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인 조직의 간부급이나 되는 사람이 대놓고 작전을 물어보고 있는 상황이었다. 크레아시온 쪽은 쳐다보지도 않는 어닝은 물론 나 역시도 순순히 말해 줄 생각은 없어서 입을 다물었다.
파피루스가 이 빈 연구실에 들어온 순간부터 계속 함께했으니 죄다 들어서 전해 줬을 텐데. 뭘 다시 묻고 있는지.
“테라리움 간의 외교 문제가 얽혀 있으니 어닝과 손을 잡지 않고 처신을 잘했다면 자네는 이 지경까지 오지 않았을 걸세. 28번째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원을 결정하는 경매에서 우리 쪽 사람이 말하기를, 감히 넘보지도 못할 양의 다이아를 28번째 테라리움에 쏟아부었다던데. 분명 어딘가와 협력하는 관계겠지. 그 정도 되는 사람이라면 조용히 16번째 테라리움에서 묵었다가 떠나지 그랬나. 괜히 파필리온을 자극하고 어닝과 손을 잡았을 뿐만 아니라….”
설마 경매에 참여했던 사람 중에 인페르노 사람도 있었던 거야? 어닝과 손을 잡았다는 건 사실이 아니고, 그녀에게 얻어 낼 정보가 있어서 접근했던 것뿐인데.
어쩌다 28번째 테라리움을 인페르노 수장이 노리고 있어서 나까지 위험하다고 휘말리게 되긴 했는데…. 어차피 바곳의 정보를 얻기 위해서도 이 연금탑의 비밀스러운 공간까지 가야 했고. 순전히 내 선택에 의해 이 지경까지 오긴 했지만 ‘처신을 잘했더라면’이라니. 결국 반목하게 될 거였다.
그런데 그 말은 곧 내가 연금탑을 걸어 나가도 위험하진 않을 거란 뜻인가?
“하지만 파피루스의 말론… 종자 보관소를 엉망으로 만들었다지? 그것도 꽤 공들여 준비해 둔 독초들을 말일세. 모든 종자들이 독에 당해 회생 불가능이 되었다고 하던데. 조용히 무마하기엔 자네는 너무 많은 것을 알아 버렸고, 큰일을 저질러 버렸지.”
“당신 말처럼 날 건들면 내 보스가 가만있지 않을 거야.”
내 보스는 당연히 나지만. 그리고 종자 보관소의 독초들이 죽은 건 그쪽 큰 바곳이 선빵 쳐서 그런 거거든요? 파피루스 이 자식, 그 이야기는 빼먹은 거야? 아, 물론 내가 종자 보관소로 가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긴 했다.
“어느 조직과 손을 잡았는진 알 수 없으나 그만한 자금력이라면 만만치는 않겠군. 그분은 28번째 테라리움을 손에 넣기 위해 충분히 인내했고, 이젠 그 한계에 달했다네. 또한 지금까지 자네가 종자 보관소에 저질러 놓은 피해가 그분의 귀에 들어간다면 결국 폭탄이 터져 버리겠지. 그는 걸어 다니는 화마임과 동시에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 같은 존재일세. 자네에게 뒷배가 있다 하더라도 인질로 이용하든 전쟁을 벌이든 모든 상황은 극으로 치닫겠지.”
어닝에게 했듯 내게도 장난 아니게 협박하시네여. 인페르노를 빼도 박도 못하게 공식적으로 적으로 돌렸다고 대놓고 말하지 그러세여.
“하지만 어닝의 결말은 정해져 있지만 자네는 그렇지 않지. 이 연금탑에서 일어난 일들이 아직 그분의 귀에 들어가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자네에겐 기회가 있다는 걸세. 28번째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원의 신분인 자네가 어닝과 함께 연금탑에 있는 것을 알고 있는 자는 단둘뿐이라네. 나와 파필리온이지. 파필리온은 아직 그분께 자네의 정체에 대해 알리지 않았어. 다른 사람들은 어닝의 조력자 정도로만 알고 있지.”
“그래서 어쨌다는 거야?”
“자네가 벌인 일을 어닝과 파필리온이 전부 뒤집어써서 자네를 향한 그분의 관심을 돌릴 수 있다는 걸세. 폭탄이 다른 곳에 터지게 할 수 있다는 거지.”
지금 뭐라는 거야? 파필리온은 댁이랑 한패 아닌가요?
“어닝까진 이해했는데… 파필리온은 왜? 걜 감싸는 건 아니고, 당신이랑 한패 아니야?”
“16번째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원 자리는 원래 내 것이었지. 그를 파면시키고 내가 16번째 테라리움의 주인이 된다면 자네가 한 모든 일을 눈감아 줄뿐더러 자네의 28번째 테라리움에 대한 그분의 관심도 돌려 주도록 하지. 대신 그만큼 파필리온이 단번에 자리에서 물러나도록 할 아주 큰일이 필요하다네.”
어닝을 바라보았다. 저 영감탱이 대체 뭐야?
“호시탐탐 노리더니 결국 그 맹독초들을 반출한 것이 꽤나 크게 책잡혔나 봐?”
어닝이 고소하다는 듯 그를 조롱했다.
“그래. 자네에게 속은 바람에 큰 오점을 남겼지. 그것이 파필리온의 입지를 단단하게 굳혀 줘 버렸어. 그러니 내 오점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파필리온을 궁지로 몰아주길 바란다네.”
크레아시온은 즐거운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꽤 대단한 일을 계획하고 있다지? 정말로 과수원의 세계수 가지를 몇 년을 기다릴 필요 없이 단기간에 죽일 수 있는가?”
“가능해. 당신이 재료와 시설을 아낌없이 내준다면. 하지만 당신에게 이득이 되려는 일을 하자니 배알이 꼴리는데?”
“물론 난 절대 직접적으로 당신들을 도와주지 않을 걸세. 내가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이 조금이라도 들킨다면 곤란하지. 그저 그분께 지금 여기서 진행되는 모든 이야기와 관련된 비밀을 지키고, 당장 자네들의 위치를 신고하지 않고 방관하는 것이 내가 해 줄 수 있는 전부라는 것을 알아 두게나.”
내가 연금탑을 나가는 건?
“물론 자네는 연금탑 밖으로 나가는 즉시 파필리온에게 위치가 노출되겠지. 허튼짓하려는 낌새가 보인다면 그는 결국 그분께 모두 말할 걸세. 부디 타이밍을 잘 맞추길 바라네.”
내 속마음은 어찌 읽었는지 크레아시온이 말했다. 그는 못마땅해하는 어닝에게서 벌레에 대한 여러 이야기와 내게 아직 구체적인 계획은 없음을 듣고는 순순히 자리를 떠났다.
현재 어닝의 레시피 대로 연금술을 진행하고 있는 윈터 역시 저지하지 않고 내버려 두겠다고 말하며.
그가 떠나려고 하기 전 내 길드원들에 대한 안부를 물었다. 혹시나 알까 해서.
다행히 파필리온에 의해 구금된 사람은 없다고 했다. 크레아시온의 말에 따르면 파필리온은 인페르노 수장이 16번째 테라리움에 도착하면 인질로 내보이기 위해서 내 길드원들의 신변을 먼저 노릴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아직 그렇지 못했다는 것은 이리스와 제퍼가 루프를 잘 챙겨서 다른 길드원들과 합류했다는 거겠지.
정말 다행이었다. 연금탑 안에 갇혀 있는 내내 걱정이 되었던 길드원들이었다. 정말 게임처럼 길드 채팅이라도 되면 좋을 텐데, 이놈의 되는 것 빼고 다 안 되는 신기한 세계는 벌을 이용해 메시지를 보내는 것이 고작이다.
걱정거리가 줄었다는 것은 앞으로의 계획에 좀 더 집중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크레아시온은 정말로 우리가 숨어 있는 장소를 묵인해 줄 생각인지 그가 떠난 후로 누군가 들이닥치거나 하진 않았다. 다만 떠나기 전 감시용으로 쓸 모양인지 파피루스를 두고 갔다.
파피루스는 자신이 했던 일이 있기에 전보다 더 위축되어 빈 연구실의 구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하기 꺼림칙한 일이더라도 주인이 시키니 어쩔 수 없었던 듯했다.
“크레아시온, 그 늙은이가 작정하고 있으니 내 금은화를 찾은 후도 문제야.”
어닝은 가방에서 종이를 꺼내 펜으로 무언가를 쓰더니 내게 보여 주었다.
28번째 테라리움에서 잠깐만 날 보호해 줘. 보호는 날 데리러 1번째 테라리움에서 지원이 올 때까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