층을 오르며 우려했던 상황이 발생했다. 바곳과 같은 종의 드라이어드를 만나는 것. 바곳의 위력은 직접 겪어 봤기에 아주 잘 알았다. 얘가 우리 편일 땐 든든한데 적으로 만나면 너무 힘들었다.
더구나 상대는 아직 소년 티를 벗지 못한 우리 바곳과 다르게 훌쩍 큰 성인으로 보였다. 장비도 저쪽이 더 화려하고. 우리 애의 미래 모습을 본 건 좋은데, 미래라는 건 저쪽이 결국 더 유능할 확률이 높다는 거잖아?
좀 전에 파피루스가 각시투구꽃 개량종에 세계수의 축복을 담는 것을 딱 한 번 성공했다고 했는데… 그 한 번이 아무래도 저 녀석인 것 같았다.
“이건 정말 역사적으로도 이례 없는 일입니다. 잠든 드라이어드가 제 힘으로 다시 깨어나다니요. 그것도 하필이면 대비가 안 되어 있는 맹독초 드라이어드라니. 위기 상황입니다. 도움을 요청해야 해요.”
파피루스가 허둥지둥 어디론가 달려가려 하자 큰 바곳이 스태프를 들었다. 옆에서 우리 바곳을 봐 왔기에 알았다. 저건 공격 모션이었다.
황급히 데이지를 부르자 그녀가 줄기를 뻗어 파피루스의 허리를 감은 후 당겼다. 파피루스가 가려던 곳에 검은 물이 퐁퐁 솟아오르고 있었다. 쟤도 같은 스킬 쓰네.
“아, 안 됩니다! 그렇게 막무가내로 독을 뿌리면 이곳에 보관된 종자들이 위험합니다!”
우리에게 끌려온 파피루스가 식은땀을 흘리며 큰 바곳에게 소리쳤다. 그는 뒤돌아 우리 어깨를 출입구 쪽으로 밀며 다급하게 말했다.
“발이 달린 당신들이라도 바삐 이곳을 나가십시오. 여기 온실을 폐쇄하면 당장 밖의 종자들은 지킬 수 있을 겁니다. 연금탑의 인간들에게 대신 이 상황을 전해 주십시오.”
“그렇게는 안 되지….”
큰 바곳의 스태프가 우릴 향했다. 여기 애들은 왜 이렇게 선빵을 좋아해?
위기 상황을 역전시킬 때마다 풍기던 강렬한 스모크 향이 코끝에 스쳤다. 순식간에 아티팩트에서 나온 메스키트가 방패를 들고 앞을 막아섰다. 큰 바곳이 움찔 놀라 뒤로 물러났다.
그때쯤 데이지와 메스키트의 무기에 감돌던 아카시아의 저주 이펙트가 천만다행으로 사라졌다.
“아… 아니, 이게 무슨…! 드라이어드라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건… 드루이드의 테라리움 아티팩트가 아닙니까?”
다음은 엘더가 뛰쳐나오려고 하는지 환하게 빛을 내는 내 아티팩트를 가리키며 파피루스가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아니, 난 아무리 봐도 드라이어드처럼 생기진 않았잖아? 몸 어딘가에 꽃이 달린 것도 아니고. 기를 쓰고 숨겼던 건 아닌데 당신이 너무 잘 넘어가 주길래.
“인간은 이곳에 있으면 안 됩니다!”
나는 말 없이 큰 바곳을 가리켰다. 인간들에게 도움 요청하라며? 내가 그나마 유일한 동아줄일 텐데. 파피루스는 큰 바곳과 나를 번갈아 바라보며 끙끙거렸다.
“인간은 안 됩니다… 종자 보관소는 최대한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도록 운영되어야 합니다….”
그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우릴 크게 말릴 생각은 없는 것처럼 보였다. 지역 하나를 통째로 말아먹었던 바곳. 저 큰 바곳이 날뛰면 그의 말처럼 피하지 못하는 식물들은 살아남을 수 없을 터였다. 아무리 같은 독초라 하더라도 드라이어드가 사용하는 힘을 이겨 낼 순 없을 테지.
“비겁하네.”
큰 바곳이 후드를 스윽 젖히며 메스키트를 바라보았다. 복슬복슬 솜사탕 같은 청보라색 머리칼이 살랑거렸다.
뒤이어 튀어나온 엘더는 사방을 둘러보더니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날 잡아끌었다.
“이런 위험한 곳까진 어떻게 온 거야? 사방이 독초잖아! 넌 닿기만 해도 피부가 짓무를 수 있는데 그렇게 무방비하게 있으면 어떻게 해?”
맨살이라고 해 봐야 얼굴뿐인데 이곳저곳을 살피는 엘더가 너무 극성맞게 보였다. 하지만 엘더의 걱정을 받는 건 기분 좋으니 잠자코 내버려 뒀다. 절절매는 얼굴이 장관이었다.
“이건 왕의 자리를 놓고 겨루는 동종끼리의 결투야. 다른 드라이어드가 개입하는 건 왕으로 인정될 수 없어.”
큰 바곳이 한 자 한 자 짓씹듯 말하며 우리 바곳을 노려보았다. 아니 언제 왕위 쟁탈전이 됐니? 다짜고짜 공격한 건 덩치 큰 너잖아.
“흠, 같은 각시투구꽃 개량종이었나요? 한 그루가 더 있을 줄은 몰랐군요.”
“뭐? 세계수의 순리를 배반한 녀석이 또 있다고?”
메스키트와 엘더의 말에 큰 바곳이 턱을 치켜들었다.
“흥, 이제 레포르마 각시투구꽃 드라이어드는 유일무이, 나 하나로 끝날 거다. 가소롭게 고귀한 내 자리를 노리다니.”
그가 우리 바곳을 스태프로 가리켰다. 우리 바곳을 지명해 당장 나오라는 뜻처럼 보였다.
“포레스트의 왕을 놓고 겨루는 결투인가요? 그렇다면 동종끼리만 싸우는 게 맞긴 합니다.”
메스키트가 등 뒤로 바곳을 슬쩍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 엘더는 자기 야생종 찾으러 나비 따라가자고 그렇게 난린데, 이런 곳에서 바곳은 우연찮게 동종을 만나다니.
포레스트라…. 메스키트가 롬가토의 연구실에서 말했던 것을 생각해 보면 바곳이 저 큰 바곳을 포레스트에 둔다면 정말 강해지긴 하겠지. 파피루스의 말에 따르면 각시투구꽃 개량종이 드라이어드화 된 것은 여기 둘이 전부인 것으로 보이니까.
“그래서… 내 주인, 제이. 어떻게 할 건가요? 여기서 포레스트의 왕의 자리를 두고 겨루게 할 건가요?”
우리 바곳의 진화 기회가 온 것은 두 손 들고 환영할 일이지. 하지만 상황이 영 애매하지 않나? 파피루스가 수를 써 연금탑의 사람들이라도 불러온다면….
아무 말 없이 조용한 파피루스를 바라보았다. 그는 자신보다 작은 데이지의 뒤에 숨어 출입구를 힐긋힐긋 바라보고 있었다. 도망치게 두면 안 되겠는데.
“데이지, 저 드라이어드가 못 도망가게 잘 잡고 있어.”
“네! 꽉 붙들어 매고 있을게요!”
“왜… 왜 이러십니까! 전 기록에 특화된 드라이어드라 전투력이 없습니다! 이렇게 막 다루시면 약한 저는 마른 나뭇가지처럼 똑 부러져 버립니다! 저는 수백 권의 책보다 가치 있는 드라이어드라고요!”
“여길 나가서 사람들이라도 불러오면 큰일이잖아?”
“애초에 여긴 인간이 와선 안 되는 곳입니다! 그러니 당신은 나가야 하는 것이 이곳의 규칙….”
메스키트가 철컥하고 랜스를 소리 나게 꺼냈다. 그것이 전부였지만 파피루스에겐 커다란 위협이 되었는지 입을 꾹 다물어 버렸다.
“제이 님…. 제가 혼자 해 볼게요. 왕의 자리를 뺏기고 싶지 않아요….”
바곳이 커다란 안경을 고쳐 쓰며 주섬주섬 앞으로 나아갔다. 그 모습에 큰 바곳이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씩 웃었다.
“그렇게 나와야지.”
큰 바곳은 스태프를 들지 않은 손을 펴고 손가락을 차례로 까딱 움직였다. 그때였다. 아까처럼 웅웅거리는 기분 나쁜 진동이 주위를 감돌았다.
파피루스는 이젠 데이지의 줄기를 생명줄처럼 붙들고 절망이 흘러 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아… 쉽지 않을 거예요. 이곳 종자 보관소의 설립 역사에 따르면…. 이 장소는 각시투구꽃 개량종의 아티팩트 안입니다. 강한 독으로 독을 제압하기 위해 이곳을 통째로 아티팩트에 담아놨습니다.”
그걸 이제 말하면 어떡해!
곧이어 내부의 식물들이 빠른 속도로 시들어 가며 바닥에 검은 물의 웅덩이가 고이기 시작했다. 마치 바곳을 처음 만난 장소인 죽음의 늪처럼. 눅눅하고 끈적거리는 공기, 풀어헤친 머리칼처럼 늘어진 덩굴들. 끔찍한 장소가 재현되고 있었다.
“아아…. 안 돼! 소중한 종자들이…!”
파피루스가 발만 동동 굴리며 애처롭게 소리쳤다.
엘더가 황급히 바닥이 멀쩡한 곳으로 날 잡아끌며 혀를 찼다. 다들 떠오른 것이다. 그날의 광경이.
“다른 녀석들이 조금이라도 전투를 거들어 준다면 넌 진 거야.”
큰 바곳이 웃음이 담긴 느릿한 목소리로 우리 바곳을 향해 말했다.
치사한 놈! 지는 아티팩트 안에서 싸우면서 이게 어딜 봐서 공평한 싸움이냐!
둘의 종이 같기에 동일한 자생 필드가 구현된다 하더라도 한쪽은 최상의 컨디션으로 전투에 임하게 된다. 우리 데이지가 하얀 데이지에게 애먹었던 만큼 바곳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독과 독의 싸움의 승자는 어떻게 결정되는지 알아? 더 강한 독이 살아 남는다.”
바곳이 그의 말에 스태프를 꼭 쥐었다. 바곳의 스태프에 활짝 피어 있던 민들레꽃이 봉오리를 오므렸다. 스스로 공격형으로 전환한 것이다. 아이는 날 한 번 바라보곤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아냐…. 독의 무서움은 그게 아니랬어.”
목소리 크기부터 졌는데 우리 바곳이 잘할 수 있을까? 우린 온갖 맹독 디버프가 오가게 될 전투에 새우 등 터지지 않도록 멀찍이 물러났다.
사방이 독 웅덩이라 실상 안전한 곳은 없었다. 단델리온이 준 파나케이아도 다 써 버렸고, 이젠 디버프 해제가 가능한 바곳은 전투에 임해야 하고. 정말 답도 없네.
큰 바곳이 스태프를 들자 꽃이 매달린 곳에서 보라색 빛 무리가 하늘하늘 피어올랐다. 우리를 괴롭혔던 나방을 닮은 그 빛 무리였다. 우리 바곳이 이에 질세라 스태프를 들었다. 진정한 미러전이 시작되었다.
다만 이곳은 큰 바곳의 아티팩트 안. 모든 디버프 공격이 큰 바곳에겐 무효화되는 공간이었다. 카나비스 드라이어드가 그랬던 것처럼 내성이 강한 쪽엔 독이 통하지 않으면 모르겠는데…. 우리 바곳이 저 드라이어드보다 내성이 강할까?
바닥에선 누가 사용했는지 모를 검은 물이 온천수처럼 솟아오르고 사방엔 끔찍한 청보랏빛 나방이 날아다녔다.
메스키트가 모래 벽을 세우고 엘더가 루비 반지의 힘으로 방어막을 쳐 간신히 주변의 독 영향력을 낮추고 있었다.
파스스, 하고 벽에 부딪혀 바스라지는 나방 빛 무리의 소리가 들릴 때마다 파피루스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데이지는 높은 생명력으로, 메스키트는 저항력으로, 엘더는 회복력으로 버텼지만 내 드라이어드도 아니고 자신의 말론 전투력도 없다는 그는 매우 힘겨워 보였다.
사실 제일 위험한 것은 평범한 인간인 나였지만, 파피루스보다 영향을 덜 받고 있었다. 중독 디버프에 걸리는 건 어떤 느낌일까 궁금했지만 굳이 나서서 확인하고 싶지는 않았다.
엘더의 투명한 방어벽 너머로 가슴을 쥐고 헐떡대는 우리 바곳이 보였다.
이런! 우리 애가 성장하긴 했어도 큰 바곳의 독을 이겨 내기엔 부족했나 보다.
아이일 땐 울보 겁쟁이긴 했어도 공격형이 되면 무시무시한 위력을 자랑하던 바곳이었다. 항상 주변을 초토화시키는 모습만 봐 오다가 저렇게 위기에 몰리는 모습을 보니 당혹스러웠다. 아이가 만날 수 있는 가장 큰 벽을 만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건 바곳에게 영혼의 연결을 집중해 팀의 메인을 그로 돌려 공격력을 높여주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애초에 상대가 바곳의 유일한 무기인 중독 디버프가 걸리지 않으니 답이 없었다. 그래도 바곳은 끊임없이 자신의 모든 기술을 선보이며 그를 공격하고 있었다.
스스로 지원 회복형으로 전환하여 디버프 해제를 하면 될 터인데 어째서인지 바곳은 그러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더 많은 나방 빛 무리를, 신비롭게 보이는 입자가 고운 청보라색 가루를 뿜어내고 있을 뿐이었다.
바닥이 점점 더 독 웅덩이들로 가득 차 진탕이 되자 도구들이 즐비한 책상 위로 뛰어올라 간신히 웅덩이를 밟는 것을 피해야만 했다.
중독 디버프의 무서운 점은 중첩이었다. 굉장한 힐링을 사용할 수 있는 엘더도 결국 자신의 힐량을 뛰어넘는 도트 딜 공격에 무릎을 꿇을 정도로, 시간이 배가 될수록 산더미처럼 거세지는 딜량에 맞서야 하는 게 가장 무서웠다.
지금 바곳은 아직 제대로 싸우는 법을 몰라서 헤맨다기보단 쌓이는 디버프를 오기에 가까울 정도로 견뎌 가며 독을 내뿜고 있었다. 대체 무슨 생각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