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레아시온은 내게 연금탑 밖으로 나갈 타이밍을 잘 맞추라고 했다. 본래의 내 계획과 맞게 적들의 정신이 다른 곳에 팔려 있을 때 연금탑을 빠져나오는 것이 목표였다.
윈터가 병해충 연금술을 완성할 시간도 필요해서 그 안에 물밑 작업이 필요했다. 내가 연금탑을 나가지 않더라도 밖으로 소식을 전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총동원해야 했다.
어닝의 조언을 듣고 첫째 징후에 대한 단서를 얻고 나자 갑자기 머릿속에 계획들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탑 안에선 내 드라이어드들이 매 위기마다 최선을 다해 주었다. 이제 나는 내가 가진 모든 것을 활용해서 다음으로 넘어가야만 했다.
내 다이아로 얻어 낸 박쥐 같은 수행원. 16번째로 들어오지 못하는 칼롱을 중계 역할로 이용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는 16번째로 오지 못할 뿐 다른 곳의 이동은 자유로우니 내 28번째 테라리움으로 보내는 거야. 그 역시도 드루이드이기에 내가 데이지2에게 필요한 사항을 전달하고 충분한 다이아 의뢰금으로 유혹한다면 넘어오겠지.
말벌을 자주 주고받을 수 없으니 차라리 데이지2를 통해 상세한 의뢰를 맡기는 것이 낫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칼롱에게 맡길 임무는 세 번째 멸망 징후를 퍼뜨리는 것이었다.
세계수의 가지에서 다 익지 않은 열매들이 비처럼 떨어지는 것. 진짜로 가지에서 열매들을 떨어뜨리는 것은 하지 못하나 이를 사람들이 믿게 만들면 된다.
칼롱에겐 먼저 말벌을 보내 28번째 테라리움을 방문할 것을 명령했다. 그 후 아티팩트를 통해 데이지2에게 그에게 시킬 지시 사항을 전달했다.
18번째 테라리움에서 연을 맺어 둔 ‘황금 호박 상회’를 이렇게 이용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잊지 않고 그가 28번째 테라리움으로 출입할 수 있도록 제한을 풀어 놨다.
“칼롱이란 남자가 도착하면 황금 호박 상회에 수급이 가능한 모든 테라리움에 설익은 구매 의뢰를 넣으라고 전달해 줘. 그 상회 높은 사람이랑 내가 알고 있으니 말하면 알 거라고 해. 몇백 상자가 됐든 상관없어. 전부 원가보다 비싸게 매입하겠다고. 그리고 그걸 전부 가능한 빨리 16번째 테라리움으로 배달해 달라고 하면 돼.”
내 말에 데이지2는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데이지2도 시킨 일을 빠릿빠릿하게 잘하겠지만 아티팩트 안이나 다름없는 28번째 테라리움에서 멀리 나갈 수 없다는 점이 너무 아쉬웠다.
황금 호박 상회는 분명 많은 이윤을 남기기 위해 닥치는 대로 설익은 열매를 매입하겠지. 대부분의 테라리움에 분점을 내고 있다고 하니까 그 정도 네트워크면 테라리움들을 싹 털어 올 수 있을 거야. 경매 때 내 자금력을 확인했으니 거리낄 게 없겠지.
“그리고 16번째 테라리움에 도착하면 그걸 전부 헐값에 사람들에게 되팔라고 해 줘. 원가가 300다이아인데 한 10다이아 정도로. 되팔면서 꼭 이런 말을 해야 한다고 해 줘.”
사람들이 세계수의 가지에서 설익은 열매가 비처럼 떨어졌다고 믿게 하는 것.
“16번째 테라리움의 과수원에서 갑자기 익지 않은 열매들이 낙과해서 처치 곤란이라 헐값에 판매하게 됐다고.”
파필리온이 막으려 해도 열매를 사간 사람을 일일이 붙잡고 해명할 수 있을까? 벌을 거미줄로 잡아채는 것보다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 논란이 식기 전에 다른 사건들도 함께 터지면 분명 사람들은 의심할 거야.
윈터가 어닝을 찾아와 첫 번째 점검을 받을 때쯤 칼롱이 28번째 테라리움을 방문해 데이지2에게 의뢰를 받아 갔단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예정된 많은 의뢰금에 혹해 기꺼이 의뢰를 수락했다. 다행히 그는 28번째 테라리움까지 하루도 안 되어서 단숨에 찾아갈 만큼 열정적인 모습을 보였다.
어닝은 부쩍 야윈 윈터를 보며 그의 연금술 완성일을 빠르다면 약 3일 후로 예측했다. 그리고 칼롱에게 말벌로 보고를 들은 바론 내가 요청한 만큼의 열매를 수급하여 16번째 테라리움으로 보내기까지의 기간도 최소 3일이 필요하다고 했다.
3일이면 모든 계획을 충분히 해낼 수 있을까?
밖에 있을 길드원들과 연락하기 위해선 윈터의 도움이 필요했다. 윈터가 연금탑을 오가는 방법도 있지만 그렇지 않아도 내 길드원들을 잡기 위해 혈안일 파필리온의 눈에 히든카드나 다름없는 윈터가 눈에 띄어선 곤란했다.
또한 탐탁지 않긴 해도 그는 연금술에 전념해야만 했다.
윈터가 길드원들과 접촉하는 대신 그 일을 수행해 줄 대타를 구해야 했다. 루프를 만나게 됐던 계기를 떠올리며 윈터에게 연금탑 내에 금전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고 있는 연구원을 찾아 달라고 부탁했다.
“정말 돈이 급해서 절박한 연구원에게 슬쩍 소문을 흘려 줘요.”
내가 잘하는 건 다이아니까 다이아로 걸어 다니는 메신저를 매입하는 거야. 16번째 테라리움 밖에 있는 칼롱의 역할을 안에서 수행해 줄 수행원이 필요해.
계획들을 점검하며 저녁 식사 대용으로 비상식량을 까먹고 있을 때, 윈터가 어닝에게 두 번째 점검을 받으러 찾아왔다. 인체에 직접 행하는 연금술이 무척이나 고된 것을 보여 주듯 윈터는 계속 야위어 갔다. 그는 내가 부탁한 조건에 맞는 사람에 대한 소식도 함께 물어 왔다.
16번째 테라리움의 연금탑은 비밀 연금술이 진행되는 곳이기도 하니 18번째의 연금탑보다 지원이 풍족하여 조건에 맞는 사람을 찾지 못할까 걱정했는데 사람 사는 곳은 다 똑같았나 보다.
연구에 대한 지원을 제쳐 두고라도 사업에 실패한 가족 때문에 큰 빚더미를 떠안아 무척이나 절박한 상황에 처해 있다는 그 연구원은, 큰 다이아를 받을 수 있는 비밀스런 의뢰가 있다고 윈터가 흘린 정보를 덥석 물었다.
어차피 연구원이다 보니 일이 새어 나갈 곳이라 해도 최종 종착지는 연금탑의 최고 학장인 크레아시온이었다. 내가 벌일 일을 어느 정도까지는 묵인하겠단 그의 태도를 확인했기 때문에 연구원을 매수할 생각을 할 수 있었다.
윈터가 어닝에게 새하얗게 변하다 못해 가뭄이 덮친 땅처럼 바짝 말라 갈라지는 손등을 보이며 점검을 받을 동안 나는 찝찝함으로 쓰린 속을 달래면서 열심히 길드원들에게 전할 편지를 썼다.
“손가락 하나 정돈 굳지 않게 조심하렴. 매개체로 너의 피를 이용할 생각이니까. 여차하면 손가락을 찔러 피를 내야 하는데 이렇게 다 말라 버린 장작처럼 굳어 버리면 손목이라도 잘라 내야 하지 않겠니?”
“점점 온몸에 감각이… 사라지는 기분입니다.”
“그건 내 업그레이드된 레시피가 효과적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뜻 같구나.”
귀를 닫으려 해도 쉽지 않았다. 둘의 대화는 내 머릿속에 온갖 상념이 날뛰게 만들었다. 애써 펜을 잡은 손에 힘을 주며 종이에 글씨를 꾹꾹 눌러썼다.
저는 연금탑 안에 잘 있어요. 길드원 여러분들이 무사하다는 사실을 우연한 계기로 알게 되었어요. 정말 다행이에요. 제가 연금탑 밖으로 나가기 위해선 몇 가지 조건들이 필요해요. 저를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전에 제가 찾아갔던 연금탑 뒤쪽의 동산에 있는 검은 세계수의 가지는 땅속을 파고들어 자라나고 있습니다.
소나무들의 과거를 읽는 능력을 이용해서 테라리움 내의 수맥을 찾아 동산의 가지와 연결해 주세요.
검은 가지의 들끓는 열기가 수맥을 만나 테라리움 내의 온도를 올려야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