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6화 (146/604)

어닝이 한심하단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그럼 어떻게 할 거니? 세계수의 축복이 건실한 이곳에 28번째 테라리움을 멸망시켰던 것과 같은 거대한 불이라도 불러올 거니? 그렇다면 그 거대한 불은 어떻게 만들 생각인 걸까? 애초에 주변의 모든 불을 불러 모아 응집시킬 수 있는 내 라다니페르 꽃 같은 애를 갖고 있긴 한….”

그렇게 말하던 어닝은 별안간 입을 다물었다. 무슨 꽃이라고? 어닝이 가지고 있는 세 드라이어드 외에 아직 찾지 못한 다른 드라이어드를 말한 걸까?

“그래서 어떤 좋은 방법이 있다는 거니?”

어닝은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척 표정을 바꾸고 능청스럽게 물었다. 음, 방법이… 없지. 나도 애초에 어닝이 만들었다는 그 하얀 벌레를 가장 먼저 떠올렸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윈터를 이용하고 싶진 않았다.

“제가 돕겠습니다. 제가 어닝 님께서 시키는 대로만 하면… 금은화 드라이어드를 구할 수 있는 것이 맞습니까?”

“헐…. 그렇게까지 할 필요 없어요. 그러잖아도 좋지 않은 몸에 뭘 또 하려는 거예요? 저 인간이 시키는 일이 결코 몸에 좋을 게 없는 것이 분명한데.”

“말씀처럼 이미 좋지 않은 몸에… 곧 죽을 몸이니… 제가 희생하여 금은화 드라이어드를 구해 낼 수 있다면 기꺼이 하겠습니다. 어차피 금은화가 아니었다면 전… 진작 죽었을 몸이니까요.”

“사람이 왜 그렇게 극단적이에요? 분명 다른 방법이 있을 거예요!”

“아니요. 세계수의 유일한 천적이 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불뿐입니다. 하지만 또 다른 천적을 만들어 낸 위대한 어닝 님의 연구를… 몸소 이어받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죽기 전 업적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아니, 업적이요…?”

윈터의 말에 어닝이 무척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진짜 악마 같은 사람이다.

내 만류에도 불구하고 윈터는 어닝에게서 레시피를 받아 냈다. 어닝이 가방에서 꺼낸 레시피라는 물건은 종이나 수첩 같은 것이 아닌 다양한 빛의 광택이 나는 네모난 판때기였다. 자세히 보기도 전에 그걸 챙긴 윈터는 내가 붙잡기도 전에 연구실을 나가 버렸다.

아무리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사람이라도 그런 식으로 도움받고 싶지 않다는 내 말에 의견을 철회하는 일은 절대 없을 거라는 듯이. 아픈 탓에 항상 힘이 없어 보였던 그는 심지어 의욕이 철철 넘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연금술사는 물론 이를 목표로 하는 연구원들은 왜 이렇게 하나같이 인간으로서의 핀트가 하나씩 어긋난 느낌이지? 내가 이런 사람들만 골라 만나는 걸까? 굿이라도 해야 하는 거 아냐?

윈터는 금은화를 위한 선의라고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저런 식으로 행동하는 게 어딨어. 정말 금은화를 생각한다면… 동산에서 금은화가 윈터에게 보였던 태도를 생각한다면, 그 드라이어드는 윈터가 이런 선택을 한 것에 대해 결코 좋아하지 않을 것이 분명해 보이는데.

“저 레시피는 28번째 테라리움에 사용했던 벌레의 원본이라서 강화가 필요해. 저 남자는 다시 이곳으로 돌아와 지속적으로 내게 레시피를 추가 받아야 해. 감히 나도 시도할 생각도 못 한 인체와 연금술의 결합이라니. 살아 있는 생명체에 연금술을 시도하는 것은 여태 벌레 정도가 고작이었는데 요즘 후발 세대들은 정말 과감하고 열정적이로구나. 내 세대의 연금술사들은 이제 곧 밀려날 수도 있겠어.”

아무리 지능캐가 끌린다 하더라도 연금술사란 직업에 대해서 이번 일로 인식이 확 바뀌었다.

내가 그런 사람들만 봐 와서 그럴진 몰라도, 그들은 꼭 SF 공포 스릴러 게임에서 특별한 악의 없이도 연구에 대한 열정만으로 세계를 멸망시키는 악의 조직같이 느껴졌다.

“그가 이곳 연금탑 소속의 연구원인 것만으로도 출입엔 제한이 없겠지. 자, 그럼 과수원의 세계수 가지를 병충해로 죽이는 것 외에 너의 다음 계획은 뭐니? 가장 중요한 건, 연금탑을 어떻게 안전하게 나갈 생각이지?”

어닝의 질문에 쉽사리 답을 하진 못했다. 오히려 내가 묻고 싶을 지경이었다. 여길 어떻게 나가지? 그러고 보니 그녀가 전에 헤어지기 전 그런 말을 했었지.

“전에 당신이 갑자기 테라리움에 큰 폭발이 일어나서 모든 인력을 그쪽에 집중시키면 나갈 수도 있다고 했지?”

“그렇게 말하긴 했었지. 하지만 말이 그렇다는 거지. 고작 연금탑에 갇혀 있는 당신이 어떻게 큰 폭발을 낼 생각인데?”

“굳이 폭발처럼 큰 사고를 낸다는 뜻이 아니야. 그럼 사람들이 위험해지기도 하고.”

“그래. 당신처럼 무척이나 도덕적인 인간이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나 있겠어.”

어닝은 ‘당신처럼’이란 말을 유독 강조하며 빈정거렸다. 내가 보편적인 인간 디폴트 아냐? 오히려 세계수의 가지를 죽이고 28번째 테라리움을 망쳐 놓은 것을 덤덤하게 서술한 당신이 이상한 사람이잖아.

“폭발에 비견될 만큼 큰일이 16번째 테라리움에 일어나면….”

나는 핸드폰을 꺼냈다. 빛을 받아 반짝이는 벌집 같은 육각형 홀로그램들이 자리한 핸드폰 화면을 보며 고민했다. 그리고 어닝에게 무한 다이아 외에 내가 발휘할 수 있는 히든 스킬을 심사숙고 끝에 털어놓았다.

“난 사람들이 벌을 통해 보내는 메시지에 간섭할 수 있어. 내용을 왜곡해서 바꿀 수 있고, 없애 버릴 수도 있어. 이미 16번째 테라리움 내의 거의 대부분의 벌들이 내 영향 안에 있으니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든지 실행할 수도 있어.”

어닝은 무척이나 흥미롭다는 눈을 했다.

“설마 그게 당신의 가드닝 스킬이라곤 하진 않겠지? 물론 이곳이 당신의 테라리움은 아니지만.”

“연금술을 이용한 기술이야.”

그녀는 원리를 궁금해했지만 필라와 루프의 합작인 것은 굳이 말해 주지 않았다.

“이곳 연금탑의 비밀을 벌을 이용해서 퍼뜨릴 거야. 그럼 대혼란이 일어나겠지. 이 정도면 폭발에 비견되는 큰 사건 아닐까?”

“꽤나 머리는 굴렸는데…. 후후후.”

낮게 웃는 그녀의 웃음은 듣기만 해도 기분이 안정되는 메스키트의 웃음과 판이하게 달랐다. 그녀는 재밌는 농담이라도 들은 것처럼 굴었다.

“뭐, 동시에 다수가 같은 내용의 메시지를 받으면 혼란이 일어나긴 하겠지. 하지만 16번째 테라리움은 나비 새끼의 수완으로 대외적으로 매우 이미지가 좋은 곳이란다. 잠깐이나마 반발 세력이 생기겠지만 순식간에 사그라들겠지. 어떤 증거도 없으니까. 결국 악의적인 뜬소문 정도로 여겨질 거야. 괜히 10번대 테라리움의 위용이 아니지.”

앞 번대 테라리움은 번호만으로도 신뢰의 상징이 되는 거구나.

“테라리움엔 거미줄이 존재하는 걸 모르진 않겠지? 사태가 파악되면 모든 벌들이 거미줄로 걸러질 거야. 당신이 왜곡한 메시지로 인한 사태가 금방 진압될 수 있다는 뜻이야.”

젠장, 나름대로 머리 좀 굴렸는데 이렇게 박살 나다니.

“하지만 사람들이 당신의 메시지를 신뢰하게 할 만한 장치가 있다면 또 모르지. 정말로 큰 혼란이 일어나서 당신이 연금탑을 안전하게 빠져나가는 찰나의 틈을 마련해 줄 수도.”

“신뢰하게 할 만한 무언가….”

내가 벌을 이용해 사람들에게 폭로하려고 한 연금탑의 비밀은 인공 개량에 대한 것이었다. 나는 체감이 잘되지 않지만 드라이어드들은 세계수에 대항하는 끔찍한 일, 자연의 이치에 어긋나는 금지된 일이라며 무척이나 분노했다.

그렇다면 이 일을 알게 된 다른 사람들도 마땅히 16번째 테라리움의 연금탑에서 금기시되는 일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에 분노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어닝의 말처럼 아무런 증거도 없고, 심지어 대외적으로 이미지도 좋은 16번째 테라리움이니 단순 스팸 메시지 취급을 당할 확률이 높긴 했다. 사람들이 메시지 내용을 신뢰할 만한 장치….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인공 개량은 세계수의 힘을 위반하는 것… 세계수는 신적인 존재… 그럼 인공 개량은 신성 모독이 되는 건가? 신성 모독에 대한 이야기의 결말이 보통 어떻게 되더라? 신에 의한 세계 종말, 그런 느낌이려나? 마인드맵처럼 생각이 줏대 없이 뻗어 나가다 갑자기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엘더, 전에 설익은 열매를 보고 했던 이야기 기억나? 메스키트가 엘더 같은 꼬맹이들 겁주려고 성목들이 하던 괴담이라고 말했던 거 같은데.”

“겁 안 먹었어!”

엘더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 아닌데. 그때 너 표정 꽤나 굳어 있었는데.

“설익은 열매는 보통 가지에서 따지 않는 이유가 있다고 했잖아.”

“아주 오래전에 세계가 멸망할 때 세계수의 가지에서 다 익지 않은 열매들이 비처럼 떨어질 거라는 이야기?”

“그래, 그거! 그런데 그거 유명한 이야기야?”

엘더는 메스키트를 힐끔 쳐다보더니 내게서 시선을 피했다. 조금 부끄러워하는 것 같기도 했다. 대답은 메스키트가 대신했다.

“어린 묘목들을 겁주기엔 좋은 괴담이라 자주 이야기된답니다. 세계수를 지키는 일에 대해 설명할 때도 꽤 유용한 수단으로 쓰고 있어요. 세계수에서 태어난 대부분의 드라이어드들은 알고 있을 거랍니다. 성목들이 묘목일 적에 들은 이야기를 다시 묘목들에게 전하며, 그렇게 대를 이어서 계속 내려오는 괴담이라서 모르는 드라이어드들이 거의 없을 정도랍니다. 이 정도면 답변이 되었나요?”

“그러고 보니 저도 들은 적 있어요. 저는 성목에게 직접 듣기보단 같은 또래의 묘목들 사이에서 퍼진 이야기를 전해 들은 정도지만.”

“음, 괴담이란 본디 시대의 흐름에 따라 조금씩 변화하기 마련이나 세계 멸망에 대한 괴담은 역사적으로도 변화 없이 대대로 내려오고 있긴 합니다.”

메스키트의 말에 데이지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심지어 내내 조용히 사태를 관찰하던 파피루스도 거들었다. 하도 조용히 구석에 찌그러져 있어서 존재를 잠깐 잊었다. 세계수에서 태어나지 않은 바곳만이 시무룩한 표정이었다.

내가 어렸을 때 할머니께 들었던 밤에 피리 불면 뱀 나온다는 이야기나 화장실의 빨간 휴지, 파란 휴지 괴담 같은 느낌인가?

세계 종말까지 생각이 도달했을 때 여러 재난 영화나 게임에서 다룬 둠즈데이 소재가 떠올랐다.

신의 계시에 따른 종말 징후들이 연이어 터지고 끝내 인간의 힘으로 막을 수 없는 재앙이 도래하는 것. 딱히 종교가 있진 않지만 한땐 그런 소재에 빠져서 종말 징후에 대해 열심히 찾아보기도 했다. 나일강이 피로 물든다거나 개구리 비가 내린다는 등의 이야기들.

만약 16번째 테라리움에서 신성 모독적인 일을 벌여서 세계수에 의해 벌을 받는 징후들이 실제로 일어나면, 사람들이 메시지를 신뢰하지 않을까? 인공 개량으로 인해 테라리움이 대가를 받는다는 느낌으로.

물론 세계수의 가지에서 익지 않은 열매들이 비처럼 떨어지게 만드는 일을 하진 못하지만 그걸 떠올릴 만한 상징적인 일들이 터지면…. 미라 나오는 영화에서도 악당이 이집트에 재앙을 내릴 때 분수의 물이 갑자기 피처럼 빨갛게 물드는 등의 장치를 사용했으니까….

“혹시 열매 떨어지는 것 외에 다른 이야기는 더 없었어? 세계가 멸망할 때 일어난다는 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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