얕보이면 얼마든지 공격 대상이 될 수 있어.”

“이래서 인공 개량으로 태어난 꽃들이란. 이치에 어긋난 금기된 존재들은 세계수의 땅을 밟아선 안 됩니다.”

“모두 죽여서 세계수의 영광을 드높여야 합니다.”

이리스는 내게 인공 개량을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드라이어드들이 자신들에게 두 종 있다고 했었다. 무척 고지식한 소나무와 세계수의 명예를 수호하는 월계수가 그러하다고.

그 드라이어드들은 이리스가 예상했던 것처럼 당장 검은 드라이어드들을 모두 처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룰 수 없다면 모두 죽여 버리는 것이 정말 맞는 선택일까?

길드원들은 딱히 반대하는 입장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검은 드라이어드들이 언제든지 돌발 행동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듣고 당장이라도 해치워 버릴 수 있다는 듯이 전투태세를 취하고 있었다.

“하지만 반대로 다룰 수 있다면, 이미 겪어 봤겠지만 우수한 드라이어드 군대가 될 수 있어. 그러나 그들은 더 이상 이 16번째 테라리움에 있어선 안 되겠지. 곧 중앙 행정 관리부가 방문할 테니. 그들은 이미 그대가 퍼뜨려 놓은 인공 개량에 대한 소문을 들었을 거야. 종자 보관소는 그들이 발견하지 못하는 동안 숨기거나 폐기할 수 있지만 이 드라이어드들은 금방 그들의 눈에 띌 거야.”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

“아직 그대가 다룰 수 있는 가드닝 스킬이 하나뿐이라면 방법은 있어. 그대는 두 개의 테라리움을 얻게 되었지. 그렇다면 얻을 수 있는 가드닝 스킬도 두 개야. 가드닝 스킬은 행정 관리원에게 전승시킬 수 있어. 내가 다뤘던 필드를 가상 아티팩트로 만드는 스킬을 그 나머지 하나로 전승시켜 주겠어. 그대는 내게서 가드닝 스킬을 배운 후 그대의 다른 테라리움에 저 꽃들을 옮기면 돼.”

내가 먹은 테라리움이 두 개니 행정 관리원만 사용할 수 있는 가드닝 스킬도 두 개나 사용할 수 있다고?

“그럼 가드닝 스킬을 배우고 널 처리할 수도 있는 거 아냐?”

“그대도 알다시피 이곳 테라리움은 그대에게 정상적으로 행정 관리권이 위임된 것이 아냐.”

파필리온의 말이 맞았다. 행정 관리원의 자리가 비어 있던 28번째 테라리움은 지분을 모두 내가 가짐으로써 바로 행정 관리원이 될 수 있었지만, 이미 주인이 있는 16번째 테라리움의 경우 이전 행정 관리원에게 위임을 받아야 한다는 추가 조건이 붙었다.

보통 정상적인 루트라면 위임을 먼저 받고 지분을 채웠겠지. 왜냐하면 과수원의 세계수의 가지를 통해 다이아를 공급하는 건 행정 관리원의 특권이니까. 하지만 다른 가지를 통해 지분을 뺏은 나는 안내 페이지에 나와 있듯 비정상적인 루트로 행정 관리원을 취득했다.

“인공 개량의 증거가 되는 검은 드라이어드들만이 문제가 아니야. 하나의 테라리움에 존재하는 두 개의 세계수 가지, 불안정한 테라리움 내의 여론, 비정상적인 직권 위임…. 그리고 아직 이곳에 잔류 중인 인페르노의 조직원들. 하나라도 잘못 책잡히면 중앙 행정 관리부는 그대에게서 모든 권리를 박탈할 수도 있어. 그걸 심사하기 위해 직접 이곳을 방문 중이니까.”

아니, 내가 직접 다이아를 10억이 훌쩍 넘는 수량으로 먹여서 획득한 행정 관리원 자리를 멋대로 박탈한다고? 모처럼 <무한 다이아>의 다이아 수량이 실시간으로 MAX를 못 채울 만큼 먹였는데? 지금도 28번째 세계수의 가지와 경쟁하듯 다이아를 빨아먹고 있는 거머리 같은 16번째 세계수 가지를 다이아만 양껏 먹이고 뺏겨야 하다니.

“그러니 내가 16번째 테라리움에서 보호받는 걸 그대가 허락해 준다면 정상화가 될 때까지 돕겠어. 위임 문제만 하더라도 내가 없으면 그대에게 무척 힘든 일이 될 거란 걸 알 거야. 그리고 오직 나만이 테라리움 내에 잔류한 인페르노 조직원들을 가려낼 수 있어. 날 보좌관으로 써 줘.”

“저자는 믿을 수 없다. 믿어선 안 된다.”

조용히 듣고 있던 시들링이 나섰다. 그는 애초에 파필리온을 내게 매우 위험한 자라고 평가했었다.

믿어선 안 된다곤 하나 파필리온의 모든 주장이 다 와닿았다. 특별히 다른 가드닝 스킬이 욕심나긴 해도 내 테라리움에 인페르노 조직이 기생충처럼 활개 치고 다니는 것은 싫었다.

생각해 보니 28번째 테라리움은 무(無)에서부터 시작하기에 내가 행정을 하나부터 열까지 차근차근 다룰 수 있지만… 이미 완성된 16번째 테라리움은 어떻게 다뤄야 할지 막막하기도 한데.

“당신 조직은 왜 이렇게 충성심이 없어? 어닝도 그렇고 당신도 그렇고. 단숨에 자신의 보스를 배반하고 상대에게 붙을 정도로 일말의 충성심이 없는 건가?”

“아름다운 금은화의 사정이야 모르지. 하지만 인페르노에 가담할 수밖에 없었던 건 그 주인 되는 자가 압도적인 공포로 지배하고 따르는 자들에게 걸맞은 혜택을 누릴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이야. 그의 사상에 감화된 자들도 많지만 그건 영혼에 꺼지지 않는 불씨를 담고 태어난 자들에게 그렇지.”

사상? 영혼에 꺼지지 않는 불씨를 담고 태어난 자들이란 건 화염 마법사들을 이야기하는 건가?

세상의 신격이 되는 세계수를 죽이고 새로운 세계수를 창조하려는 이교도 같은 자들이니 사상으로 뭉칠 수도 있겠다 싶었다. 단순 악마 숭배처럼 불을 숭배하는 것 외에 다른 것도 있는 건가?

“인페르노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거대해질 거야. 세계수의 축복을 영혼에 담고 태어나는 드루이드들이 많듯 아직도 불씨를 영혼에 담고 태어나는 베스탈리스들은 많으니까. 핍박받는 그들에게 건네진 도움의 손길을 절대 거부할 수 없어.”

“핍박을 받는다라….”

“베스탈리스?”

들은 적 있어? 나보다 경험이 풍부한 길드원들에게 눈짓으로 묻자 모두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다만 시들링은 뭔가 아는 눈치였다.

마치 ‘기다려’를 들은 강아지의 표정으로 나와 오래 눈을 마주하던 그는 내가 슬쩍 고개를 끄덕이자 비로소 허락이 떨어졌다 생각했는지 입을 열었다.

“날 키운 드라이어드에게서 베스탈리스에 대해선 들은 적 있다. 드루이드들이 태어나기 전부터 더 오랜 세월 동안 세계에 존재하던 인간들이라고. 본래 영혼에 불씨를 담고 태어나는 인간들 중 살아남는 것은 여자들뿐이라고 했다. 그래서 베스탈리스는 여자들밖에 없다고 했지. 그들은 영혼에 담긴 불씨를 이용해 자유자재로 불을 다룰 수 있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전에 우리가 가막살나무 군락지를 나오면서 만났던 사람들도 여자들이 많긴 했네요. 그땐 이상함을 느끼진 못했지만, 아이언비스트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그렇네요.”

“그런데 우리가 싸웠던 무시무시했던 사람은 남자였잖아? 그리고 그때 불로 공격했던 사람들 중에 남자들도 있었고.”

시들링의 말을 받아 이리스와 제퍼가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며 이야기했다.

그렇지. 인페르노의 수장은 남자였지. 그런데 불씨를 담고 태어나는 인간들 중 신기하게 여자만 살아남을 수 있다면서 어떻게 된 거지?

“드루이드보다 더 오랜 세월 동안 존재해 왔던 베스탈리스들이 핍박받게 된 건, 갑자기 세상을 태우고 세계수를 위협하는 불이 등장하고 나서부터였어. 불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강해진 것도 있지만 불을 베스탈리스들이 불러온 것이라고 생각한 자들이 있었지. 그 핍박의 중심에 있던 것이 가장 강력한 불을 다룰 수 있는 인페르노 수장 ‘애쉬’였어. 그가 베스탈리스들을 불러 모아서 인페르노가 생겨난 거야. 그들은 불이 세계수를 위협해서 자신들이 핍박받는다고 생각하니 모든 원인이 세계수에 있다고 생각해. 그래서 새로운 세계수를 창조해 자신들의 아래에 두려는 거야.”

“그 남자의 사정을 굉장히 잘 알고 있네? 그 괴팍한 성격을 보면 남에게 자기 이야기를 할 것 같진 않던데.”

“그건… 애쉬와 내가 이복형제이기 때문이야. 물론 그는 날 형제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지만.”

둘이 형제라고? 형제 사인데 그렇게 사람을 팬다고…? 그러고 보니 둘이 좀 닮았던 것 같기도 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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