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1화 (161/604)

지분을 모두 차지한 후 단순 내가 행정 관리원 자리를 뺏은 것 외에 다른 변화도 생겼다. 자리를 뒤바꾼 과수원의 세계수 가지와 동산의 검은 세계수 가지. 검은 나뭇가지에도 큰 변화가 생겼다.

검게 그을린 껍질을 털어 내고 금빛 오라를 아낌없이 내뿜는 새하얀 백옥 같은 모습이 되었다. 지진이 일어나며 동산 아래 깊숙하게 처박혀 있던 몸체가 일제히 지상을 향해 뻗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즈음 내가 소환했던 28번째 테라리움의 필드도 천천히 사라지고 있었다. 분수 물이 멎고 금빛 가지들도 사라지고.

인페르노 수장을 내쫓으며 갑작스럽게 전투가 소강상태가 된 것도 잠시, 이젠 지진으로 인해 모두가 혼비백산이 되었다.

꽃나무 드라이어들은 메스키트의 지진을 이겨 냈지만 화초 드라이어드들은 그러지 못했던 것처럼, 키가 작은 편에 속한 드라이어드들이 휘청거렸다.

화초 드라이어드들이 그렇게 맥을 못 쓰니 사람들은 더했다. 갑작스러운 지진에 아픈 소리를 내며 헤르마가 넘어졌다.

세계수의 가지는 땅속으로 파고든 제 가지를 모두 지상에 내놓고 기지개를 펼 작정인지 요란하게 지반을 흔들어 놓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혼란 속에서 나만 평온했다.

지진이 일어나자마자 내 안전을 우선으로 황급히 날 살폈던 내 드라이어드들도 어리둥절한 얼굴로 날 바라보았다.

언제부턴가 난 땅이 아니라 가지 위를 밟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땅속 깊은 곳에서 뻗어 나오는 가지들이 이상하게도 내가 선 자리를 피해 날 감싸듯 자라 올라가고 있었다.

균형 감각이 썩 좋은 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멀쩡할 수 있었던 건 마치 안전 바로 쓰라는 것처럼 신기하게 자라난 가지들이 날 지탱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누가 보면 내가 가지들을 조종해서 지진을 일으키는 악당으로 보일 정도로 절묘한 포지션이었다.

검은 나뭇가지를 숯으로 만들어 연료로 삼기 위해 깊이 맞닿아 있던 연금탑은 그 움직임에 곧 무너질 것처럼 위태롭게 흔들렸다.

연금탑이 기우뚱거리는 방향이 사람들이 많이 몰려 있는 쪽이라 자칫 잘못하다간 큰 인명 피해가 날 수도 있었다. 저거 저대로 두면 안 되지! 놀라서 반사적으로 연금탑을 향해 팔을 뻗었다.

그리고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드라이어드들이 레벨 업을 할 때 장비가 변하는 것처럼 뻗은 손등부터 팔뚝까지 금빛의 문양이 차르르 생겨났다. 형체 없이 빛으로만 이루어진 장갑을 낀 느낌이었다.

수려한 나무 덩굴 문양이 금빛을 내자 공명하듯 지반에서 뛰쳐나온 세계수의 가지들도 금빛을 진하게 내뿜었다. 동시에 내가 가리킨 방향을 향해 가지들이 뻗어 나갔다.

가지들은 덩굴처럼 몸을 휘며 마치 내 의지를 따르는 것처럼 연금탑의 최하단부터 꼭대기까지 빼곡하게 감아 올랐다. 지지대가 생긴 연금탑은 무너질 위기에서 벗어났다.

정말 내가 세계수의 가지를 조종한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혹시나 하고 아직까지 땅속 깊은 곳에서부터 빠져나오기 위해 몸부림을 치는 가지 쪽을 향해 손을 뻗었다. 내리누르듯 손바닥을 아래로 향하자 거짓말처럼 지진이 멈췄다.

“와… 이거….”

한 번만 더 해 봐도 되나? 대장 잃은 파필리온을 향해 손을 올리자, 보다 가는 가지들이 튀어나와 그를 드라이어드들로부터 격리시킨 후 새장처럼 가뒀다. 마법사가 된 기분이다. 개쩐다, 이거….

데이지가 자신의 손목에서 뿜어낸 줄기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것처럼 나 역시도 내 의지만으로 세계수의 가지를 조종하게 된 것이었다.

테라리움 아티팩트가 채워진 왼팔에 생겨난 금빛 문양은 장갑을 벗고 소매를 올려도 그대로 팔 주위를 둥둥 느리게 회전하며 떠올라 있었다. 신기하게 바라보고 있으니 문양은 점차 아래로 가라앉더니 문신처럼 내 피부에 자리 잡았다.

맨살에 이질적으로 자리 잡은 잎이 없는 흰색의 나뭇가지 모양의 문신은 빛을 받는 부위가 금빛으로 신비롭게 반짝였다. 세계수의 가지를 조종하겠다고 마음먹으니 문신은 다시 빛이 되어 피부에서 떠올랐다.

꿈속에 멋대로 찾아와 도와 달라고 하고 기절 직전까지 날 몰아세웠을 뿐만 아니라 파필리온을 비롯한 인페르노 조직이 수년간 먹였을 다이아를 훨씬 넘는 수량까지 강탈해 가더니, 진짜 말 잘 듣는 펫이라도 된 듯이 내 손짓에 이리저리 움직이게 될 줄은 몰랐다.

그리고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이것이 내가 행정 관리원이 됨으로써 사용할 수 있는 ‘가드닝 스킬’이라는 것을.

행정 관리원이었던 스케어크로우가 세계수의 가지에 드라이어드의 영혼을 묶어 주인이 없어도 아무런 무리 없이 움직이게 만들었고, 파필리온이 테라리움 내에 드라이어드 고유의 아티팩트들을 만들어 낼 수 있던 그 가드닝 스킬.

어닝이 살아서 봤다면 놀랐겠지. 그 대단한 스케어크로우도 가르침 없이 단번에 깨달았다고 했는데 나 역시 그 루트를 따랐다.

갑자기 죽어 버린 어닝이 떠올라 심란해졌다. 그녀의 시신은 땅에서 솟아오른 가지에 넝마처럼 매달려 있었다. 저렇게 두긴 그렇지. 일이 마무리된다면 아무리 악연이었던 그녀라도 좋게 묻어 줘야겠다 생각했다. 그녀의 심정이 어떻든 간에 결국 나와 자신의 목숨을 맞바꿨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으니까.

심란했던 기분을 단숨에 정리시킨 것은 핸드폰에서 연이어 울리는 알람이었다.

세계수의 높은 신뢰로 당신의 영혼이 세계수 가지의 축복과 깊게 공명합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