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7화 (157/604)

“영역 선포가 가능해진 것이 천만다행이에요. 그 전엔 너무 불리했어요. 쉽게 당하진 않을 거예요. 이 정도의 더운 열기라면 제 드라이어드들이 활개 칠 수 있는 트로피컬 필드에도 보너스 작용이 일어날 거예요.”

역대급 보스의 등장에 절망한 날 보며 이리스가 애써 날 다독였다. 시들링은 스톤 필드를 불러온 후 곧바로 열대 우림의 수목들이 만개한 필드를 불러왔다.

그의 드라이어드들 중 이리스의 드라이어드와 자생 필드가 겹치는 꽃들이 있는 듯했다. 보편적인 경우의 수를 피하기 위해 불 마차 때처럼 노멀 필드를 불러오진 않았다.

활활 타오르는 불길이 걷혔다. 대단히 가공할 만한 위력의 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온전히 어느 곳 하나 손상 입지 않은 남자가 나타났다.

빛을 받으면 선홍색의 빛을 내는 주홍색에 가까운 금발에 상등급의 루비가 떠오르는 붉은 두 눈이 인상적인 자였다. 강렬한 색채를 띠고 있으면서도 아무렇게나 잘라 낸 듯 길이가 맞지 않는, 정돈되지 않은 머리와 아무렇게나 풀어헤친 블랙 셔츠에서 그의 제멋대로인 성격을 엿볼 수 있었다.

가까이 올수록 보이는 점은 더욱 가관이었다. 학교 다닐 때 트렌드에 민감한 학생들이 피어싱을 여러 개 달고 다니는 것은 자주 봤지만 저렇게 주렁주렁 달고 있는 것은 처음 봤다. 귀며 목이며 심지어 쥐락펴락 주먹질하는 손가락에도 온갖 보석이 달린 장신구가 가득했다.

부를 자랑한다기보단 뭔가 강박적으로 눈에 보이는 걸 죄다 장착한 느낌이었다.

또한 어느 정도 나이가 든 중년 정도의 이미지를 생각했는데… 가까이서 본 그는 매우 젊었다.

그가 우리와 마주친다면 곧바로 전투가 시작될 거라 생각했다.

내 길드원들의 생각도 마찬가지였기에 언제든 그가 먼저 공격 태세를 취한다면, 아니 조금이라도 위협적인 움직임을 보인다면 곧바로 대응할 요량으로 잔뜩 긴장한 상태였다. 한 단체의 수장쯤 되는 자이니 무척 힘든 싸움이 되겠지.

그렇게 예상했던 것과 달리, 그는 우리로 향해 오던 걸음을 틀어 파필리온에게 향했다. 그리고 다짜고짜 긴 다리를 들어 가차 없이 그를 발길질했다.

잿가루가 덕지덕지 달라붙은 발에 차인 파필리온은 단정하게 빼입은 정장에 검은 먼지를 멍 자국처럼 달고 멀리 나가떨어졌다.

“기껏 맡겨 놨는데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게 없네.”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싸늘하게 파필리온을 타박했다. 정말 상상도 못 했던 전개였다. 파필리온이 그를 언급하며 두려워하는 티를 냈지만 어쨌든 둘은 같은 편이잖아?

검은 드라이어드들이 그를 보고 주춤거리다 황급히 제 주인을 부축하러 달려들었다. 유독 파필리온과 각별한 사이인 것 같은 검은 엉겅퀴 드라이어드가 유일하게 그를 막아서며 제 주인을 보호하려 했다.

파필리온이 황급히 엉겅퀴 드라이어드를 제지하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퍽 소리와 함께 드라이어드는 그의 손에 머리를 얻어맞고 쓰러졌다.

“징그러운 새끼들이.”

“하하, 조직이 먹고 사는 것도 다 드라이어드들 덕분이잖습니까.”

파필리온은 애써 재수 없는 미소로 상황을 모면해 보려는 듯 너스레를 떨다가 또다시 그의 공격을 받았다.

다친 부위를 붙잡고 힘겹게 일어나는 그는 처음 만났을 때와 무척이나 다른 인상이었다. 그를 테라리움에서 만났을 땐 행정 관리원이라는 직책과 고레벨 드루이드라는 점에서 정말 까다롭고 어려운 존재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인페르노의 수장인 남자 앞에선 너무나도 나약해 보였다.

“머리는 좋은 놈이라 생각해 믿었는데 아주 요란하게 일을 쳐 놨군. 일이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뭐 하고 있던 거지?”

그는 적이나 다름없는 우리가 멀쩡히 지켜보고 있는 것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심지어 우리에게 등을 돌리고 있었다. 마치 우린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것처럼.

유아독존 태도는 자신의 강함에 대한 믿음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건가? 하지만 여기 시들링의 기세는 결코 무시할 게 아니지 않나?

“충분히 수습할 수 있습니다.”

“이미 한 자릿수 테라리움들에서 주시를 당하고 있다. 그런데도 수습할 수 있다고?”

“최선을 다해서 정상으로 되돌려 놓겠습니다.”

“크레아시온이 아닌 너에게 맡긴 것은 어닝의 변심을 가장 먼저 알아차리고 빠르게 대응해서였다. 하지만 지금까지 보고된 정보에 의하면 정말 형편없는 처신이군. 연금탑의 비밀이 탄로나고 인페르노의 존재가 수면 위로 올라올 위험에 처하게 됐지.”

“오랜 시간을 들이지 않고 확실하게 덮어 놓겠습니다. 다시 한번 맡겨만 주십시오.”

파필리온은 얻어터져서 너덜너덜한 모습으로도 용케 자세를 굳건히 하며 그를 대했다.

“그렇다는 건….”

별안간 그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제야 우리를 발견한 것처럼, 이제 신경 써 주겠다는 것처럼.

“확실히 이 테라리움을 나가선 안 되는 사람들이 보이는군. 특히나….”

우리를 쓱 훑던 그는 멀리서 바위 뒤에 몸을 가리고 있던 어닝을 발견하고 시선을 멈췄다.

“델어닝, 자네와는 아직 못다 한 이야기가 있지?”

항상 특유의 자신감에 찬 막무가내 화법으로 말을 늘어놓던 그녀가 입을 꾹 다물었다.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차마 그에게 시선을 돌리지 못한 채 입술을 깨물며 날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내가 그녀에게 유일한 구세주라도 되는 것처럼.

“맹독초 개량종을 빼돌리고 중간에 탈취하려 운송하던 마차를 습격하질 않나…. 그래, 28번째에 테라리움에 파견된 조직원들도 모두 죽인 것도 모자라 내게 28번째엔 맹독초가 안전하게 도착해서 세계수의 가지가 완벽하게 정화됐다고 거짓 보고까지 올렸지. 덕분에 다른 놈들이 주인 없는 테라리움을 채 가는 것을 손 놓고 구경하게 만들었고.”

그의 입에서 어닝의 반역 행위들이 낱낱이 고발되고 있었다. 그동안 파필리온은 자신에게 향한 분노가 어닝에게 옮겨진 것을 확인하고 얄밉게도 쌤통이라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마차를 습격했다고? 그렇다면 우리가 발견했던 마차의 그 전투 흔적들은 어닝이 벌였던 것들인 걸까? 그보다 그녀가 28번째 테라리움에 파견된 조직원들을 모두 죽였다는 점이 거슬렸다.

문득 데이지2에게 들었던 그녀의 기행이 떠올랐다. 그녀가 보좌관으로 일할 적, 테라리움 전속 길드를 제 손으로 해체했다는 이야기가 떠오른 것은… 우연일까?

그녀가 한 행동에 악의가 있는 행동들과 없는 행동들에 대해 판단이 힘들어졌다. 저렇게 인페르노 수장을 두려워하면서도 그 두려움을 이겨 내고 그에 반하는 행동들을 한 건 왤까?

“덕분에 손해가 아주 막심해.”

그의 말이 마치 ‘그러니 죽어.’라고 들렸다. 다시금 그의 주위로 찬란한 불꽃이 감돌았다. 더욱 가까이서 보니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그는 정말 어닝을 끝내 버릴 작정인지 손에 불길을 감아 그녀가 있는 방향으로 내질렀다. 엄청난 열기를 내뿜는 불길이 소용돌이치며 어닝을 향해 쏘아졌다. 전에 이리스 파티와 만났던 화염 마법사들의 위력과는 차원이 달랐다.

불길이 지나치는 모든 것들을 게걸스럽게 먹어 치우며 그 도착지에 있는 그녀마저 한 줌 재로 만들 기세로 달려들었다.

그녀의 드라이어드들이 자신들이 대신 맞을 기세로 뛰쳐나오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난데없이 과격한 바이올린 음악 소리와 함께 붉은색의 거대한 방패가 불길을 대신 막아섰다. 방패는 화력을 견디지 못하고 타서 흩어지고 주홍색, 노란색, 초록색으로 변해 갔다. 방패의 색이 보라색이 되었을 때 겨우 불길을 막아 내는 것을 성공했다.

“와, 마지막 한 번 더 뚫렸으면 진짜 큰일 날 뻔했네!”

방패를 들고 있는 것은 이리스였다. 그녀는 그녀의 드라이어드인 유칼립투스 디글럽타와 그래프트를 펼친 것이었다.

아니 하나의 드라이어드와 그래프트를 펼친 것이 아니었다. 한 손엔 방패, 다른 한 손엔 곱게 접힌 화려한 우산이 들려 있었다.

“아이언비스트는 진짜 겁대가리가 없나 봐. 어떻게 방어형 드라이어드도 없으면서 그 불길을 막아 내려고 뛰어든 거야?”

“내 말이!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공격형 드라이어드의 그래프트로 뭘 어떻게 하려고 그런 거래? 나도 겨우 란타나의 지원까지 빌려 가서 버텨낸 건데!”

제퍼가 호들갑을 떨며 소리치자 이리스가 열기에 벌게진 얼굴로 맞장구를 쳤다. 그들의 말을 듣고 보니 정말로 시들링이 검을 들고 이리스의 뒤에서 불길의 이동 경로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아까 들린 바이올린 소리는 로즈우드 드라이어드의 것이었구나.

시들링이 어닝을 위해서 나섰다는 것이 놀랍다는 생각이 들었다가 고쳐먹었다. 불길의 이동 경로엔 어닝뿐만 아니라 우리 편들이 있었다. 단순히 그녀를 위해서라기보단 길드원들을 위해서 움직인 듯했다.

시들링이 움직이니 피하려다 때를 놓친 이리스가 기꺼이 두 드라이어드와 함께 그래프트를 진행하면서까지 나선 것이고.

그나저나 하나가 아닌 두 드라이어드와 그래프트를 할 수 있다니. 언제는 시들링이 다중 영역 선포를 할 수 있다고 대단하다고 하더니 그녀 역시 다중 그래프트를 할 수 있을 정도로 대단한 사람이었다.

“공격 한 번에 란타나는 7의 효과가 모두 소모됐어. 이거 또 하기에는 무리야.”

그녀가 쥐었던 방패와 우산을 놓자 그것들은 각자 피부가 알록달록한 디글럽타 드라이어드와 어깨에 우산을 살포시 쓴 란타나 드라이어드로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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