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동덩굴과 어닝이 함께 대화를 나눈 그 짧은 순간 동안 길드원들은 인페르노의 수장과 위태위태한 전투를 이어 갔다.
인동덩굴이 떠날 때가 딱 도망칠 타이밍이었는데 어닝이 충격에 빠져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파필리온이 이쪽을 다시 주시하기 시작했다.
길드원들은 땀을 뻘뻘 흘리며 힘겹게 전투에 임하고 있는 반면, 인페르노의 수장은 마치 놀이라도 하는 모양새로 그들을 간 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천천히 파워를 높이며 ‘이것도 버텨?’라는 식으로 피를 말리고 있었다.
이미 길드원들은 그래프트가 가능한 모든 드라이어드들을 다 끌어들여 사용했다. 하지만 한 번 버텨 내면 더 강한 공격이 왔고 애초에 그가 진심으로 임했으면 이렇게 시간을 끄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우리 엘더와 그래프트를 펼쳐 비라도 시원하게 뿌려 주면 좀 좋을 것 같은데, 이미 사용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교감도가 부족했다. 이거 너무 아깝게 필살기를 낭비한 것은 아닌가 싶었다.
난 아직 엘더 외에 그래프트를 사용할 수 있는 드라이어드가 없었다. 다른 드라이어드와 그래프트를 아직 사용할 수 없는지도 궁금했다. 난 다른 드라이어드들과도 충분히 교감도가 높지 않나?
“저 귀에 달린 장신구 하나만 빼도 이미 끝날 싸움이었어.”
선방해 주고 있는 길드원들을 응원하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던 나를 향해 어닝이 말했다.
“왜?”
“저자는 스스로 불을 제어할 수 없을 만큼 위력이 강해. 그래서 저렇게 제어구를 달고 있는 거란다.”
“헐….”
힘이 너무 강해서 봉인한다니. 보스는커녕 마왕급 아닌가요? 내가 이 게임에서 최종적으로 물리쳐야 할 것이 불이 아니라 저 마왕 아냐?
“그러니 아직 남은 비장의 수가 있다면 지금 사용하는 것이 좋을 거란다.”
“비장의 수? 난 이미 밑천 다 털렸는데.”
엘더와 그래프트도 썼고 아티팩트를 불러오는 영역 선포는 할 줄 모른다. 어닝이 메스키트를 바라보며 말을 하는 것으로 보아 내가 아마 메스키트와 그래프트를 사용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것 같았다.
확실히 스페셜 등급인 우리 메스키트와 그래프트를 펼치면 정말 어마어마한 스킬을 볼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내게 충성도가 높은 반면 난 그녀와 그래프트의 교감을 조금도 느끼지 못했다.
“그래? 그럼 곧 여기서 전부 타 죽겠구나. 저자가 흥미를 잃어버렸잖니. 공격을 버틸 수 있다는 것에 잠시 흥미가 동했나 본데 이제 그것도 끝이란다. 저것 보렴.”
어닝의 시선을 따라 보다가 기절하는 줄 알았다. 지상에 태양이 떴다. 계속 쳐다보면 실명할 것 같은 밝기와 주변 열기에 이미 바짝 말라 죽지 않은 것이 용할 정도로 엄청난 기운이었다. 저건 정말 사람이 맞을까?
정말 여기서 다 죽는다고? 애초에 저 마왕은 공략이 불가능한 보스였나? 불의 보스 몬스터는 기믹을 파악해서 대응이라도 하지, 저건 대체 어떻게 해야 돼?
단지 희망을 거는 것이 있다면 이제 거의 다 빼앗은 파필리온의 지분이었다. 하지만 아직 그의 지분은 한 자릿수이긴 해도 0%가 되지 않았다. 숫자가 떨어지는 속도로 보아 저 태양에서 무언가 터져 나오는 것이 더 빠를 것 같았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을까? 내가 길드원들을 도울 수 있는 뭔가 없을까? 제발.
“이제 끝이구나. 이렇게 될 거였다면 스케어크로우와 마지막을 함께했을 거야.”
“무슨 유언 말하듯이 하지 마!”
“그녀를 죽인 것은 나란다.”
“뭐?”
갑작스러운 고해성사에 정신이 얼떨떨했다.
“정확히는 죽게 만든 것이 나란 거지. 16번째 테라리움에서 맹독초를 실은 마차를 보냈을 때, 호위들을 해치우고 맹독초를 강탈하기 위해 내 라다니페르의 힘을 사용한 것이 실수였단다. 내 꽃은 휘발성이 강한 씨앗을 퍼뜨려 폭발시켜서 식물임에도 불구하고 불을 이용해 적을 죽일 수 있는 꽃이었단다. 하지만 불은 불을 부른다고 하지. 결국 세계수 가지의 축복이 약해진 틈을 타 주위에 포진하고 있던 모든 불들이 몰려오고 말았단다. 전투에 패한 드라이어드들까지 집어삼키며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몸집을 불려 갔지. 내 라다니페르 꽃은 삼켜지면 매우 위험한 유니크 등급이었단다. 그래서 불을 내게서 멀리 유인한 후… 자폭을 하려고 했어. 내 꽃은 스스로를 불태워 죽을 수 있는 저주받은 능력도 사용할 수 있었거든.”
씨앗을 퍼뜨려 폭발을 시킬 수 있는 유니크 등급의 드라이어드…. 시들링과 함께했던 불 마차 보스전 때, 우리를 애먹였던 기술이 떠올랐다. 마차에서부터 빗발치던 씨앗들. 닿기만 해도 타 들어가고 떨어진 지역에 불꽃을 터뜨리는 광역기. 그리고 블루 멜로우는 불 마차가 유니크 등급의 드라이어드를 삼켰다고 했다.
“하지만 자폭하기 전에 먹히고 말았단다. 내가 피할 시간을 충분히 벌지 못했거든. 설상가상으로 더욱 강해진 불이 사방에 불을 내며 더욱 많은 불들을 불러모았어. 그것들이 모여 28번째 테라리움을 습격했지.”
“제이! 가막살나무를 불러요!”
메스키트의 갑작스러운 외침에 반사적으로 아티팩트에서 가막살나무를 불러왔다. 그는 아티팩트에서 나타남과 동시에 넓은 대검을 세워 곧바로 전투 준비를 했다.
“상황이 심각해지면 가막살나무의 보호를 받아요. 그는 방화수라 열기에 더 잘 견딜 뿐만 아니라 꽃말의 힘이 있는 한 절대 죽지 않으니 제이 혼자라면 저 열기를 대신 맞아 줄 수 있을 거예요.”
“그 나무는….”
메스키트의 말을 이해한 가막살나무가 거대한 불을 동굴에 가둬 두었을 때처럼 나무를 불러와 날 감싸게 하고 뒤이어 날 끌어안았다. 가막살나무를 알아본 어닝이 눈물을 뚝뚝 흘렸다. 그 모습에 놀라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스케어크로우는 다 알고 있었어. 언제부턴진 모르겠지만 이미 나에 대해… 내가 벌인 일에 대해 다 알고 있었어. 그런데 자기 아래에 있는 사람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한 것은 자신의 잘못이라고 전부 자신이 책임질 테니 난 떠나라고 했어. 그녀가 그녀의 드라이어드와 생명을 담보로 한 최후의 그래프트를 펼치려고 할 때… 나도 남겠다고 했어. 하지만 허락하지 않았어. 다시는 보지 말자고. 테라리움과 자신에게서 멀리 떨어지라고. 여기서 맺은 모든 인연과 기억을 잊고 떠올리지 말라고. 그것이 내게 내릴 수 있는 가장 혹독한 벌이라고 했어.”
어닝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 말이 맞아. 정말 잔인하고 혹독한 벌이야. 내가 벌인 짓에 대해 가장 어울리는 큰 벌이지. 어떻게 내가 크로우를 잊을 수 있겠어. 어떻게 내게 가장 소중한 그녀의 죽음을 뒤로하고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떠날 수 있겠어.”
“가막살나무를 제외한 다른 드라이어드는 아티팩트로 돌아가는 게 좋겠어! 저만한 불을 버티는 건 데저트 필드의 드라이어드라도 버겁다고!”
엘더가 메스키트를 바라보며 동의를 구하듯 소리쳤다.
“저 미친놈이 테라리움 전체를 날려 버리려고 하나?”
“대체 어떻게 해야…!”
점점 크기를 더해 가는 지상의 태양을 보며 이리스와 제퍼가 기겁을 하며 소리쳤다. 가까이서 전투를 벌인 그들은 이미 크고 작은 화상을 달고 있었다.
제발… 제가 뭐라도 할 수 있게 해 주세요. 내가 모두를 지킬 수 있는 힘이 있다면. 내가 스케어크로우가 28번째 테라리움을 지키기 위해 했던 것처럼 대단한 힘을 사용할 수 있었다면.
그때였다. 사방에 금빛이 깔리며 모든 것이 사라졌다. 드넓게 펼쳐진 금빛의 기운이 넘실거리는 바다 위에서 아무것도 없이 나만 홀로 있었다. 하지만 무척이나 포근하고 아늑한 기분이 들었다. 다들 어디로 간 거야?
“금빛이… 왜 아무도 보이지 않아?”
“금빛? 아티팩트의 기운이에요! 영역 선포를 사용할 수 있는 준비가 된 거랍니다.”
이 상황에서 갑자기 영역 선포 스킬을 깨달았다고? 이게 내가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힘이라면.
분명 아무도 없는데 메스키트의 목소리가 지척에서 들렸다.
“아티팩트에서 가장 아늑하고 안전하다고 느끼는 필드를 떠올려 보세요. 자신의 드라이어드들에게 선사할 최고의 필드를.”
메스키트의 지시를 따라 필드를 떠올렸다. 어떤 필드가 가장 아늑한 느낌이 들지? 내 드라이어드를 안전하게 지켜 줄 수 있는 최고의 필드는…?
알 것 같았다. 왜 내가 이 순간 영역 선포의 힘을 깨우치게 되었는지. 내가 가장 안전하다고 느끼는 필드는 단 하나였다. 나만이 불러올 수 있는 내 드라이어드들을 위한 최고의 필드.
그곳을 떠올리자 넘실거리는 황금빛의 바다가 내가 기억하는 모습으로 변해 갔다. 주변에 엄청난 지진이 일어났다.
“갑자기 이게 무슨…?”
사방에서 터져 나오는 다이아 분수. 반파된 건물은 보이지 않으나 새까맣게 땅을 뒤덮은 잿가루를 밀어내고 반듯한 돌바닥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금빛을 휘감은 새하얀 가지가 땅에서 솟아오르고 주위를 충만한 축복의 기운으로 가득 채웠다.
다이아 분수에 닿은 우리 편 드라이어드들의 방어구가 말끔하게 치유되기 시작했다.
분수의 물줄기와 크기는 내 호응에 힘입듯 힘차게 다이아를 빨아먹은 세계수 가지 덕에 모든 열기를 빠르게 식힐 만큼 거대했다. 지쳐 있던 드라이어드들이 감당할 수 없는 열기를 향해 활기찬 기운을 뿜었다.
내 아티팩트에 연결된 28번째 테라리움이 통째로 이곳에 필드로 구현되었다. 심지어 자생지 필드의 종류에 따라 풀이 자란다거나 열대 우림이 생겨나는 것처럼 28번째 테라리움의 세계수의 가지가 곳곳에 솟아올랐다.
세계수의 축복을 풍족하게 받는 테라리움의 이점뿐만 아니라 내 테라리움의 전속 길드원들까지 힘을 얻을 수 있는 필드.
“모든 것이 태어나고 모든 것이 시작하는 축복을….”
모든 것을 태우고 생명을 없애는 열기를 이겨 내고 축복의 대지가 펼쳐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