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2화 (142/604)

드루이드 제이의 꽃이라니…? 무슨 꽃 이름이 그래?

바곳에게 성(姓)처럼 박혀 있는 내 닉네임에 어안이 벙벙했다. 필드 발생 확률도 ‘low’에서 다시 ‘없음’으로 바뀌어 있었다.

이건 좀 전까지 함께 있던 각시투구꽃의 다른 드라이어드가 사라졌기 때문인가? 만약 바곳 외 다른 드라이어드가 존재하지 않아서 그렇다면 대충 이해는 갔다.

그리고 그동안 내가 알고 있던 드라이어드의 등급인 노멀, 레어, 유니크, 스페셜 등급이 아닌 전혀 다른 등급이 튀어나왔다. 오리지널…? 이건 대체 무슨 등급이야?

“아아…. 세상에, 이건 역사적으로 매우 위대한 순간에 있는 것 같군요. 자신의 종의 기원이 되는 유일한 드라이어드를 보게 되다니. 희박한 확률을 뚫고 태어난 그 어떤 개량종 드라이어드도 스스로 종의 기원이 될 수 있었던 적은 없었지요.”

다시 본래의 페이스를 찾은 파피루스가 석판을 바라보며 살짝 높아진 톤으로 외쳤다. 오리지널이란 건 파피루스의 말뜻처럼 시초가 되는 종이라는 걸 뜻하는 것 같았다. 규격 외 등급. 그럼 우리 바곳은 대체 얼마나 대단한 거야?

그의 말에 바곳은 수줍게 원통에서 나와 내 곁에 섰다. 아이는 신기한 눈으로 석판을 바라보았다.

“제가 정말…. 제이 님이 전에 했던 말처럼… 제이 님이라는 작은 세계수에 유일하게 존재하는 첫 번째 투구꽃 드라이어드가 됐어요….”

바곳의 목소리엔 벅찬 감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 볼을 붉히며 무척이나 자신이 자랑스럽다는 것처럼 날 바라보았다.

항상 주눅 들어 있던 아이가 환하게 빛이 나는 얼굴을 했다. 칭찬을 바라는 그 얼굴에 자연스레 손이 갔다. 기특함을 가득 담아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땐 바곳의 말처럼 그렇게 말했어도… 이렇게 정식으로 확정받을 줄은 정말 몰랐다.

신기했다. 내 닉네임이 박힌 꽃이라니. 그것도 첫 만남 때 내 드라이어드들은 반대했으나 세계수가 격려하듯 넘겨준 설익은 열매에 담아낸 꽃에.

내가 잘 키워 내겠다고 호언장담은 했으나 좀처럼 오르지 않던 호감도에 전전긍긍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잘 자라 어느새 나만의 유일한 드라이어드가 될 줄이야.

또다른 놀라운 점은, 바곳의 정보에 항상 [확인할 수 없는 정보가 있습니다.]로 표시되던 칸이 드디어 해금되었다.

‘절박한 상황 속에서 꽃은 더욱 강하게 피어난다.’

해금된 문구와 좀 전의 바곳이 치렀던 전투를 떠올렸다. 처음엔 명백히 힘의 우위가 존재했던 싸움이었다.

하지만 바곳이 죽기 직전까지 가고 파피루스가 가상 아티팩트 공간에 손상을 끼치자, 그것이 신호탄이 된 것처럼 순식간에 전세가 역전되었다. 오히려 공격할수록 자신이 더 괴로워하던 큰 바곳의 모습이 떠올랐다.

절박한 상황 속에서 더욱 강한 힘,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생명력이 떨어질수록 전투력이 강해지는 패시브 스킬인 것이 분명했다.

게임 캐릭터 특성 중, 생명력에 반비례하여 공격력이 강해지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바닥까지 낮아진 생명력에 반비례하여 훌쩍 높아진 전투력이 결국 큰 바곳에게서 우위를 점하는 데 일조한 것이다.

남들이 보기에 절망적인 상황에서 꾸준히 디버프를 쌓을 준비를 하던 바곳이 떠올랐다.

두 드라이어드는 데이지를 비롯한 다른 공격형 드라이어드처럼 한 방 스킬이 없었다. 그저 주변에 디버프를 주는 독의 강도를 높이는 기술을 사용했다. 농도 짙은 독을 적의 주변에 잠식시켜 두고 기회를 노리던 바곳이 무척이나 기특했다.

“제 영혼의 한구석엔 갈풀이 남긴 끈기의 힘이 있다고 했어요. 아프고 괴로워도 포기하지 않으면 강하고 아름다운 꽃을 피울 수 있다고 알려 줬어요. 그리고….”

바곳이 조곤조곤 이야기를 꺼내자 모두 그를 바라보았다. 관심이 집중되자 아이는 괜히 안경을 치켜올리며 머뭇거렸다.

“벨라돈나 님이… 이야기하셨던 것이 떠올라서….”

바곳이 전투에서 했던 말이 기억났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조용히 잠식해 오는 독이 가장 위험한 것이라고 했지. 누군가에게 들은 이야기를 전하는 투였는데, 그걸 벨라돈나와 잠깐의 만남만으로 습득하다니. 그녀는 역시 바곳에게 참 스승이었어!

“아… 이런. 결국.”

파피루스가 분위기를 깨며 참담하게 신음했다. 그는 허리에 데이지의 줄기를 강아지 목줄처럼 달고서도 잘도 돌아다녔다. 줄이 팽팽해지면 슬쩍 당겨서 데이지에게 의견을 피력했다. 그럼 데이지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줄을 좀 늘여 주었다. 내가 뭘 보는 거야, 대체.

“정말로 하나도 남김없이 다 죽어 버렸습니다. 아이고…. 미래의 역사까지 보전해야 될 소중한 종자들이었는데….”

그는 각시투구꽃 개량종들이 재배되고 있던 텃밭은 물론 주위의 모든 텃밭을 둘러보며 이마를 짚었다.

“역시… 이곳에 와선 안 되는 인간이 왔기 때문에 이런 일이 생긴 것입니다. 큰일입니다…. 이를 어째야 할지.”

그러면서 내 드라이어드들의 눈치를 보며 제 의견을 소심하게 피력했다. 주위를 둘러보니 그의 말처럼 모든 식물들이 검게 시들어 죽어 있었다. 온갖 화려한 색채를 위협적으로 뽐내던 꽃들이 거무죽죽해졌다.

이게 인간인 나 때문은 아니지. 큰 바곳이 멋대로 폭주했는데.

“이런 세계수의 이치에 어긋나는 것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이 낫습니다.”

“다 연금술로 태어난 인공 개량종들이었어? 어쩐지 불쾌했어.”

메스키트가 메마른 눈으로 주위를 훑으며 말했다. 반면 엘더는 죽은 식물들엔 눈길도 주지 않고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둘 모두 파피루스를 겨냥한 말처럼 들렸다.

“역시나 처음 봤을 때부터 당신들은 분명 고지식한 드라이어드라 생각했습니다.”

파피루스가 엘더와 메스키트를 향해 덤덤하게 말했다. 하지만 멀찍이 떨어진 거리에서나 말할 수 있는 담력인지 슬슬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다.

“인간들의 연금술은 매우 빨리 발전하고 있습니다. 시대는 새로운 역사를 써 내려가고 있지요. 세계수는 분명 위대한 존재이지만, 인간들의 발전 속도라면 언제든지 세계수를 대체할 수 있는 것이 나올 수 있습니다.”

그 말에 메스키트의 눈이 무척이나 매서워졌다. 파피루스는 여전히 뒷걸음질을 멈추지 않으며 입을 놀렸다.

“바뀌어 가는 역사의 흐름 속에서 멈추어 있으면 도태될 수밖에 없습니다. 당신이 아무리 유구한 역사의 산증인이라 해도!”

어느새 벽까지 물러난 그는 벽에 달린 무언가를 꺼내 제 허리를 감은 데이지의 줄기에 갖다 대었다. 접촉한 부분에서 작은 스파크가 튀었다.

“앗!”

데이지가 깜짝 놀라며 줄기를 거두었다. 그 틈을 타 그는 빠르게 출구를 향해 뛰었다. 그를 쫓으려 했지만 순식간에 유리문이 닫혔다.

“저놈 잡아야 돼! 사람 불러올 거야!”

그 말에 메스키트가 주저 없이 닫힌 유리문을 향해 랜스를 내질렀다. 동시에 엘더가 나를 보호하며 방어막을 쳤다. 돌로 두드려 겨우 구멍을 냈던 파피루스와 다르게 유리문은 물론, 연결된 모든 유리 벽이 엄청난 소리를 내며 박살 났다.

그리고 와장창 소리가 출발 총성이라도 되는 것처럼 데이지가 빠른 속도로 파피루스가 달려간 방향으로 튀어 나갔다. 나는 바닥에 즐비한 산산조각 난 유리 조각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와…. 유리 벽 꽤 두꺼워 보였는데…. 이게 막 한 방에….

오래 지나지 않아 데이지는 파피루스를 줄기로 포승줄처럼 칭칭 감아 죄인 호송하듯 끌고 왔다. 그렇게 필사적으로 도망갔으면서 몇 초도 안 지나 다시 잡혀 오다니. 낯빛 하나 안 바뀐 데이지와 다르게 그는 무척이나 힘겨워 보였다.

“…제가 도태된다고 했나요…? 사실 역사는 과거의 지혜를 배울 수 있다는 점에서도 매력적이지요. 결국 이 새로운 역사의 흐름의 잘잘못을 가리려면 역사가 과거가 되는 시점에서 알 수 있으니, 도태되는 것은 이쪽일 수도 있지요…. 암, 그렇지요.”

파피루스는 완전히 박살 나 흩어진 유리 조각들을 두려운 눈으로 바라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입 잘못 놀렸다간 자신이 저 유리처럼 산산조각 날 수도 있다고 깨달은 것이다.

하지만 사실 난 그를 폭력적으로 어떻게 할 생각은 없었다. 애초에 난 우리 드라이어드들처럼 인공 개량에 대해 딱히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고 그가 가상 아티팩트를 손상시킴으로써 우리 바곳에게 도움이 됐으니까.

그리고 그가 하는 말들은 참 흥미로워 얻어들은 지식도 많았다. 자꾸 연금탑의 역사 어쩌고저쩌고하는 것을 보면, 이 연금탑에 대해 아는 것들이 상당히 많을 것 같았다.

그가 급하게 사람을 부르러 갔던 걸 보면 내부에서 먼저 연락하지 않는 한 외부의 개입은 당분간 없을 것이라 판단되었다. 그러니 안에서 조용히 있으면 꽤 오래 숨어 있을 수 있다는 거겠지.

16번째 연금탑에서 바곳의 정보를 얻으려던 본래의 목적은 성공적으로 완료되었다. 이젠 여길 어떻게 나가야 할지가 문제였다.

그런데 아래층에 남은 어닝은 지금쯤 어떻게 됐을까?

“그러고 보니 묻고 싶은 게 있어. 당신 연금탑 역사에 꽤 빠삭한 것 같은데.”

내 말에 암울하게 숙이고 있던 파피루스의 고개가 번뜩 들렸다. 어? 엄청 좋아하는 표정이다. 칭찬 좋아하는구나. 그것도 이렇게 티 나게.

처음 봤을 때 진중한 학자 같은 생김새와 다르게 너무 허술하다 생각은 했는데. 이렇게 파악하기 쉬운 드라이어드는 제퍼의 도깨비바늘 이후로 오랜만이야.

그는 두려운 눈으로 메스키트의 눈치를 살피던 것도 잊고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말했다.

“네, 그렇습니다. 제가 많은 역사에 대해 능통합니다. 역사의 기록에 특화된 드라이어드니까요.”

“그럴 것 같았어. 아는 것이 정말 많더라고? 백과사전을 보는 줄 알았어.”

“전 백과사전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수백 권의 책보다 가치 있는 존재가 바로 저입니다. 이 종자 보관소를 관리하는 일도 전투력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 능력 때문에 제게 위임된 것입니다.”

문득 데자뷔를 느낀 것 같아서 엘더를 바라보았다.

“우리 엘더 얼굴 잘하네.”

“당연하지. 난 꽃나무들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꽃나무라고.”

봐 봐. 완전 똑같잖아. 다루는 방법을 알겠어. 다시 파피루스를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파피루스의 말에 따르면, 그는 질문을 입력하면 출력되는 검색 엔진이라는 거지? 아니면 우리 난쟁이들에게 자리 뺏긴 내 핸드폰의 시리 같은 존재라든가….

그러면 금은화를 구출할 방법이라도 궁리해 볼까? 단순히 어닝의 드라이어드라는 점뿐만 아니라 그대로 금은화를 그대로 두는 것은 너무 불쌍했다.

“그런데 이것도 알고 있을지 모르겠네? 연금탑 뒤에 있는 동산에 대해 알아?”

“당연히 알고 있습니다. 과거 역사에 따르면 그곳은 본래 조금 높은 언덕이었습니다.”

이건 어닝이 했던 이야기와 똑같았다. 그녀도 동산은 없고 언덕은 있었다고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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