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까지 소란을 피워 놓고 정문으로 나갈 생각은 진작 버렸다.
아래까진 엄청난 높이였지만 혹시나 드라이어드의 힘으로 내려갈 수 있는지 물었다.
메스키트는 도약만으로 가능하다고 했지만 나와 함께 떨어질 경우 내가 받을 충격을 모두 자신이 흡수할 수 없다고 했다.
다만 데이지는 가능하다고 했다. 줄기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그녀는 연금탑의 튀어나온 부분을 지지대 삼아 나를 끌고 아래로 내려갈 수 있다고 했다.
어닝은 곧바로 뚫린 벽을 통해 아래로 내려갈 생각인 날 보고 극락조화 드라이어드를 꺼냈다.
새를 닮은 드라이어드가 정말 새처럼 하늘이라도 날 수 있나 싶었지만 그건 아니었다. 지원형 극락조화는 중간중간 바람을 일으켜 연금탑 벽을 밟으며 어닝을 안고 사뿐사뿐 내려갔다. 낙하 속도를 능력껏 줄여 내려간 것이었다.
발을 동동 구르는 파피루스를 뒤로하고 데이지를 껴안았다. 아무리 유능한 내 드라이어드라고 할지라도 바곳과 엘더는 엄청난 높이를 능력껏 내려갈 수는 없는 듯했다. 다른 드라이어드들은 지상에 발이 닿을 때까지만 내 아티팩트로 돌아갔다.
“동산까지 빠르게 이동하자. 정말 지키는 사람이 하나도 안 보여.”
의도했던 대로 16번째 테라리움엔 폭발에 비견할 만한 큰일이 터졌다. 연금탑의 비밀을 외부에 까발린 것. 그리고 세계 멸망 징조를 예상케 하는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폭로 메시지에 힘이 실린 것.
“헐… 저기 사람들 몰려오는 거 보여?”
동산을 향해 뛰면서 연금탑을 향해 몰려오는 무리들을 가리키며 어닝에게 말했다. 그녀는 내가 가리킨 곳을 슬쩍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이 왜곡한 벌의 메시지를 확인한 사람들이 진실을 확인하러 연금탑으로 몰려드는 것 같네. 저렇게 많은 인파가 연금탑에 모여 주면 이쪽이야말로 고맙지.”
조금 얼떨떨한 기분이 들었다. 정말 계획이 성공했구나. 처음엔 연금탑을 나올 일이 정말 막막했는데. 엘더의 이야기로부터 단서를 얻어 사건들을 계획했을 때도 이런 허황된 계획이 정말 성공할까 의구심이 들기도 했다.
내 재력을 믿고 설익은 열매를 대량 매입해 16번째 테라리움으로 보내준 황금 호박 상회.
종이 한 장짜리 부탁을 듣고 정말로 수맥을 찾아내 테라리움에 뜨거운 열기를 불러온 길드원들.
제 몸에 병충해를 심어 세계수의 가지를 감염시킨 윈터.
그리고 엘더의 광역 생명의 비에 맞춰 벨라돈나의 그래프트로 검은 비를 만들어 낸 시들링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혼자라면 불가능했겠지.
오랫동안 갇혀 있던 던전 같은 연금탑을 벗어나니 속이 다 후련했다.
몰려온 사람들 덕에 더욱 소란이 커져 연금탑 소속 연구원을 대동할 필요 없이 동산으로 입장할 수 있었다.
엘더와 한 차례 차가운 비를 쏟아 낸 덕인지 열기가 많이 사그라들어 있었다. 며칠 내내 샤워도 못 해서 한여름의 무더위 같은 온도 속을 땀을 뻘뻘 흘리며 걸어야 했다면 정말 살기 싫었을 거야.
초췌한 내 꼴에 비해 어닝은 함께 갇혀 지낸 것이라곤 전혀 생각도 하지 못할 만큼 단정하고 말끔해 보였다. 저 사람은 뒷골목을 전전하며 지내도 지금처럼 반짝반짝 빛이 날 것 같았다.
그런데 동산을 올라가며 이상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비밀 수행원이 전달한 쪽지엔 분명 광장 근처의 가로수들이 하얗게 변했다고 했는데, 주변 식물들이 모두 서리를 맞은 것처럼 새하얗게 변해 있었다.
설마 그 병충해의 피해가 여기까지 번졌다고? 어닝은 분명 감염도는 그렇게 높지 않다고 했는데.
“그 남자가 이곳을 들렀나 보구나. 좋지 않은 판단이었어.”
어닝 역시 나와 같이 이상함을 느꼈는지 온통 새하얗게 변해 버린 주변을 둘러보며 혀를 찼다.
“이곳이니? 내 소중한 꽃이 갇혀 있는 곳이.”
어닝은 검은 나뭇가지가 가시덩굴처럼 뒤엉킨 곳을 가리키며 초조함이 내비치는 목소리로 물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대뜸 검은 나뭇가지에 손을 대었다. 그러곤 열기에 화들짝 놀라 급히 손을 떼었다. 그녀는 평정심을 많이 잃어버린 것처럼 보였다.
“내 소중한 아름다운 금은화여. 내가 너를 다시 품으로 데리러 왔단다. 어서 내게 그 고운 얼굴을 보여 주렴. 오래 기다리게 해서 정말 미안하단다.”
그녀는 검은 나뭇가지 너머를 향해 애달픈 목소리로 외쳤다. 가지 틈새로 희끄무레한 것이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인동덩굴 드라이어드가 분명해 보였다. 그러나 그는 어닝의 외침에 답하지 않았다. 무척 고대해 온 주인과의 만남일 텐데 어쩐지 이상했다.
“아아, 내 아름다운 꽃아. 왜 내게 답해 주지 않는 거니?”
그녀는 검은 나뭇가지를 가리키며 눈을 매섭게 떴다.
“어서 내 꽃과 나 사이를 가로막는 저걸 치워 주렴. 당신은 할 수 있다고 했잖니?”
그렇게 보채도…. 꿈속에서 분명 세계수의 가지는 내게 이곳으로 향하라고 했지. 도움이 필요한 건 이쪽이라고. 하지만 그 꿈대로 동산을 다시 찾았는데도 히든 퀘스트가 활성화된다거나 하는 조짐은 보이지 않았다.
“혹시… 메스키트, 여기 테라리움에서 느껴지는 세계수의 축복은 어때?”
과수원의 세계수의 가지가 아직 건재하기 때문인 걸까? 하얀 쪽이 반드시 죽어야만 한다고 했지.
메스키트는 내 질문에 참담한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필요에 의해서, 그것도 스스로가 원해서 세계수의 가지가 힘을 잃어야만 한다.
드라이어드들의 신과 같은 존재가 오랜 시간 인간에 의해 고통받았을 뿐만 아니라 믿기지 않는 극단적인 선택을 강요하는 것을 차마 받아들이기 힘들겠지.
“처음 이 테라리움을 방문했을 때보다 축복의 기운이 많이 약해지긴 했으나 아직 건재하답니다.”
“28번째 테라리움에 비하면 힘을 잃는 속도가 빠르긴 하지만 내겐 시간이 없어!”
메스키트의 대답에 어닝이 검은 나뭇가지 너머에 있을 인동덩굴을 바라보며 날카롭게 소리쳤다. 그래도 어떡해. 과수원의 세계수의 가지가 완전히 힘을 잃어야 이곳의 히든 퀘스트가 발생할 텐데.
“역시 이곳으로 향할 거라 생각했지.”
갑자기 이곳에서 결코 듣고 싶지 않았던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리가 왔던 길을 화려한 금발의 남성이 차갑게 타오르는 분노를 얼굴에 가득 담은 채 걸어오고 있었다.
“파필리온….”
“대체 내 테라리움에 무슨 짓을 벌여 놓은 거야? 아무리 블랙 릴리의 그대라도 이건 용서해 줄 수 없어.”
그가 굉장히 화났다는 사실이 말투에 뚝뚝 묻어났다.
“내가 너에게 용서를 구할 거면 애초에 일을 벌였겠어?”
“그대는 인페르노 전체를 적으로 돌린 거야. 그렇게 태평한 얼굴인 건 내 말이 갖는 무게가 어느 정도인지 전혀 깨닫지 못한다는 거겠지.”
어닝이 파필리온을 노려보며 앞으로 나섰다.
“여기서 나비 새끼의 날개를 죄다 찢어서 밟아 버리면 또 모를 일이지.”
“금은화의 그대, 본래 잊혔어야 할 델어닝. 숨고 도망 다니는 데는 정말 도가 텄어.”
“조금만 긴장을 놓으면 날 죽이려는 사람들이 사방에 널려 있는데 당연한 거 아니겠니?”
대강당에서 한 무리의 수행원들을 우르르 달고 다녔던 것과 달리 파필리온은 혼자였다. 혼자서 충분히 다 상대할 수 있다는 자신감 때문인가?
“이미 늦었다, 어닝. 그는 이미 테라리움에 도착했어. 그리고 당신들이 벌인 일을 두 눈으로 전부 확인했지. 여기서 당신들을 산 채로 잡아가지 않으면 나까지 죽게 생겼던데?”
“죽을 거면 혼자 죽어.”
어닝이 아티팩트에서 자신의 모든 드라이어드들을 꺼내며 전투 태세를 갖추었다. 그 모습을 보며 파필리온이 마치 가소롭다는 듯이 웃음을 지었다. 그가 손짓하자 어깨에 앉은 노란 새가 길게 울었다. 동시에 아티팩트에서 검은 꽃잎이 휘날리며 여관에서 보았던 그 드라이어드가 나타났다.
“그리운 얼굴이지?”
검은 엉겅퀴 드라이어드. 크레아시온이 했던 말에 따르면 어닝의 검은 엉겅퀴를 거름 삼아 삼켰다던 그 드라이어드. 드라이어드를 본 어닝은 분노로 어깨를 떨며 눈에 핏발을 세웠다.
“죽여 버릴 거야.”
“그대의 소중한 검은 꽃이 죽은 건 그대의 경솔함 때문인 걸 알아야지.”
검은 엉겅퀴 드라이어드는 어닝을 향해 거칠게 날이 선 톱을 겨누었다. 자신을 적대하는 드라이어드를 보면서도 어닝은 입술을 깨물며 슬픈 얼굴을 했다.
“우리의 주인은 참을성이 없으니 이쯤 하지. 차라리 연금탑에서 죽을 때까지 숨어 있었으면 좀 더 오래 살 수 있었을 텐데.”
파필리온이 손을 까딱이자 주변의 공기가 기분 나쁘게 진동하며 귀가 먹먹해졌다. 그가 하는 모양새는 종자 보관소의 큰 바곳이 했던 것과 동일했다. 큰 바곳이 주변을 아티팩트 환경으로 만들려고 했을 때의 모습.
사방이 벽으로 둘러싸인 방에서나 구현해 내는 임시 가상 아티팩트와는 전혀 다른 기운이었다. 테라리움 전체가 그의 아티팩트이므로 비교도 할 수 없는 위압감이 몸을 짓눌렀다.
사방에서 검은 꽃들이 피어났다. 검은 엉겅퀴뿐만 아니라 종을 알 수 없는 꽃들도 수북이 피어났다. 그만큼 수많은 드라이어드들이 곧 파필리온의 부름에 나타날 터였다.
이미 아티팩트 공간 안이라는 우위를 점한 그가 불러내는, 피어난 꽃들만큼 수많은 드라이어드들을 이길 수 있을까?
키가 작은 화초부터 큰 꽃나무에 이르기까지. 죄다 검은 꽃잎을 가지고 활짝 피어났으며 동시에 그 꽃들을 형상화한 검은 드라이어드들이 속속 나타났다.
준비된 정예 전투병처럼 드라이어드 하나하나가 왕의 위엄을 상징하는 아름다운 날개를 달고 화려한 장비와 무기를 가지고 있었다.
연금탑에서 공장처럼 인공 개량 꽃들을 찍어 내면 금세 거대한 포레스트를 만들어 내는 것도 쉽겠구나 싶었다. 강제로 축복이 깃드는 그릇을 만들어 내기 위해 벼락까지 맞게 하질 않나.
“어닝, 이건 정말 우리 파티를 맺어야 하지 않아? 이런 상황에서 따로 싸우자는 건 아니겠지?”
어닝은 내 말에 아랫입술을 짓이기듯 깨물었다.
“못 해.”
“연금탑에선 개인 플레이해도 눈감아줬는데 여기서까지 이렇게 고집부릴 거야?”
“난 월렛을 없앴단다. 그 어떤 드루이드와도 네트워크를 맺을 수 없어.”
“뭐?”
그동안 파티 플레이 안 하고 강짜를 부렸던 게 월렛이 없었기 때문이었어? 아니 월렛 없는 드루이드는 처음 보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