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어느 정도 흘렀을까. 바곳은 무릎이 접히려는 것을 스태프를 지지대 삼아 붙잡고 버티고 있었다. 한 대만 맞아도 쓰러질 것처럼 위태해 보였다.
그럴 리는 없지만, 만약 바곳이 진다면 어떻게 되는 걸까? 저 큰 바곳의 포레스트로 영입되는 걸까? 하지만 바곳은 나와 영혼의 연결을 맺은 상태. 야생종이면 몰라도 드루이드의 드라이어드를 남의 포레스트로 빼앗긴다는 이야긴 들은 적이 없었다.
바곳이 패색이 짙어졌다고 느꼈던 와중에 큰 바곳에게 이상이 생겼다. 좀처럼 쓰러지지 않는 바곳을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며 여유를 부리던 그가 불편하다는 표정으로 주위를 빠르게 둘러보기 시작한 것이다.
쿵! 쿵!
가까이에서 둔탁한 소리가 여러 차례 울렸다.
전투로 정신없는 와중에 잠깐 사이 파피루스가 기묘한 짓을 벌이고 있었다. 어차피 사방이 독 웅덩이라 도망갈 수 없으니, 데이지가 줄기를 느슨하게 감은 틈을 타 그는 유리 벽에 가까이 다가가 큰 돌로 벽을 내려치고 있었다.
상당히 여러 번 내리친 듯 유리 벽엔 거미줄처럼 빼곡히 금이 가 있었다.
“너! 무슨 짓을 하는 거야!”
“보살펴야 될 종자들이 다 죽었는데 저라도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는 오래 버티지 못한단 말입니다!”
큰 바곳이 파피루스를 향해 소리쳤다. 하지만 그를 말리기엔 늦은 것 같았다. 와장창, 하고 유리 벽에 큰 구멍이 뚫렸다. 그는 소매로 이마를 닦으며 뿌듯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그는 뚫린 구멍을 통해 얼굴을 내밀고 크게 호흡한 후 한결 나아진 모습으로 말했다.
“어차피 아티팩트는 연금탑 역사에 따르면 지정된 공간에서만 작용합니다. 이렇게 공간을 손상시키면 아티팩트로서의 기능도 손상이 되지요. 이것이 아는 자의 지혜입니다. 전 단순히 벽을 깨부쉈을 뿐이니 전투에 가담한 것도 아닙니다.”
파피루스가 황급히 큰 바곳의 매서운 눈초리를 피해 데이지의 뒤로 숨었다. 그러면서 데이지의 줄기를 손수 제 허리에 꽁꽁 동여매며 잘 좀 부탁한다고 말했다.
아티팩트의 기능이 손상되었다는 그의 말은 사실인지 주변을 가득 채우던 불쾌한 공기가 사라졌다.
“아티팩트 따위가 없어도 넌 날 이기지 못해. 애초에 네가 이렇게 내 독에 당해 죽어 가는 것으로 우위를 알 수 있잖아?”
큰 바곳은 침착함을 유지하며 이젠 두 손으로 스태프를 부여잡고 무릎을 꿇고 있는 우리 바곳에게 말했다. 부들부들 떠는 아이의 어깨가 너무 애처로워 보였다.
“저대로 그냥 둘 거야?”
엘더가 언제라도 지원해 줄 수 있다는 듯 하얀 꽃이 몽글몽글 피어 있는 스태프에 빛을 내며 내게 물었다. 확실히 그냥 두기엔… 아무리 자존심 싸움이라 해도 너무 위태해 보였다.
자존심이 밥 먹여 주니? 진화시키려다 애 잡겠다. 백기 들듯 하얀 엘더를 떠밀려고 할 때였다.
바곳에게 특별한 변화가 생겼다.
주저앉은 아이의 주위로 천사의 깃털을 닮은 포근한 모래색 꽃들이 수북이 피어났다. 마치 땅에서 시작되는 초여름의 햇살처럼 강렬한 생명력을 가진 꽃들이 모래성을 쌓듯 차곡차곡 영역을 넓혀 갔다.
검은 웅덩이를 메우고 주저앉은 바곳을 일으켜 세우려는 것처럼 꼿꼿하게 허리를 세워 위로 위로 자라났다.
아이의 주위에 침잠하는 보랏빛이 아닌 역동의 베이지색 아우라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무슨 허튼짓을 하려고!”
큰 바곳이 아이를 향해 스태프를 휘두르는 것과 동시에 가슴을 부여잡고 허리를 숙였다. 그는 당혹스러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뭐야? 왜 갑자기? 언제부터?”
하얀 종이를 삽시간에 좀 먹는 보라색 물감처럼, 큰 바곳의 하얀 얼굴이 퍼렇게 죽어 갔다.
“독의 무서움은 단순 강한 것이 문제가 아니랬어….”
아이는 순한 눈매를 했지만 눈빛만큼은 먹이를 노리는 뱀처럼 날카롭게 번들거렸다. 그 눈빛이 마치 시들링의 벨라돈나를 떠오르게 했다. 비를 맞은 모래성처럼 찬찬히 무너져 갔던 아이에 비해 큰 바곳은 거대한 파도에 단숨에 덮쳐진 것과 같이 속절없이 주저앉았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죽음과 가까워지는 운명처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조용히 잠식해 오는 독이 가장 무서운 거랬어. 모른 채로 방치하다 결국 어떠한 선택도 하지 못하게. 아무런 발버둥도 치지 못하고 죽음에 순응하게 만드는 것이 독의 가장 무서운 점이라…. 남의 선택을 멋대로 박탈하지 않도록 독을 지닌 꽃들은 항상 감정을 죽이고 겸허한 자세를 가져야만 한다고 했어.”
“말도 안 돼. 난 너보다 강한 독을 가지고 있어! 내가 너에게 질 리가 없어. 이까짓 거 널 먼저 쓰러뜨리면…!”
큰 바곳이 온 힘을 다해 스태프를 휘둘렀다. 피할 수 없던 아이는 물풍선처럼 쏘아진 검은 물덩이를 정면으로 얻어맞았다. 하지만 오히려 공격한 쪽이 토할 것처럼 기침하며 몸을 수그렸다.
주변이 어느새 코끝을 톡 쏘는 알싸한 산약초 향으로 가득했다. 이 공간 전체가 바곳의 영역이었다.
“호오…. 개량종의 특수한 힘을 깨운 건가요? 뭔가 다른 힘이 작용하고 있군요. 저건 갈풀이 분명한데.”
파피루스가 무척이나 흥미롭다는 목소리로 모노클을 잡았다. 그는 눈을 빛내며 바곳을 찬찬히 관찰했다. 그리고 이내 아이의 주변에 핀 아침 햇살처럼 포근한 빛을 뿜어내는 꽃들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자연 개량종들과 달리 역사를 뒤져봐도 이곳 연금탑의 개량종들은 하나 같이 그런 힘을 깨웠단 기록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저 품종 3번은 정말 의외입니다.”
개량종들이 사용하는 특수한 힘. 우리 레드 데이지처럼 다른 종과 결합되어 개량종이 된 경우, 드물게 자신도 모르는 특별한 힘이 영혼에 새겨진다는 그것. 데이지는 부활의 힘을 사용할 수 있었다.
파피루스의 말에 따르면 인공 개량종은 그 경우가 매우 희귀한가 본데…. 그럼 우리 바곳에게 새겨진 특수한 힘은 대체 뭘까? 저렇게 죽어 가는 와중에 폭발적인 공격력을 내는 것이라면….
“절대… 너에게 굴복하지 않아…. 어차피 더 오랫동안 독에 당한 네가 먼저 쓰러질 거야…. 난 네놈이 쓰러지면 곧바로 내 거름으로 삼아 더욱 강해져서 이 정돈….”
큰 바곳은 파들파들 떨리는 목소리를 하고서도 끝까지 자존심을 세웠다. 양쪽 다 죽기 일보 직전처럼 쓰러져 있을 때, 바곳이 스태프로 힘주어 지탱하며 몸을 일으켰다.
달이 뜬 밤, 잠에 들기 위해서 봉오리를 오므렸던 민들레 군락지의 아이들처럼, 노란 꽃잎을 폭삭 껴안고 있던 단델리온의 스태프 조각이 파르르 떨렸다.
새벽을 걷어 내고 아침을 맞이하는 빛나는 태양 같은 샛노란 꽃잎이 활짝 얼굴을 드러냈다.
바곳의 스태프 주위를 작고 귀여운 노란 꽃잎이 나선형으로 휘감으며 빛을 내었다. 곧이어 주변에 상쾌한 산약초 향이 가득 찼다. 동시에 바곳의 로브 형태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검은색에 가까운 짙은 청보라색의 로브에 하얀 천의 숄더 케이프가 생겨났다.
선봉대 깃발처럼 높게 치켜든 스태프, 터져 나오는 풍만한 생명력으로 가득 찬 새하얀 빛, 바람에 흩날리는 꽃잎과 같이 펄럭이는 새하얀 케이프. 지원 회복형으로 턴 오버한 바곳은 마치 전장의 성직자를 보는 듯했다.
바곳을 좀먹던 우울한 기운이 순식간에 걷혔다. 자신에게 걸린 모든 디버프를 가볍게 해제해 버렸다. 반면 큰 바곳은 절망스러운 표정으로 땅만 긁을 뿐이었다.
바곳의 지원, 회복 특성은 단델리온의 ‘신의 계시’의 힘으로 점지받아 턴 오버 형태로 일깨운 아주 특별한 힘. 바곳과 종은 같으나 다른 길을 열지 못한 그는 결국 패배가 확정되었다.
그리고 그는 별안간 리타이어가 확실시된 상황에서 스태프를 들어 뾰족한 끝을 자신의 가슴에 찔러 넣었다.
돌발 상황에 모두가 놀라 폭죽처럼 터져 나오는 푸른빛의 투명한 액체를 바라만 볼 뿐이었다.
“왕이 되지 못한 채 다른 왕을 섬기느니… 차라리 죽고 말지….”
마지막 유언을 중얼거린 큰 바곳은 흰 빛 무리에 감싸였다. 새하얀 빛이 꼭 그 위로 하얀 천을 드리운 것처럼 보였다. 빛 무리는 몸집을 착실히 줄이더니 이내 작은 열매만 한 크기가 되었다. 그러곤 가루가 되어 사라져 버렸다.
포레스트로 끌려가느니 스스로 죽음을 택하다니. 자살하는 드라이어드는 처음 봐서 충격이 너무 컸다. 엘더가 이래서 사명도 모르는 드라이어드들은 위험하다며 고개를 저었다.
“이치를 모르고 태어나 자기 자신만 알고 지낸 드라이어드라… 먼 미래의 역사에 적당히 동종들이 모이면 깨우려고 했건만….”
파피루스가 안타까운 목소리로 혀를 찼다.
“연금탑에서 준비도 없이 태어나 버린 드라이어드들은 이렇게 제어가 안 되니 원….”
메스키트가 큰 바곳이 사라져 버린 곳을 아직도 멍하니 바라보는 나를 주시했다. 그녀는 방패를 거두고 내 어깨에 조심히 손을 얹었다. 이런 장면은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그녀도 어쩔 수 없었단 걸 잘 안다.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좀 전의 광경이 머릿속에서 희석되길 바랐다.
“바곳…. 맞아, 우리 바곳! 괜찮아?”
내 부름에 바곳이 쪼르르 내게 달려와 안겼다. 보통 이렇게 위로하듯 폭삭 안기던 건 데이지의 역할이었는데, 훌쩍 커 버린 그녀를 바곳이 대신하고 있었다. 곧 죽을 것처럼 한 번 주저앉았던 아이는 언제 그랬냐는 것처럼 멀쩡하게 내게 돌아왔다.
“어쩜 이렇게 야무지게 잘 컸을까? 특수한 힘은 나 몰래 깨운 거야? 어떻게 알았나 몰라.”
그래도 혼자 전투를 이기고 온 것이 자랑스러워 힘 있게 마주 안아 주었다.
메스키트의 눈치를 슬쩍 보면서도 어리광을 부리던 바곳은 이내 머뭇거리며 원통 유리 옆의 석판을 가리켰다. 그러곤 살짝 내 손을 잡아끌며 그곳으로 향했다.
“이게 알려 줬어요.”
바곳이 가리키는 석판은 여전히 ‘특성’ 부분에 멈춰 있었다. 아이는 우물쭈물하더니 제 발로 원통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러자 석판이 다시 한번 푸른빛에 휩싸였다.
석판을 차지하고 있던 모든 문구가 사라졌다. 그리고 처음부터 다시 작성되기 시작했다. 문구는 느릿하게 칸을 채워갔다.
그리고 놀랍게도 석판에 내 닉네임이 바곳의 이름과 나란히 존재했다.
드루이드 제이의 각시투구꽃 (Druid J’s Alpine Monkshood)
칭호: 운명을 결정하는 자
꽃말: 반드시 빛나는 아침은 온다
자생지: 스왐프 필드 (★★★☆☆)
필드 발생 확률: 없음
가치: 독, 약재 (★★★★★)
특성: 공격형(잠금) / 지원형, 회복형
최종 확정 등급: 오리지널(Original)
각시투구꽃에 백부자와 갈풀이 섞인 인공 개량종.
8월에 전투 보너스를 받는다.
사용에 따라 독이 될 수도, 약이 될 수도 있는 양날의 검 같은 꽃.
그렇기에 특성 또한 턴 오버(Turn over)형태로 함께 공존할 수 없다.
바곳, 바꽃, 울프스베인 등 부르는 이명이 많으며, 이명만큼 꽃이 가진 전설도 많다.
절박한 상황 속에서 꽃은 더욱 강하게 피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