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4화 (144/604)

연금탑에 도착하고 종자 보관소에서 바곳의 일을 마무리하기까지 아주 많은 시간을 보낸 것 같았다. 창문이 없어 밖을 볼 수 없으니 아티팩트를 통해 28번째 테라리움을 살펴 새벽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난장판이 된 집기들을 정리하고 쉴 곳을 마련했다. 바곳이 틈틈이 독으로 오염된 곳을 정화하고 메스키트는 평평한 책상들을 한데 모았으며 데이지는 유리 가루와 먼지들을 털어 냈다. 엘더는 내가 가만히 있도록 감시하는 역할이었다.

종자 보관소엔 인간을 위한 휴식처는 어디에도 없었다. 개방될 먼 미래를 위해 시간을 포함한 모든 것이 타임캡슐 안에 꼭꼭 싸매어 포장된 곳이나 다름없었다.

드라이어드들은 파피루스의 이야기에 분노했지만 그에게 직접적인 해를 가하진 않았다. 결국 그는 잘못된 사상을 가졌을 뿐 종자 보관소나 관리하고 있기에 일의 원흉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6번째 테라리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옹호하거나 방관한 탓에 그에 대한 인식은 아주 나락으로 떨어졌다. 파피루스는 우리 드라이어드들의 눈총을 받으며 온실 한구석을 독방 삼아 움츠려 앉아 있어야만 했다.

하루 종일 뛰어다니고 쉴 새 없이 움직였더니 몸이 너무 피곤했다. 비상식량을 까먹으며 굶주린 배를 채우고 넓은 책상에 드러누웠다. 하얀 데이지 드라이어드에게 얻어맞았던 뱃가죽이 누울 때 찢어질 것처럼 아파서 죽는 줄 알았다. 분명 옷을 까 보면 멍이 시퍼렇게 들어 있을 거야…. 조금 서럽네.

어닝의 판단처럼 이곳은 난리 났을 외부와 다르게 안전하고 조용했다. 우리가 설마 종자 보관소까지 쳐들어왔을 거라곤 생각 못 한 걸까?

내가 28번째 테라리움에서 핸드폰을 사용했던 경험에 따르면 행정 관리원의 월렛으론 나를 볼 때 xy 좌표를 통해 연금탑에 있다는 건 파악할 수 있어도 z 좌표가 필요한 층수에 관해선 알 수 없었다.

층이 높은 것까지 고려해 연금탑을 고른 것은 어닝의 큰 그림이었을까? 얼마나 똑똑한 여자인 거야?

이리스와 제퍼는 여관에 있던 동료들과 안전하게 합류했을까? 그들은 어떻게 되었으려나. 무사했으면 좋겠는데. 다들 능력이 뛰어난 사람들이니 호락호락하게 당하지는 않았겠지.

16번째 테라리움으로 오고 있다는 인페르노의 수장은 도착했을까? 밖의 상황을 알 수 없으니 너무 답답했다.

“잠이라도 좀 자는 게 어때? 많이 피곤해 보여.”

엘더가 하얀 빛이 나는 손을 내 이마에 올리며 말했다. 이 상황에 내가 잠을 잘 수 있을까?

“그래요, 제이. 많이 힘들어 보이는군요. 이렇게 주변이 조용할 때라도 조금 자는 게 좋겠습니다. 걱정 말아요. 제이가 잠을 잘 동안 곁을 떠나지 않고 지킬 테니.”

피로 회복제를 열심히 까먹으면 하루 정도 자지 않고 버틸 수 있을 것 같은데 드라이어드들이 싫어하겠지?

메스키트의 말처럼 그나마 평화로울 때 잠이라도 자두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에서 유일하게 우리 편이 아닌 파피루스는 특별히 뭘 할 수 있는 것도 없어 보이니까.

책상 위로 올라와 앉는 데이지가 제 허벅지 위에 내 머리를 올렸다. 와 예상외로 딱딱한데. 우리 데이지 근육이 대단한걸…? 근육이라곤 하나도 없이 마시멜로처럼 말랑거리는 내 허벅지가 떠올랐다.

메스키트가 망토를 이불처럼 덮어 주었다. 내 의사가 어찌 됐든 우리 드라이어드들은 정말 날 재울 생각인가 봐.

종자 보관소의 적당히 어두운 조명과, 야외와 달리 풀벌레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고요함. 불안해서 한숨도 못 잘 것 같았는데 억지로 눈을 감고 있으니 의식이 점점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다.

안 자고 버틸 거란 괜한 소린 안 하길 잘했어.

***

온통 까만 어둠… 그리고 화르륵, 무언가 타는 소리. 뭐가 탄다고? 종자 보관소에 불이라도 난 거 아니야? 파피루스 이놈 기어이 사고를 쳤나? 하고 눈을 뜨니 붕 뜬 의식과 더불어 몸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아, 꿈이구나.

하얀색과 검은색으로 정확히 양분된 공간의 중앙에 내가 서 있었다. 하얀 공간엔 똑같이 새하얀 빛을 내는 백옥 같은 나뭇가지가, 검은 공간엔 숯처럼 새까만 흑요석 같은 나뭇가지가 얼기설기 뻗어 있었다.

나 이제 너희 둘이 뭔지 알아. 설마 파피루스의 이야기를 들어서 이런 꿈은 꾼 걸까? 아니면 저번처럼 내게 무언가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세계수의 가지가 내 꿈에 나타난 걸까?

양분된 공간의 경계선이 불붙은 종이처럼 타닥타닥 타들어 가다 필름을 감은 것처럼 재생되는 것을 반복하고 있었다.

“내가 포기할게.”

그렇게 내게 말했다. 누가?

“아니, 차라리 날 죽여 줘.”

그리고 또 다른 누군가가 말했다.

“아냐,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해. 죽는 건 쉽지 않아. 한쪽만 살기 위해 그렇게 내버려 두는 게 아니었어.”

“너무 아파, 뜨거워. 버틸 수 없어. 결국엔 전부 다 타 버릴 거야. 너도 태워 버릴 거야.”

성별을 가늠할 수 없는 두 개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공명했다. 한쪽은 평온한 목소리, 다른 쪽은 무척 지치고 힘겨워하는 목소리였기에 둘을 구분할 수 있었다.

“도와주세요. 제가 포기할 테니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게 해 주세요.”

그래, 동산에서 내가 기절하고 꿨던 꿈에서도 그렇게 말했지. 도와 달라고. 하지만 뭘 어떻게 도와줘야 하는데?

잠깐만… 하얀 나뭇가지, 묘하게 이질적인 느낌이 드는데? 이 나뭇가지는 내 28번째 테라리움의 가지가 아니잖아? 설마 내가 16번째 테라리움의 과수원에서 본 그 새하얀 세계수의 가지야?

“구할 수 있어요. 당신이 나의 다른 가지를 구해 준 것처럼. 날 도와주지 마세요. 내가 아니에요. 저쪽이에요. 당신은 저쪽으로 가야 해요. 당신만이 할 수 있어요.”

하얀 공간에서 잔잔한 바람이 불어와 뺨에 부딪혔다. 마치 고개를 검은 나뭇가지가 있는 곳으로 돌리라는 것처럼.

내가 도우러 가야 할 곳은 건강한 세계수의 가지가 있는 과수원이 아니라 검은 나뭇가지가 있는 동산.

나만이 할 수 있는 일, 특별한 힘도 없고 강하지 않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단 하나뿐이었다. 죽어 가던 28번째 테라리움의 세계수 가지를 살려 낸 그 힘. 그런 거라면 내 전문이긴 한데.

하지만 그 세계수의 가지를 살렸던 곳도 과수원인데? 행정 관리원이 가지에 관여할 수 있는 공간은 과수원이잖아. 동산에서 내가 무언가 할 수 있었다면 전에 방문했을 때도 가능했어야 하는 거 아냐?

“제가 포기할게요. 그러니 저쪽이 아니라 제가 죽어야만 해요.”

하얀 가지가 그렇게 말하자 순식간에 두 색의 경계선이 일그러졌다. 타들어 가는 것과 재생하는 것을 끝도 없이 반복하던 그 경계가 한쪽으로 치우치기 시작했다.

재생하는 것을 멈춘 하얀 공간을 검은 공간이 빠른 속도로 태워 갔다. 덩달아 하얀 나뭇가지도 점차 까맣게 변하기 시작했다. 이젠 빛을 잃고 검게 변모한 가지 때문에 사방이 삽시간에 어두워졌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새까만 어둠 속에 나 홀로 덩그러니 남겨졌다. 내가 눈을 감고 있는지 뜨고 있는지조차 구분되지 않을 정도였다.

저기요? 이렇게 저만 남겨두면 어떡해요? 힌트 좀 더 주시면 안 돼요? 하얀 나뭇가지가 죽어야 한다뇨? 그럼 16번째 테라리움은 파국 아닌가요? 세계수에 해를 끼치면 벌받는다면서요? 제가 뭘 어떻게….

스스로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된 것을 깨닫고 발을 내디뎠다. 그러자 놀라운 변화가 생겼다. 내가 밟은 곳이 하얗게 변했다. 그것을 기점으로 자국에 불과했던 하얀 점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검은 물이 가득한 곳에 한 방울 떨어진 하얀 물감처럼, 하얀 빛 무리가 검은 공간에 섞여 들어가며 다시 밝아지기 시작했다.

손을 움직이자 손끝이 닿은 곳이 하얗게 변했다. 또다시 하얀 점이 크기를 키우며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내 몸짓 하나하나에 하얀 자국이 생기고 그곳에서 퍼져 나간 하얀 빛이 검은 공간을 밀어냈다. 삽시간에 주변이 하얗게 변했다.

뭔데…? 놀라서 주위를 둘러보니 검게 변했던 두 나뭇가지 모두 백옥처럼 하얀 나뭇가지로 바뀌어 있었다.

“제가 죽어야만 다같이 살 수 있어요.”

하얀 가지의 말을 마지막으로 꿈이 끝났다.

***

잠에서 깨어났을 때 엘더가 놀란 얼굴을 했다.

“네가 자다 중간에 깨는 건 처음인데…. 역시 많이 불안했나?”

그렇게 말하는 걸 보면 얼마 안 잔 것 같은데. 잠에 들자마자 황급히 꿈속으로 날 찾아올 정도면 세계수도 많이 급했나 봐. 내가 아무리 한국인이라지만 쉬는 꼴도 못 보다니.

“제이 님, 괜찮으세요? 자면서 계속 말씀하시던데.”

“헉. 나 잠꼬대도 했어? 내가 자면서 뭐라고 했는데?”

좀 쪽팔리는군요. 혹시 이도 갈았어? 난 잘 때 시체처럼 잠만 자는데. 잠꼬대를 할 정도면 나 진짜 많이 피곤했나 봐.

“동산으로 가야 한다고, 자꾸 ‘동산’이라고 이야기하셨어요.”

“동산이면 우리가 이미 갔다 온 곳이잖아. 그 이상한 세계수의 가지가 있던 곳. 거길 또 가려고?”

엘더가 의심쩍다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아니 세계수가 자꾸 내비게이션을 찍잖아. 거기로 가라고. 이왕이면 퀘스트 창이라도 좀 띄워 주든가. 가라는 건 알겠는데 가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제대로 알려 주진 않으니, 원.

그래도 일단 목표는 세워졌다. 동산으로 가야 한다. 연금탑을 나가는 방법도 문제지만 어닝이 경고한 인페르노의 수장도 아주 큰 문제였다.

감히 내 28번째 테라리움을 욕심내고 있는 사람. 거기다 어닝의 말에 따르면 엄청나게 위험한 자였다. 걸어 다니는 화마 그 자체라는 사람을 피해서 동산으로 갈 수 있을까? 그래도 가야만 한다.

그런데 하얀 나뭇가지는 죽어야만 한다고 했지…? 그거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을 알고 있긴 한데, 정말 이래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 내가 꿈을 잘못 해석하고 있는 거면 어떡하지?

“달갑진 않지만 어닝을 다시 만나야겠어.”

겨우 차지한 세이프 존을 떠나는 것이 아깝긴 하지만 어쩔 수 없지, 뭐. 거기다 어닝은 메스키트의 공격으로 나에 대한 호감도는 바닥을 칠 텐데 순순히 협조해 주진 않겠지. 금은화 카드를 써야겠다.

“거기 파피루스! 길 안내 좀 해 줘.”

“저 드라이어드를 믿고 맡기시려는 건가요?”

메스키트가 의문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물었다.

“이 층까지 올 때 윈터의 도움을 받았는데 혼자는 못 갈 것 같아서. 아예 내버려 두고 갔다가 허튼짓 하는 것도 곤란하니 데려가면서 감시하는 게 낫지 않을까?”

“제가 제 주인도 아닌 당신의 명령을 순순히 따를 것 같습니까?”

이것저것 여태 잘 알려 줬으면서.

“설마 연금탑 내부 길 몰라? 난 수백 권의 책보다 가치 있고 아는 것이 많은 드라이어드라고 해서 당연히 알고 있을 줄 알았는데.”

“당연히 알고 있습니다! 내부 설계도까지 모두 알고 있습니다.”

“에이, 여기 종자 보관소 안에만 있어서 밖은 모르는 거 아냐?”

“아닙니다! 당신이 가고 싶어 하는 모든 장소를 제가 안내해 줄 수 있어요!”

호기롭게 이야기하던 파피루스는 아차 싶은 얼굴로 말을 멈추었다.

“응, 안내 고마워. 부탁 좀 할게.”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날 보며 그는 애꿎은 모노클 테두리만 만지작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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