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5화 (145/604)

어닝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는 길은 윈터와 함께했던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넓은 연금탑에 사람 그림자 찾기 힘들었던 전과 달리 이젠 조를 이루어 돌아다니는 무리들이 보였다.

다들 기세가 흉흉했다. 보안 단계가 상향된 것이다. 지금까지 잡히지 않고 연급탑을 돌아다닌 것은 순전히 운이라는 것을 증명하듯 복도 코너마다 대기 중인 사람들을 보며 마음을 졸였다.

파피루스를 내비게이션으로 택한 것은 천만다행이었다. 연금탑 설계도까지 훤히 꿰고 있다던 그는 비인간적인 루트를 통해 어닝이 있는 곳까지 안내했다.

이삿짐 박스만 한 폐기 운반용 수동 승강기에 한 명씩 몸을 구겨 타거나 환풍구 뚜껑을 뜯어내고 방을 넘거나, 급기야 내 허리를 묶어 이상한 방에 던져 넣었던 줄기가 이동한 통로까지 이용했다.

파피루스가 통로 입구에 달린 작은 패널을 이용해 줄기의 움직임을 멈춘 덕에 이용할 수 있었다.

저 줄기도 어떤 드라이어드의 일부일까? 아니면 연금술의 산물인 걸까?

팔다리가 다 자라지도 않은 유치원생 때 내복 입고 문틀을 타고 오르던 감각을 쥐어짜 내며 수직으로 하강하는 통로를 바들바들 떨며 내려갔다.

데이지의 도움을 받고 싶었지만 파피루스를 끌고 내려오는 그녀에겐 너무 번거로운 일이 될 것 같았다. 개미굴을 엉금엉금 이동하는 개미들처럼 비교적 체구가 작은 우리 넷은 아주 천천히 아래층으로 향했다.

통로를 겨우 빠져나왔을 땐 온몸이 쑤셨다. 통로 벽에 기대어 몸을 지탱했던 등은 욕창이 생긴 듯 찢어질 것처럼 아팠고, 하얀 데이지 드라이어드에게 거하게 얻어맞아 내구도가 떨어진 배 근육은 힘 줄 때마다 아파서 기절하는 줄 알았다.

후들거리는 팔다리를 주무르며 파피루스를 노려보았다. 저 새끼 일부러 나 엿 먹이려고 제일 이상한 곳으로 안내하는 거 아냐?

“왜… 왜 그런 눈으로 보시는 겁니까?”

데이지에게 짐짝처럼 끌려다닌 파피루스 꼴도 여간 말이 아니었기에 일단 봐준다.

그를 데이지의 줄기로 묶어 둔 것도, 위협용으로 바곳을 옆에 붙여 둔 것도 아주 잘한 선택이었다. 파피루스가 좀 더 민첩하고 강했다면 우릴 찾으러 돌아다니는 무리들을 향해 도와달라고 뛰쳐나가는 돌발 상황이 얼마든지 발생할 수 있었다.

어닝이 있는 빈 연구실로 간신히 돌아왔다. 자신의 연구실로 돌아갔을 줄 알았던 윈터가 문을 열어 주었다.

저 멀리 복도 코너에서 순찰 중인 인기척이 느껴져 황급히 연구실 안으로 들어가자 어닝의 못마땅한 표정이 날 반겨 주었다. 역시 메스키트와의 일로 감정이 팍 상해 있을 것 같았어.

“여긴 또 왜 온 거니? 또 내 소중한 꽃에 상처를 입히려고?”

어닝은 날 흘겨보며 툭툭 내뱉었다. 아티팩트에서 메스키트와 엘더가 튀어나오자 눈에 어린 살기는 더 진해졌다. 그녀의 극락조화 드라이어드는 보이지 않았다. 아마 아티팩트로 돌아가 쉬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인동덩굴… 금은화 드라이어드를 구할 방법을 알아 왔어.”

그 말에 그녀는 눈을 빠르게 깜박이며 입술을 깨물었다. 꼬고 있던 다리를 풀고 단번에 자리에서 일어나 나와 가까운 책상에 기대어 섰다. 나라는 존재는 무척 거북하게 느껴지나 내가 제안할 금은화 구출에 대한 실마리는 무척 기껍겠지.

“그게… 정말이니?”

“하지만 그러려면 내가 금은화가 있는 동산으로 가야 해.”

“그럼 당장 가지 않고 뭐 하니?”

어닝은 여기저기 튀어나와 정리가 되지 않은 은발을 쓰다듬어 내리다 땋아 묶으며 여상히 말했다. 내가 나가서 타 죽든 말든 상관없으니 알아서 하란 태도.

“그거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그 모습에 꼭 자신의 극락조화 드라이어드가 당한 것처럼 나도 어디 가서 똑같이 다쳐 왔으면, 하고 바라는 것 같았다. 내가 하얀 데이지 드라이어드에게 크게 걷어차인 걸 알면 좋아하겠지?

“나만 동산에 간다고 해결되는 건 아니야. 내가 꼭 동산에 가야 하는 건 맞지만 조건이 하나 더 필요해.”

“빙빙 돌려 말하지 말고 말해 주렴. 그래서 어떤 도움이 필요하다는 거니? 날 다시 찾아올 정도면 나 역시도 안전을 포기하고 연금탑 밖으로 나가야만 하는 일이겠지. 내 소중한 금은화를 되찾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전에 내가 죽어 버리면 의미 없지 않겠니?”

“16번째 테라리움의 세계수 가지가 내게 해야 할 일을 알려 줬어. 정확히는 꿈을 꾼 거지만.”

꿈 이야기를 할 땐 조금 망설였다. 어디서 개꿈 꾸고 와서 헛소리한다고 할까 봐.

확실히 드루이드라곤 해도 일개 인간이 이 세계의 초월적인 존재와 꿈에서 소통을 한다는 건 조금 허황된 이야기 같은 느낌이었다. 현실 세계에서만 해도 꿈에서 신이 계시를 내렸다고 하면 사이비라고 매도당하기 십상이니까.

이전에 바곳을 영입할 때 내게 설익은 열매를 주었던 일 등을 이미 겪었던 내 드라이어드들에겐 전례가 있으니 사실이란 것은 알 테지만.

“꿈속에서 세계수의 가지와 이야기를 했다고…?”

다만 어닝의 태도는 내가 예상했던 것과는 조금 달랐다. 그녀는 비웃기보단 정말로 놀란 얼굴이 되었다. 한참을 날 가만히 주시하던 그녀가 이내 빈정거리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

“그래…. 당신의 어떤 점이 그렇게 고귀하기에 잘나신 세계수가 친히 꿈까지 찾아왔는지 정말 모르겠지만. 어딜 봐도 크로우만큼 잘난 곳은 없어 보이는데.”

또, 또 시작이다. 스케어크로우와 비교하기.

속이 부글부글 끓는 것을 참으며 꿨던 꿈에 대해 이야기했다. 고통스러워하는 검은 나뭇가지와 자신을 죽여 줄 것을 요구하던 하얀 나뭇가지에 대해.

꿈을 그대로 해석하면 현재 과수원에 있을 건강한 나뭇가지를 리타이어시켜야 하는 건데,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건 경력 있는 어닝이 해야지.

자신의 죽음을 바라는 세계수의 가지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드라이어드들은 크게 동요했다. 파피루스는 달라도 드라이어드들은 세계수를 지키기 위한 존재. 그런데 이 자리에서 세계수의 가지를 죽이는 것에 관한 논의가 시작되고 있었다.

“정말 세계수의 가지가 그러길 바랐단 말이야?”

눈살을 찌푸리며 묻는 엘더에게, 내가 행여라도 실수를 할까 봐 꿈에서 나온 대화를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전부 전달해 주었다. 죽인다는 것이 비유적인 의미일 수도 있으니 지능캐들이 알아서 해석 좀 해 달라는 입장이었다.

어닝은 내 이야기를 다 듣고 아주 담담히 말했다.

“그래? 그렇다면 세계수의 가지를 죽이면 내 소중한 금은화를 데려올 수 있다는 거네. 얼마든지 전과 같은 방법을 사용해 줄 수 있지.”

메스키트는 분노했지만 전과 달리 이건 세계수의 가지가 직접 원하는 일이라 그런지 랜스가 앞질러 나가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문제가 있단다. 운 좋게 16번째 세계수의 가지에 벌레를 풀어 놓는 것에 성공했다 치더라도…. 28번째 테라리움에 사용했던 방법처럼 벌레를 풀면 세계수의 가지가 힘을 잃고 시들 때까지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리지. 몇 년이 될지도 모르는 시간 동안 이 연금탑 안에서 때를 기다리길 원하니?”

“그건 그래.”

스케어크로우의 일지에 오랜 기간에 걸쳐 서술된 절망들이 떠올랐다.

“더구나 이곳은 스케어크로우가 관리하던 28번째 테라리움보다 더 많은 다이아를 수급 가능한 곳이란다. 세계수 가지의 저항력이 훨씬 높을 테지. 병충해에 잠식당하는 것은 몇 년이 아닌 몇 10년이 될 수도 있단다.”

“그런데 당신 말만 들으면 기회만 된다면 언제든지 벌레를 풀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때 사용했던 벌레를 아직도 당신이 가지고 있어?”

다 타 버린 28번째 테라리움의 과수원의 바닥에 굴러다니던 것들이 떠오르자 절로 인상이 구겨졌다. 그 끔찍하게 징그러운 하얀 벌레들을 여전히 가지고 다닌다고 하진 않겠지?

그녀는 말없이 어느 한 곳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시선 끝이 향한 곳은 여러 겹의 옷으로 칭칭 몸을 감고 있는 윈터였다.

“그때 사용했던 벌레는 이제 남아 있지 않지만 원본이 되는 병해충은 이곳에 있지. 내 연구에 지원하기 위해 전멸한 100번대 이상의 테라리움을 뒤져 가며 입수한 그 병해충. 어떻게 일개 연구원이 손에 넣어 자신의 몸에 감염시키는 신기한 발상까지 하게 됐는지 모르겠지만.”

죽어 가는 자신의 몸을 치료하기 위해 저명한 벌레 연금술사인 어닝을 만나고 싶어 했던 윈터. 윈터에 대해 어닝이 알고 있다는 것은 혹시 그의 몸을 치료할 방법이라도 조언한 걸까? 그런 나의 궁금증을 미리 알아차린 것처럼 어닝이 혀를 차며 말했다.

“저건 이미 끝났어. 세계수의 가지를 좀먹던 벌레를 퇴치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으로 비록 하나뿐이긴 해도 각시투구꽃 개량종인 맹독초를 사용할 수 있었지만, 저건 벌레에 감염된 것이 아닌 병해충이 만들어 내는 병에 감염된 것이라 맹독초를 이용한다 하더라도 치료할 수 없지. 맹독초를 씹어 먹어 몸속에 침투한 병을 죽이는 방법도 있겠지만 어떻게 독이 병만 골라서 죽이겠니? 육체도 중독되어 죽을 테지. 빨리 죽는 것과 좀 더 늦게 죽는 방법을 고르는 것밖에 남지 않았단다.”

이미 결과에 대해 들어서 알고 있었던 듯 윈터는 무덤덤하게 어닝의 말에 동조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 중요한 재료는 여기 있지만 문제는 나머지 모든 재료와 시설이 내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거란다. 하지만 이미 완성된 레시피가 있으니 몇 년에 걸쳐 연구할 필요 없이 세계수 가지를 위한 벌레는 금방 만들어 낼 수 있지.”

세계수 가지를 위한 벌레라…. 조금 아이러니하지만.

“내 레시피를 이해할 수 있는 똑똑한 머리, 그리고 수준급 재료와 시설의 지원을 받을 수 있으며 이를 어떠한 의심도 받지 않고 이행할 수 있는 환경. 저 남자는 걸어 다니는 미완성된 견본품이나 다름없단다. 심지어 몸에 병을 품고 있으니 목적지에 육체가 도달하는 것만으로도 영향을 끼칠 수 있는 훌륭한 숙주로서의 모습도 볼 수 있지.”

“잠깐…. 그 말은 윈터를 인간 병해충으로 만들어 세계수의 가지에 접근시키는 것이 최선이라는 거야?”

“세계수의 가지에 벌레를 푼 건 벌레 자체의 살상력을 높이 사서가 아니란다. 벌레가 품고 있다가 퍼뜨리고 감염시키는 병의 숙주로써 이용했기 때문이지. 흐음, 어쩌면 벌레를 만들어 낼 필요 없이 인간의 육체에 연금술을 더 진행시키면 되니 시간은 더욱 단축될 수도 있겠구나. 이미 한 번 자신의 몸에 시도를 해 봤던 자니 더 거리낄 것도 없겠어. 또한 세계수의 축복은 벌레에 반발 작용을 하긴 하나 인간에겐 한없이 너그러우니 일이 더 쉬워질 수도 있고.”

어닝이 말하는 건 인체 실험이나 다름없잖아? 대체 저 여자의 잔학성은 어디까지야?

“병에 감염되는 시간을 단축시키고 파괴력을 올리면 그럭저럭 빠른 기간 내에 16번째 세계수의 가지를 무너뜨릴 수 있을 것 같긴 한데….”

“윈터를 이용할 거면 됐어. 그런 반인륜적인 방법을 사용하고 싶진 않아.”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