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7화 (137/604)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 그나저나 우리가 그 침입자인데 이래도 돼요?”

낌새를 보아하니 우릴 신고해 넘길 것 같진 않았다. 꼭 우릴 도와주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물론… 안 되죠. 연금탑 소속으로서 규정은 지켜야 하니까요. 하지만 전 어차피 곧 죽으니… 뭔들 못 하겠습니까? 인동덩굴 드라이어드와의 인연을 정리해 주신 드루이드님께 은혜를… 갚아야 한다 생각했습니다.”

은혜는 어닝의 강연 티켓으로 이미 갚은 것 같은데.

“인동덩굴? 설마 우리 금은화를 말하는 거야?”

윈터는 어닝을 슬쩍 보며 말했다.

“어닝 님도 금은화 드라이어드를 데리고 계실 줄은 몰랐네요. 죽기 전에 어닝 님에 대해 조금이라도 더 알게 되어 영광입니다. 제가 말하는 건 연금탑 뒷동산에 홀로 떠도는 금은화 드라이어드입니다.”

그 말을 들은 어닝의 표정이 밝아졌다.

둘은 심각한 상황과 다르게 금은화로 이야기 꽃을 피웠다. 내게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하던 어닝은 제법 윈터의 대화에 잘 어울려 주었다.

“그 꽃이 바로 내 꽃이야. 다시 데리러 왔단다.”

“그러셨습니까? 하지만 왜 드라이어드를 홀로…. 물론 제가 위대한 어닝 님의 심중을 다 알진 못하나 한시바삐 데려가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참 착하고 사려 깊은 드라이어드였습니다.”

“그래, 우리 꽃이 심성이 참 고운 꽃이긴 하단다. 내 꽃은 잘 있었니? 내가 너무 오래 홀로 두어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란다.”

좀 전에 분명 최대한 신중하고 조용하게 움직여야 한다고 하지 않았나요? 우린 소풍 온 것이 아닌데요.

“우리 꽃은 만병을 다스릴 줄 아는 능력 있는 꽃이란다. 모체의 선조가 꽃잎 한 장만으로 세상의 모든 병을 치료할 수 있었다는 신화가 있지.”

“역시 대단한 꽃이네요. 금은화는 분명 육체의 병뿐만 아니라 마음의 병도 치유할 수 있는 대단한 드라이어드인 것 같습니다.”

극성 학부모의 모습이 저러할까. 우리 애들을 극진히 아끼는 나도 남들이 보면 저렇게 보일까? 잔혹하기 그지없는 일을 저지른 어닝이었지만 아무리 봐도 자신의 것이라면 엄청난 애정을 보였다.

계속 걷던 윈터는 어느 덤불 벽 앞에서 멈춰 섰다. 식물들이 잔뜩 뒤덮인 것 외엔 주위의 풍경과 비교하여 특별한 것은 없는 지점이었다. 그가 벽에 손을 대자 갈라진 틈이 생기더니 스르르 옆으로 밀려났다.

문이었구나. 저렇게 위장하고 있으니 찾질 못하지. 그렇다면 나와 어닝이 걸었던 복도의 어딘가에도 이처럼 문이 존재하고 있었겠네.

“지금은 주인 없이 비어 있는 연구실입니다. 제 연구실까지 가기엔 위험이 따르니… 이곳에 숨어 계시면 당장은 들키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주변을 수색 중이라…. 두 분을 찾은 건 성능 테스트실에 문제가 생겼다는 이야기를 듣고 직감적으로 알게 된 것입니다. 인지할 수 없는 드라이어드가 나타나서 오류가 발생했다고 했습니다.”

인지할 수 없는 드라이어라면… 우리 바곳을 말하는 거구나. 이상하긴 했다. 드라이어드가 나서는 족족 가상 아티팩트를 불러오던 공간이 바곳에게만큼은 반응하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연금탑에 침입할 생각을 하시다니… 너무 무모하셨습니다. 이곳은 테라리움에서 가장 엄중하게 관리되는 장소입니다.”

“알고 있기에 이곳으로 온 거란다.”

윈터를 대하는 어닝의 말투는 아주 조금 누그러져 있었다. 금은화와 인연이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으로 보였다.

“무엇을… 어떤 연구를 훔치러 오신 겁니까?”

“이곳에 흥미 있는 연구는 없단다. 오히려 이 연금탑이 내 연구를 훔쳤지.”

“네? 감히 어닝 님의 연구를 훔쳤다고요…?’

하지만 어닝은 딱히 그 질문에 답을 해 주진 않았다.

그나마 안정적인 공간에 숨이 트였다. 빈 연구실에 온 후 내 드라이어드들은 모두 아티팩트 밖으로 나왔다. 만일의 위험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난 텅 빈 책상에 앉아 있는 어닝에게 다가갔다.

“어닝, 맹독초가 다 타 버린 걸 눈앞에서 봤다고 말했지? 그거 16번째 연금탑에서 28번째 테라리움으로 보낸 맹독초를 말하는 거지? 당신이 왜 그 자리에 있었던 거야?”

어닝은 날 빤히 바라볼 뿐 역시나 말하지 않았다.

“스케어크로우의 일지를 봤어. 그녀는 단순히 약속된 날에 도착하지 않았다고만 알고 있었고 불에 탄 사실은 몰랐어. 하지만 당신은 알고 있는 눈치고. 당신 짓이야?”

마차에서 발견된 새의 깃털은 파필리온이 데리고 다니던 새의 색깔과 유사했기 때문에 그의 짓일 거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세계수의 가지에 벌레를 풀었던 어닝이 그 자리에 있었다면…. 그녀도 범인일 확률이 높았다.

둘은 과거 한패였을 확률이 높다? 하지만 지금 꼴을 보면 어닝의 배신?

“말했지. 모든 이야기는 내 금은화를 되찾아야 해 주겠다고.”

저 머릿속을 열어서 낱낱이 확인하고 싶다. 진짜 까다롭게 구네.

“저… 그래서 이제 두 분은 어쩌실 거죠? 연구를 훔치러 오신 게 아니라면 이 연금탑에 굳이 오신 이유가…. 아니 그것보다 어떻게 빠져나가실 겁니까? 계획이라도 있으세요?”

문 옆에 팔짱을 끼고 기대선 윈터가 초조한 기색으로 물었다.

“당장 계획은 없어. 나가는 건 어렵겠지. 갑자기 테라리움에 큰 폭발이라도 발생해서 모든 인력이 그쪽에 집중되지 않는 한.”

“아니, 윈터. 연구물을 훔치러 온 거 맞아요.”

내 말에 어닝은 무슨 헛소리를 하냐며 흘겨보았고 윈터는 ‘그럼 그렇지’란 얼굴이 되었다.

“연금탑 꼭대기에 종자 보관소가 있죠? 그것도 인공 개량된 종들의 정보들이 저장된 곳 말이에요.”

“그… 그걸 어떻게…?’

안 그래도 창백한 윈터의 얼굴이 더욱 하얘졌다. 잘못한 것을 들킨 얼굴. 인공 개량이 금지된 일인 것을 알고 있는 눈치였다. 연금술사가 아닌 단순 연구원인 윈터가 알고 있다는 건, 어쩌면 연금탑 내의 모든 인물이 공범이란 것과 다름없었다.

“각시투구꽃 개량종에 대해 알고 있나요? 물론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인공 개량된 각시투구꽃이요.”

“그걸 이제 와서 어쩌려는 건데? 왜? 아직도 28번째 테라리움에 그것들이 기승을 부려?”

어닝이 빈정거리는 투로 물었다.

난 바곳을 어깨를 한 팔로 끌어안고 어닝에게 잘 보라는 듯 가리켰다.

“내 소중한 드라이어드에 대해 알고 싶으니까.”

“뭐?”

“약속된 기한을 넘겼지만 수년을 돌고 돌아 이제 28번째 테라리움에 겨우 도착한 그 맹독초 아이야.”

어닝이 툭 책상에서 내려와 섰다. 그리곤 바곳을 향해 윽박질렀다.

“대체! 어디에 있었던 건데? 그래도 희망을 안고 주변을 전부 뒤졌는데 분명 어디에도 없었어. 너만 제때 도착했으면 크로우가…!”

“뭐 하자는 거야? 왜 우리 애한테 소릴 질러?”

바곳을 내 등 뒤로 보내 감췄다.

“한 송이가… 한 송이가 남아 있었다고? 딱 한 송이만 있었어도 됐어. 한 송이만 있었어도 크로우는 살 수 있었어.”

“28번째 테라리움에 깽판 쳐 놓은 건 당신인데 개소리 하지 마. 세계수의 가지에 벌레를 풀어서 힘을 잃게 만든 것도 당신이고 그 때문에 불이 쳐들어와서 스케어크로우를 죽게 만든 것도 당신이잖아!”

어닝이 표독스럽게 날 노려보았다. 내 말이 끝나자마자 묵직한 랜스가 날카로운 바람 소리를 내며 곁을 스쳐 지나갔다. 어닝의 앞을 잽싸게 막아선 극락조화 드라이어드의 팔이 대신 꿰뚫렸다. 랜스의 주인은 분노한 눈으로 어닝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안 돼! 내 꽃에게 무슨 짓이야!”

어닝이 극락조화 드라이어드를 껴안고 울부짖었다.

“세계수의 가지에 용서받지 못할 짓을 한 것이 당신인가요?”

아차, 대강당에서와 다르게 이곳엔 메스키트가 있었다. 그녀가 분노할 것은 예상했으나 이처럼 돌발 행동을 할 줄은 몰랐다.

“드라이어드는 세계수에 위협이 되는 존재를 처단하는 것이 사명. 그것이 불이 아닌 세계수의 축복을 품은 드루이드라 할지라도.”

메스키트가 힘을 주자 끔찍한 소리를 내며 극락조화의 팔이 뒤틀렸다. 새의 날개를 닮은 옷이 드라이어드의 피로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고치려고 했어! 정말 힘을 다 잃어버리기 전에 맹독초로 벌레들을 치우려 했단 말이야. 단지 너무 빨리 들켜 버려서….”

어닝의 목소리에 물기가 어렸다. 그녀는 주인을 피신시키려 밀어내는 드라이어드를 힘주어 끌어당기며 죽을 것같이 아픈 얼굴을 했다. 마치 공격을 받은 것이 자신이라도 되는 것처럼.

어닝의 말은 정말 하나같이 의문투성이였다. 벌레를 푼 것도 그녀, 퇴치하려고 한 것도 그녀. 그러면서도 중요 핵심은 이야기하지 않고 입을 꾹 다물어 버린다.

“너무 소란이 크면 들킵니다….”

윈터가 이쪽을 보며 잔뜩 겁에 질린 목소리로 말했다.

“메스키트….”

“내 주인, 제이. 이 자는 위대한 세계수를 적대한 자예요. 내 작은 세계수에게도 그러지 말란 법은 없답니다. 여기서 싹을 잘라 버려야 합니다.”

“메스키트의 말이 맞아. 세계수의 가지를 죽인 자라며? 저렇게 위험한 드루이드인 걸 알았다면 너와 단둘이 두지 않았을 거야.”

메스키트의 말에 엘더가 동조하자 분위기가 더욱 험악해졌다.

“물론 끔찍한 사람이긴 한데… 그래도 아직 난 저 사람이 필요해. 알고 싶은 것이 있어. 그걸 알고 나면 메스키트가 신념을 따라 행동해도… 돼. 다신 저 사람과 단 둘이 있지 않을게. 지금은 날 봐서 한 번만 봐줘.”

메스키트는 내 말에 곧바로 랜스를 거두었다. 당장 이 자리에서 죽여야만 성에 찰 것처럼 굴어도 내 말에 기꺼이 분노를 거두어 준 것이다.

“당신 정말 웃기네. 금은화를 찾더라도 이야기를 털어놓고 나면 죽는 목숨인데 내가 해 줄 것 같아?”

“그럼 여기서 지금 죽든가. 당신의 잘난 머리가 무기라고 했지? 난 여기 내 드라이어드가 무기야. 정보가 아니라 당신의 생명 줄을 쥐고 있어. 봤으니까 알 거 아냐? 당신 드라이어드가 저항도 못 하고 팔을 잃을 뻔한 거.”

솔직히 나도 놀랐다. 전투에서 본 어닝의 드라이어드들은 정말 강했다. 극락조화 드라이어드가 비록 지원형에 방심한 상태라 해도 단숨에 치명상을 입을 정도로 메스키트는 강력했다.

“스케어크로우라면 당신같이 굴지 않았을 거야.”

“난 스케어크로우가 아냐. 같은 28번째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원이고 날 보면서 그녀의 좋은 부분을 떠올리는 건 상관없는데, 그렇다고 내가 그녀를 대체하는 건 아냐. 난 나야.”

무슨 당연한 소리를 하고 있어? 내가 스케어크로우를 닮았다고 하더니 멋대로 그녀를 내게 잣대로 들이미네.

“윈터, 꼭대기 층의 종자 보관소에 가는 방법을 알아요?”

“전 접근 권한이 없습니다…. 단순히 위로만 올라간다고 갈 수 있는 곳도 아니에요. 그것보다 정말… 그 드라이어드가 인공 개량된 꽃에서 태어난 드라이어드가 맞습니까? 종자 보관소에서 엄중하게 관리되고 있어야 할 것이 어떻게 드루이드님의 손에 있는지 의문이네요….”

아, 윈터의 도움을 받을 수 없다니. 이제 어떻게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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