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7화 (147/604)

“꽃들 사이에서 도는 괴담이라…. 그건 나도 궁금하구나.”

어닝이 무척 흥미롭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갑자기 루프가 말했던 괴짜 연금술사들은 소재를 얻기 위해 주점이나 도박장을 전전한다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세계수의 가지도 기꺼이 망가뜨릴 정도의 인간이 여기서 소재를 얻어 버리면 안 되는데.

나 혼자만 이야기를 듣게 엘더만 아티팩트로 돌려보내려 했다.

“당신이 무슨 불순한 연금술을 만들어 낼 줄 알고 이걸 들려줘?”

어닝은 날 어이없다는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나도 드루이드란다. 꽃들 사이에서 유명한 괴담이라면 내 꽃들도 모를 거란 보장은 없지 않니?”

“제길….”

엘더는 어닝을 못마땅한 눈으로 바라보며 목소리 크기를 낮추어 내게 속삭이듯 말했다. 어차피 연구실은 좁아서 다 들리는데, 어닝에 대한 자기 나름의 반항이었다.

“아주 오래전에 지금의 세계가 있기 전, 세계가 한 번 멸망했었는데 그때 이런 일들이 일어났다고 했어. 그리고 일들이 일어난 순서도 있다 했고.”

물론 거짓말이겠지만, 엘더가 자신은 더 이상 그런 말은 믿지 않는다는 것을 애써 어필하며 말했다.

첫째, 해가 보이지 않는데 세상은 불 속에 있는 것처럼 뜨겁다.

둘째, 하늘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검은 비가 쏟아져 머리가 낮은 꽃들이 모두 검은 물속에 잠긴다. 그 물은 영양가가 없어 뿌리가 아무리 빨아들여도 식물은 시들어만 간다.

셋째, 세계수의 가지에서 다 익지 않은 열매들이 비처럼 떨어진다.

넷째, 큰 지진에 지반이 뒤집히고 세계수가 오랜 세월 땅속 깊이 묻어 둔, 죽일 수 없는 병해충이 들끓는다.

다섯째, 기어 다니는 생물부터 날아다니는 생물까지 모두 쓰러져 세상엔 움직이는 생물이 없게 된다.

여섯째, 더 이상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지 않으며 결국 세계수 홀로 세상의 마지막을 보게 된다.

꽤나 구체적이었다. 6단계나 된다는 것에 놀라웠고, 이걸 어떻게 이용해 먹어야 하나 절로 한숨이 나왔다.

오랜 시간을 고민했다. 당연하게도 어닝은 같이 고민해 주지 않았다. 틈틈이 아티팩트를 통해 28번째 테라리움을 보며 시간의 흐름을 파악했다. 밖에 있을 길드원들 걱정도 더해져서 구석에 자리하고 있던 파피루스가 갑자기 부산스럽게 연구실을 돌아다니는 것도 신경 쓰지 못했다.

어차피 데이지의 줄기에 묶여 있기도 하고, 오랜 시간 가만히 있어서 좀이 쑤시나 보다 하고 넘긴 것이 실책이었다.

그는 한 지점에서 멈춰 서서 벽에 몸을 바짝 붙인 채 몸을 숙이더니 화색이 되어 말했다.

“아, 이쯤이면 다행히 느낌이 오네. 도통 방 밖으로 나오질 않으시니.”

그 말에 고개를 돌렸을 땐, 그는 이미 빛 무리에 감싸인 상태였다. 데이지가 황급히 줄기를 당겼으나 파피루스는 온데간데없이 줄기만 덜렁 끌려왔다.

“헐! 뭐야?”

“주인이 있는 드라이어드임에도 불구하고 왜 아티팩트로 돌아가지 않나 했더니 높이 때문에 거리가 충분하지 않았던 거였군요.”

메스키트의 말에 피가 싹 식는 기분이었다. 파피루스 자식, 우리가 여기 숨어 있다는 걸 알잖아? 주인에게 돌아가서 이 사실을 알린다면…. 망했다!

“튀어야 돼! 어쩌지? 종자 보관소로 돌아갈까? 아냐, 거기도 들킬 텐데.”

“정말 허술하구나. 연금탑에 주인이 있는 드라이어드를 그렇게 무방비하게 내버려 뒀다는 거니? 덕분에 나까지 위험해졌잖아.”

“당신이 16번째 테라리움에 찾아오는 바람에 도화선에 불붙은 거 아냐? 여길 나가면 이젠 어디로 가야 되지? 하필 윈터도 지금 자리에 없는데. 무턱대고 돌아다니기엔 밖에 경비가 너무 많이 돌아다니는데.”

메스키트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랜스를 들었다. 그녀는 파피루스가 몰고 온 경비들이 문을 열고 들어오면 전부 해치워 버릴 심산으로 보였다.

정말 이젠 전면전밖에 남지 않은 건가? 지금이라도 종자 보관소로 돌아가서 전부 망가뜨려 버릴 거라고 깽판이라도 치면? 아니 그전에 성공적으로 종자 보관소에 도착한다 하더라도 다시 바곳을 앞세워 들어갈 수 있긴 한 걸까? 관리하는 파피루스도 없는데.

연구실에 남을지 어디로든 움직일지를 머리 깨지게 고민하던 때였다.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철컥, 하고 열리는 소리가 났다. 윈터일까? 아니면 파피루스가 데려온 사람들일까?

어닝마저 드라이어드들을 불러내며 모두가 곧 벌어질 전투에 대비하여 신경을 곤두세웠다.

“이곳입니다.”

파피루스의 목소리였다. 많은 사람들을 데려올 거란 예상과 달리 파피루스와 단 한 사람만이 문을 열고 나타났다.

“당신은….”

어닝의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그녀가 아는 인물 같았다. 설마 저 사람이 인페르노의 수장인 건가? 파피루스의 주인으로 보이는 사람은 키가 크고 호리호리한 체형의 노인이었다.

파피루스와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는 남자는 무기는커녕 전투에 어울리지 않는 밤색 정장을 입고 있었다. 방심한 틈을 타 아티팩트에서 드라이어드들을 꺼내려는 건가?

“오랜만이군. 날 속인 이후로 이렇게 이야기를 주고받는 건 간만이지 않나? 델어닝. 아니 이젠 어닝이라 해야겠군.”

“크레아시온….”

크레아시온? 어디서 들어 본 이름 같은데….

그는 전투 기세를 흉흉하게 뿜어내는 메스키트를 보다 날 바라보며 말했다.

“섣불리 드라이어드에게 공격을 명령하지 않는 것이 좋을 걸세. 난 언제든지 탑 전체에 이곳 위치를 알릴 수 있으니. 다만 평생을 종자보관소를 관리할 것을 일러둔 내 드라이어드가 명령을 어기고 함께 들고 온 이야기가 흥미로워 기회를 주고 있는 것일 뿐일세. 그래, 그 이야기나 해 볼까?”

그는 정말로 전투 의사가 없다는 것을 온몸으로 보여 주듯 느린 걸음으로 걸어와 의자에 앉았다. 파피루스는 주인에게 바짝 붙어 이곳을 향해 경계의 눈빛을 보냈다. 당장 사람들이 쳐들어오지 않는 것을 다행이라고 여겨야 하나? 무슨 이야기를 하자는 거지?

“저 할아버지 뭐 하는 사람이야?”

답을 기대하진 않았지만 어닝에게 슬쩍 물어보았다. 분위기상 인페르노의 수장은 아닌 것 같은데.

“그는 이 연금탑의 최고 학장이란다.”

“헐….”

그럼 완전 높은 사람 아냐? 연금탑의 일개 연구원인 윈터와 다르게 최고 우두머리가 지금 여깄다는 거잖아.

“어닝과 함께 있는 것을 보면 자네가 28번째 테라리움의 새로운 행정 관리원이겠지. 그리고 그 드라이어드가 어닝이 날 속여 28번째 테라리움으로 빼돌린 각시투구꽃 개량종 중 하나겠군.”

크레아시온은 우리 바곳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뭘 봐요. 그렇게 쳐다봐도 우리 애는 절대 안 줄 거거든? 내게서 바곳을 뺏어가려 한다면 무조건 전쟁, 바로 전쟁이다.

그나저나 어닝이 연금탑 최고 학장을 속여서 맹독초들을 빼돌렸다고? 뭔가 이상한데? 어닝을 바라보자 무뚝뚝하게 굳어진 얼굴이 보였다.

“속은 사람이 잘못이지.”

속인 사람치고 어닝은 되려 퉁명스럽게 말을 내뱉었다.

“그렇다네. 당신이 다른 마음을 품었을 거라곤 추호도 의심 못 한 이 늙은이의 잘못이지. 하지만 자네의 변심이 우리에게 얼마나 막대한 손실을 끼쳤는지 알고나 있는지 모르겠군. 자네라는 인재를 잃는 것도 아쉽긴 하나 세상엔 자네만큼 비상한 두뇌를 가진 사람은 얼마든지 있으니 크게 아쉬울 건 없지.”

28번째 테라리움에서 보좌관으로 사기를 치더니 이젠 같은 편인 16번째 테라리움의 연금탑 최고 학장에게도 사기를 쳤다고? 대체 뭐 하는 사람이야?

세계수의 가지를 벌레로 병들게 한 어닝이 그 벌레를 퇴치할 수 있는 각시투구꽃 개량종을 요구했다고? 한 송이만 있었어도 스케어크로우가 살 수 있었다고 외치던 그녀. 너무 상반된 행동에 도통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덕분에 28번째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원이 바뀔 때까지 손 놓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가 내게 들으란 듯이 바라보았다. 바곳뿐만 아니라 28번째 테라리움도 못 준다.

“파라다이스 테라리움의 계획도 차질이 생겼지. 무슨 뜻인지는 알고 있겠지? 그분은 자넬 당장 죽이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않을 걸세. 자네가 보는 앞에서 자네가 소중히 여기는 꽃들을 하나하나 불태울 테지. 이 세상에 자네가 마음 준 모든 것을 태우고 나서야 천천히, 아주 고통스럽게 자넬 태워 죽일 걸세.”

어닝은 눈을 매섭게 뜨며 이를 악물었다. 그분은 인페르노의 수장을 말하는 건가?

“내게서… 내게서… 고귀한 검은 꽃을 빼앗아 가고도 감히 그런 말을…. 내 것들을 또다시 쉽사리 넘겨줄 것 같아?”

그녀는 메스키트에게 극락조화가 상처 입었을 때처럼 분노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반면 크레아시온은 시종일관 무미건조한 눈빛으로 그녀를 덤덤히 바라볼 뿐이었다.

“아, 그래. 블랙 엉겅퀴 말이군. 그것이 파필리온의 블랙 엉겅퀴를 활짝 피게 만들었지. 어찌나 저항이 거센지 포레스트는커녕 반 죽여 놔서 거름으로나 겨우 썼다 했던가.”

참지 못한 어닝이 한 발 내디디며 그녀의 드라이어드들이 전투태세를 취하자 크레아시온이 아티팩트가 채워진 손을 들었다.

“자네의 나머지 꽃들과의 이별도 앞당기고 싶지 않다면 신중하게 생각하는 것이 좋을 걸세. 말했듯이 난 지금은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이 자리에 왔을 뿐이니.”

어닝을 저렇게까지 몰아세우다니. 꼬장꼬장해 보이는 노인네인데 대단했다. 괜히 연금탑 최고 학장이 아닌가 봐. 아니, 괴짜 연금술사들 사이에서 짱을 먹으려면 저 정도는 해야 된다는 건가?

아니, 잠깐. 그러고 보니… 어닝에게도 파필리온처럼 블랙 엉겅퀴 드라이어드가 있었다는 건가? 자신의 드라이어드는 엄청 소중하게 여기는 그녀인데, 그 드라이어드가 지금 파필리온의 블랙 엉겅퀴에게 거름으로….

아무리 못된 어닝이라 해도 드라이어드가 거름으로 죽은 것은 동정해 줄 수밖에 없었다. 우리 데이지가 하얀 데이지 드라이어드를 거름으로 삼았던 장면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대체 어쩌다가 드라이어드가….

어닝이 메스키트에게 공격받았지만 이젠 말끔하게 치료된 극락조화의 팔을 꼭 끌어안고 눈을 감아 분노를 삭이는 것이 보였다.

“자, 그럼 이야기해 봅세. 내 파피루스가 들은 바론 16번째 테라리움의 세계수 가지를 빠른 시일 내로 죽일 방법을 알고 있다고 했다던데.”

과거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파피루스 귀를 틀어막고 간수를 잘했을 텐데.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