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3화 (143/604)

내가 시들링, 윈터와 함께 찾았던 그곳은 꽤나 높았다. 단순히 언덕이 높아진 수준이 아니었다.

“가 봤더니 꽤 높던데?”

“그건 세계수의 가지에 기형이 생겨 어긋나게 자랐기 때문입니다. 지반이 높아진 건 땅속으로 가지가 뻗어 나갔기 때문이지요.”

내가 지금 뭘 들은 거야? 세계수의 가지에 기형이 생겼다니? 여기 세계수의 가지도 병에 걸리기라도 했다는 건가. 술술 이야기하던 파피루스는 딴 곳을 바라보며 턱을 쓰다듬었다.

“하지만 지금 말하는 이 사실은 아무래도 외부에 알려선 안 되는 역사였던 것 같습니다….”

“세계수의 가지에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지?”

어닝이 벌레를 풀었단 사실을 알자마자 랜스를 내질렀던 메스키트였다. 그 앞을 막아선 극락조화 드라이어드는 어찌 버틸 수 있었겠지만 파피루스는 즉사할 것이 분명했다.

그녀가 세계수를 해한 주체가 아닌 파피루스에게 어닝과 동일한 분노를 보이지 않을 것은 알았지만, 혹시 몰라 팔을 붙들었다. 메스키트, 한 번만 봐주자!

파피루스는 입을 다문 채 나와 메스키트의 눈치를 봤다.

“외부에 알려져선 안 된다기보단… 당신이 모르는 역사라서 그런 거 아니야?”

“무…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저희 파피루스 종들은 아주 먼 옛날부터 드라이어드로 태어나 보고 들은 모든 역사는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가 공유하여 기억합니다. 오죽하면 저 드라이어드가 고대부터 존재한 필드의….”

“그만. 불필요한 정보는 집어치우고 나의 주인이 원하는 정보를 말하세요.”

또 나만 모르는 메스키트의 비밀. 몇몇 드라이어드들이 알고 있는 메스키트의 비밀은 대체 뭘까? 그녀를 한눈에 알아보고 두려움을 느끼고 경외하고 놀라워하는 마음이 들게 하는 원천이 무엇일까?

하지만 궁금한 마음이 드는 것조차 죄책감이 든다. 그녀는 날 전적으로 믿고 의지하게 해 주는데, 어련히 때가 되면 내게 알려 줄 그 비밀을 자꾸 궁금해하면서 그녀와 나 사이에 거리감이 생기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그녀가 내게 무언가를 가르쳐 주는 행위는 특정 레벨에 도달해야만 열 수 있는 챕터 같은 것이었다. 이 단계의 내가 알아야 하는, 알아도 되는 정보는 알려 주지만 지금 당장은 알 필요가 없는, 알아선 안 되는 정보는 차단한다.

나의 드라이어드들이 모두 그렇지만 그녀만큼은 내게 절대 해가 될 일을 하지 않을 거란 믿음이 있었다. 그러니 순응하고 기다릴 것이다.

메스키트의 명령에 가까운 말에 파피루스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이곳 16번째 테라리움의 연금탑은 새로운 세계수를 창조해 내기 위해 세워진 곳입니다. 현재의 행정 관리원님께서 새로 부임하시면서 차근차근 진행된 일입니다. 그리고 현재 16번째 테라리움의 세계수의 가지는 이 다시 태어날 제2의 세계수를 위해 연료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불을 숭배하는 단체인 인페르노가 제2의 세계수를 만들려고 한다는 이야기는 어닝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다. 다만 그때 당시 아티팩트에 있던 내 드라이어드들은 모르는 이야기였다.

예상대로 그들은 파피루스의 말에 무척이나 분노했다. 세계수는 드라이어드들이 태어나고 자란 곳. 자연 발생하는 드라이어드도 꽃가루처럼 퍼져 나간 세계수의 축복이 닿아야만 태어날 수 있는 존재들이었다.

그렇기에 세계수는 그들의 신과 같았다. 그런데 이곳 사람들이 이 신에 대적하는 또 다른 신을 인공적으로 만들고 있다고 파피루스는 말한다. 현재의 신을 단순히 연료로 사용하면서. 들었을 때 나도 얼마나 어이없었는데 하물며 드라이어드들은….

“특수한 방법으로 나무를 태우면 더 강한 불을 낼 수 있는 특별한 연료를 얻을 수 있습니다. 역사에 따르면 인간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이 연료를 만들어 사용해 왔으며, 이걸 ‘숯’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숯이라…. 고기 구워 먹을 때 좋지. 파피루스가 무엇을 설명하기 위해 숯 이야기를 한 건지 감이 왔다.

“그리고 16번째 연금탑의 연금술사들은 아주 강력한 숯을 만드는 방법을 알아냈습니다. 좋은 품질을 얻을 수 있는 나무들이 있지만 그것과는 차원이 달랐습니다. 단지 지니고 있는 것만으로도 화기를 높일 수 있는 무구가 될 정도로 말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초월적인 나무를 이용하는 것입니다. 바로 세계수의 가지를 숯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지요.”

붙들고 있는 팔이 바위처럼 느껴졌다. 분노로 경직되어 내 곁에 선 메스키트가 무생물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세계수의 가지를 숯으로 만든다면…. 내가 동산에서 본 뜨거운 열을 내뿜는 그 가지가 설마?

“엄청난 화력과 몇 년은 꺼지지 않는 강력한 지속성을 이용해 연금탑이 막대하게 필요로 하는 에너지를 충족했습니다. 한번 숯으로 만들고 나면 끝인 일반 나무들과 다르게 생명력과 재생력이 뛰어난 세계수의 가지는 마르지 않는 자원이었지요….”

파피루스는 이제 체념한 듯 기계처럼 입을 열었다. 자신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이야기가 이젠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을 만들고 있다는 것을 느낀 것이다.

세계수의 가지를 병들게 하는 병해충을 풀고, 숯으로 만들고…. 이 인간들은 대체 왜 세계수를 괴롭히지 못해서 안달인 걸까?

“하지만 세계수는 불에 매우 강하지요. 일반적인 방식으론 건강한 세계수를 절대 태울 수 없습니다. 인간과 자연재해가 피운 불씨는 물론 밖을 기어 다니는 불들 역시. 세계수에서 태어난 우리 드라이어드들도 유일하게 불을 해치울 수 있는 힘을 이어받지 않습니까? 그렇지만 세계수의 겉을… 바크는 태우지 못해도… 불이 그 속을 파고들면 가능하다는 것을 이 인간들은 알아냈습니다.”

“속을 태운다고? 어떻게?”

“아무나 할 순 없지요. 세계수의 가지에 깊게 관여하고 접근할 수 있으며 가지의 힘을 유지할 다이아를 공급할 수 있는 자… 행정 관리원님이 계시면 가능합니다.”

“파필리온… 이 새끼 진짜 뭐 하는 놈이야?”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수상한 이상한 녀석. 행정 관리원이란 놈이 나서서 세계수의 가지를 속부터 태워 숯으로 만들고 있는데 16번째 테라리움 전체가 비정상인 사람들만 모여 있는 거 아냐?

“공급하는 다이아에 특수한 힘을 입혀 다이아를 흡수한 세계수의 가지가 영향을 받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 특수한 힘은 태어날 때부터 불을 자유자재로 다를 수 있는 인간들의 기운을 매개로 만들어진다고 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불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인간…? 혹시 내가 본 화염 마법사들을 말하는 건가? 게임 직업처럼 전직 가능한 것이 아니라 애초에 불을 다룰 수 있는 인간으로 태어난다고?

“세계수의 가지 입장에선 다이아에 입혀진 힘은 불순물로 간주하여 이걸 가지 끝으로 내보내 최종적으로 잎을 통해 배출시키려고 합니다. 하지만 16번째 테라리움은 엄청난 양의 다이아를 공급 가능한 곳입니다. 테라리움에서 벌어들이는 다이아도 많지만 외부에서 지원받는 다이아가 아주 많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공급되는 특수한 힘을 입힌 다이아가 많은 만큼 처리할 수 없는 불순물이 잔뜩 쌓이니 본가지에 영향을 받지 않도록 잔가지들이 삐져나오는 과정에서 기형이 발생한 것입니다. 언덕이 높아져 동산이 되고, 역사에 따르면 해마다 동산의 높이가 높아지는 이유가 땅을 파고들며 자라나는 기형적인 가지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본가지는 다이아를 많이 공급받으니 건강하다. 하지만 불순물이 쌓인 잔가지는 속이 활활 타오르고 있는데 세계수의 재생력으로 죽지도 못하고 고통스러워한다.

파피루스의 설명을 들으니 내 꿈에 나타나 차라리 죽여 달라며 비명을 지르던 검은 나뭇가지가 떠올랐다. 대체 이 무슨 끔찍한 일이 다 있지?

어닝은… 이 사실을 알고 있을까? 아니, 금은화와 동산 이야기를 할 때 반응을 보면 모르는 눈치였지.

“대체 왜 이런 짓을 하는 거야? 왜 제2의 세계수를 만들고 지금 있는 세계수를 괴롭히지 못해 안달인 건데?”

“그 이유에 대해선….”

파피루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무척이나 자존심이 상한다는 목소리로 아주 작게 답했다.

“저도 잘 모릅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것이 모두를 위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모두를 위한 것? 세계수는 필드에 돌아다니는 위험한 불로부터 축복의 힘으로 인간들을 지키는 선한 존재 아니야?

드루이드와 드라이어드의 관계를 이용해 불을 무찌르고 평화를 가져오는 좋은 역할이잖아. 아직 내 경험이 부족해도 세계수로 인해 피해를 받았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 없는데. 그런데 이런 세계수를 배척하는 것이 어떻게 모두를 위한 것이 될 수 있지?

단순히 검은 나뭇가지를 치워 금은화 드라이어드를 구하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차라리 죽여 달라며 비명을 지르던 세계수의 가지를 구해 내야만 했다.

“너는 세계수에서 태어난 드라이어드가 아닌가? 연금탑에서 태어난 금지된 존재인가?”

메스키트가 무척이나 싸늘한 말투로 파피루스에게 말했다.

“저는… 세계수의 열매에서 태어난 드라이어드가 맞습니다. 연금탑의 연금술사가 제 주인이지요.”

“그런데 어째서 세계수에서 태어난 당신이 드라이어드로서 위대한 존재인 세계수를 저버리고, 자연이 가르치는 이치를 따르지 않는 거지? 필드의 규율이 빚어 준 정체성이 그 어떤 곳도 세계수의 축복이 닿지 않는 곳이 없도록 하라는 뜻을 추구하게 만들 것인데, 이런 일들을 보고 들으면서 아무런 것도 느끼지 못한다는 건가?”

“너무 오래 공허한 역사가 흘렀으며 그 정체성이 많이 무너졌다는 것을… 그것도 아주 빠른 속도로…. 그 사실을 당신이 모를 리가 없지 않습니까? 이젠 세계수보다 나의 작은 세계수가 진리이고… 내 정체성입니다. 나의 작은 세계수가 추구하는 이치가… 곧 제 이치입니다.”

단순 맹목적으로 자신의 드루이드를 따르는 드라이어드의 이야기가 아닌 느낌이었다. 내가 모르는 곳에서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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