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관처럼 보이는 길쭉하고 하얀 모자를 쓰고 사제들이 입는 것과 같은 새하얀 로브를 입은 쌍둥이 드라이어드가 나타났다.
모자는 방울방울 맺혀 아래로 늘어지는 하얀 꽃들로 장식되어 있었는데 그 모습이 무척이나 성스러워 보였다.
엘더처럼 티 없이 깨끗한 하얀 머리에 연분홍 눈을 한 아름다운 드라이어드들이었다. 그러나 외형만 봐도 엘더 플라워 종이 아닌 것은 알 수 있었다.
진화된 엘더의 모습을 볼 수 없어서 아쉬웠다. 역시 유니크 등급이라 희귀한 걸까?
다른 층과 달리 드라이어드가 둘이나 나왔으나 날개가 없는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다만 연리지 효과를 받는 드라이어드들일 확률이 높아 결코 쉽지 않은 전투가 될 것 같았다.
“아는 애들이야?”
“자존심 상해. 쟤들이 내게 대응하는 드라이어드라는 거야?”
엘더가 내게 툴툴거렸다. 왜 내게 쫑알거리니? 쟤들을 내가 소환했니?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새하얗고 아름다운 걸 보면 얼추 너랑 비슷한 것 같은데? 저기 같이 서 봐라. 제3자가 보면 셋이 한패라 생각할걸?
하지만 어이없게도 소환된 두 드라이어드 역시 엘더를 참 못마땅한 눈으로 바라봤다. 쟤들 역시 자신들이 엘더에 대응하여 나왔다는 것에 자존심이 상한 것처럼 보였다. 왜 사이가 안 좋니?
“너도 그렇고 도깨비바늘도 그렇고. 저 둘도 힐러로 보이고. 내가 여태 만난 힐러들은 왜 그렇게 성격이 괴랄해? 원래 회복형들이 좀 그런가?”
회복형인 민들레 아이들이 떠올랐지만 아직 어리니 판단 보류다. 하지만 둘이 티격태격하는 걸 보면 메스키트나 데이지와 비슷한 성격을 기대하는 것은 글렀다.
“내가 뭐 어때서?”
“원래 본인은 몰라.”
두 드라이어드는 엘더처럼 스태프를 든 것이 아니라 금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달걀 모양의 하얀 구슬을 두 손으로 들고 있었다. 모자에 달린 것과 같은 꽃들이 구슬에서 시작되어 드라이어드의 발끝까지 길게 아롱아롱 늘어져 있었다.
저런 거추장스러운 무기를 사용하는 것을 보니 움직임이 적은 애들인가?
“여기서 귀한 얼굴들을 보네, 아카시아 나무라니. 아름다운 외형과 달콤한 향기. 둘 모두 내가 꺾어 가고 싶을 정도로 욕심이 나.”
지켜보던 어닝이 흥미가 가득 담긴 눈을 빛내며 드라이어드들을 바라보았다. 아카시아 나무라고? 익숙한 달짝지근한 향기라 했더니 껌 냄새 같기도 하고. 아카시아는 이름은 많이 들어 봤지만 꽃을 실제로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정말 예쁜 꽃이었구나.
하지만 소리 내어 꽃이 이쁘다 칭찬하면 엘더가 삐질 것이 분명하므로 입을 다물었다. 안 그래도 주둥이 댓 발 나와 있는 애를 자극해 봤자 나만 피곤했다.
“힐러 둘이면 솔직히 까다롭긴 한데…. 공격형들만큼의 위력을 내진 못할 테니 빨리 끝내 버리자.”
내 말에 엘더가 그 어느 때보다도 의욕을 보이며 스태프를 들었다. 엘더의 아낌없는 지원을 받은 데이지가 날개 달린 꽃처럼 종횡무진했다.
아카시아 드라이어들은 무척이나 화려한 장비와 무기를 사용하는 만큼 그것들이 움직임의 제약이 될 수 있겠다는 내 생각은 맞았다. 두 아카시아 나무는 큰 저항 없이 데이지의 공격을 모두 얻어맞았다.
하지만 양쪽 모두 회복형인 것이 조금 까다로운 게 아니었다. 아주아주 까다로웠다.
한쪽이 얻어맞으면 반대쪽이 회복과 보호를 지원한다. 얻어맞은 놈도 미친 듯이 자힐을 한다. 죽여도 안 죽는 좀비 싸움이 될 거란 예상이 맞았다. 그 어느 때보다도 전투를 장기전으로 끌고 갈 수 있는 드라이어드들이었다.
우리 쪽에 피해는 없는데 반대로 적도 안 눕는다. 둘이 고급 힐러이기에 회복력도 장난 아니었다. 아티팩트 공간에서 디버프 공격이 통하지 않는 것이 확인된 바곳 때문에 사실상 공격형은 데이지 하나였다. 어닝은 절대 협력해 주지 않았고 데이지 혼자 용을 써야 했다.
“갑자기 지진이?”
시간이 지나자 방 안에 변화가 생겼다. 층을 올라가면 바닥이 다시 닫혔는데, 이 바닥이 다시 열리기 시작한 것이다. 나와 어닝이 황급히 발을 디딜 수 있는 곳으로 피했지만 바닥은 점점 많이 열리기 시작했다. 밑을 보니 여태 지나 온 층들의 바닥이 전부 열리고 있었다. 한 번 떨어지면 맨 아래층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아카시아 드라이어드들은 발밑에 디딜 곳이 없어도 허공에 둥둥 떠 있었다. 즉 떨어지는 것은 우리뿐이란 것이었다. 시간이 지체되면 위험한 건 마찬가지면서도 어닝은 공연 관람하듯 전투를 구경할 뿐 결코 도와주지 않았다. 진짜 치사하다.
열심히 힘을 내던 데이지가 기어코 두 드라이어드 중 하나를 눕히는 것에 성공했다.
보통 쓰러진 드라이어드들은 빛에 감싸여 열매가 되고 그 열매가 가루가 되어 사라졌는데, 아카시아 드라이어드는 그 절차를 밟지 않았다. 그걸 수상하게 생각해 좋지 않은 느낌이 들었는데… 들어맞았다. 왜 매번 안 좋은 예감은 현실이 될까.
10초 정도 지났을까? 쓰러진 드라이어드가 흰 꽃잎이 감싸이더니 다시 일어난 것이다.
“아… 나 저거 알아….”
두 놈이 같이 나오기에 연리지라 생각은 했지만 이런 기믹까지 나올 줄은 몰랐지. 게임에서 보스 몬스터를 상대할 때 비슷한 두 놈이 같이 나오면 자주 사용되는 기믹이 있었다.
양쪽을 동시에 피를 깎아서 함께 처리하지 않으면 제한 시간이 지난 후 다른 한 놈이 부활하는 성가신 기믹이었다.
보통 딜러들의 딜컷(적이 적당한 HP가 됐을 때 공격을 중지하는 것) 센스와 폭딜(짧은 시간 동안 엄청난 공격을 쏟아붓는 것) 능력을 시험하는 기믹이었다.
여기서 데이지가 양쪽을 번갈아 치며 딜컷을 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얻어맞는 족족 피를 채워 버리니 때리다 방치하면 어느새 풀(full)피가 되어 있었다. 결국 고민 끝에 비장의 카드를 꺼냈다. 아티팩트에서 메스키트가 나타나자 아카시아 드라이어드들의 안색이 확 달라졌다.
우리 메스키트는 방어형이지만 너무 강해서 공격형 수준이었다. 이전까진 메스키트를 제외한 팀의 연계 전투도 나쁘지 않아 그녀가 굳이 나설 필요는 없었는데,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하지만 메스키트와 데이지의 전투력에도 우위는 있었다. 둘이 동시에 처리하려면 밸런스를 맞춰 주어야만 했다. 가막살나무가 다시금 등판해 데이지를 서포트하고 메스키트가 적절히 힘 조절을 하며 겨우 층을 클리어할 수 있었다.
아카시아 드라이어드들을 쓰러뜨리고 나자 메스키트와 데이지, 가막살나무에게 이상한 변화가 생겼다. 분명 해치웠음에도 불구하고 아카시아 꽃잎이 남아 세 드라이어드의 무기 주위를 빙글빙글 돌았다.
“이게 뭐야?”
“당신은 공부가 좀 필요하겠는걸? 내가 그래서 구태여 내 드라이어드들을 아카시아와의 전투에 내보내지 않은 거야. 똑똑한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상식이 너무 부족하네.”
진짜 얄밉다. 하지만 상식 부족은 맞으니 팩트로 뼈를 맞았을지언정 부정은 않겠다. 꼭 똑똑해져야지. 똑똑해져서 다 부숴 버릴 거야.
“꽤 강해서 신화의 힘을 일깨운 꽃들일 수 있겠다 싶었지. 아카시아의 신화는 비극적이지만 아름다워서 음유시인들의 단골 소재로 쓰여 드라이어드들의 신화 중 세간에 가장 잘 알려져 있어. 먼 옛날 앞을 못 보는 인간을 사랑한 나무가 제 아름다운 꽃으로 꾀려 해도 그의 눈에 보이지 않아 통하지 않으니, 가진 모든 것을 신께 내어 주고 황홀할 정도로 달콤한 향기를 얻게 되었대.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인간은 후각까지 잃은 자였거든. 결국 그 무엇으로도 인간에게 사랑을 표현하지 못하고 죽었는데, 죽기 전 행여 자신 말고 다른 꽃에 그 인간의 손길이 닿을까 주변의 모든 꽃들을 죽이고 함께 죽었다는 거야.”
“다 죽이고 자신도 죽은 것이 대체 어디가 아름다운 거야…?”
“그게 중요하니? 당신의 꽃들에게 아카시아 꽃들이 신화의 힘으로 저주를 걸고 죽었는데. 드루이드에게 사랑받지 못하도록 전투력을 약화시킨 거야. 하지만 뭐, 이미 죽은 꽃들이라 오래가진 않겠지.”
헐, 저주를 걸었다고? 그것도 전투력 약화 디버프라니. 그럼 어닝은 그걸 미리 알고 있으니 자신은 발을 뺀 거였어? 진짜 치사하다.
디버프래서 아티팩트로 돌려보내 봤지만 무기를 휘감은 꽃잎이 사라지지 않았다. 아 씨, 잘못 걸렸네. 시간이 지나면 사라진다곤 했지만 그게 언젠데?
메스키트는 드라이어드들의 신화를 다른 종이 알 리 없으니 방비할 수 없어서 안타깝게 됐다고 말했다. 인간들 사이엔 유명해도 드라이어드들 사이에서도 유명하란 법은 없으니까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 애초에 신화를 알아도 죽기 전 저주를 내리는 스킬을 어떻게 파악했겠어.
“어때? 많이 약해진 것 같아…?”
내 전력들이 문제가 생겼다고 하니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하지만 메스키트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을 했다. 단도를 보며 알쏭달쏭한 표정을 짓는 데이지와 달리 메스키트는 약화 디버프에 걸려 봤자 여전히 자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도 메스키트는 다음 층을 대비해 다시 아티팩트로 돌아가야만 했다.
이제 그다음 층을 위한 마지막 티켓은 바곳. 엘더의 티켓이 좀비 랜드 관광 티켓이었으니 바곳은 뭐가 튀어나오려나?
불안한 마음으로 바곳을 앞세웠는데 예상과 달리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드라이어드를 인식하기가 무섭게 꽃이 피거나 나무가 자라던 것과 다르게 조용했다. 바곳은 아직 한 번도 나선 적이 없는데?
“뭐지? 왜 우리 바곳은 반응이 없지?”
“그게 바곳이라고? 투구꽃?”
어닝이 의아한 눈으로 바곳을 보며 물었다.
“투구꽃은 나도 잘 알지. 하지만 내가 아는 것과는 종이 좀 달라 보이는데?”
“정확히는 각시투구꽃인데.”
‘근접’이지만. 내 말에 어닝의 얼굴이 매섭게 변했다. 그녀는 곧 다급하게 바곳의 양어깨를 붙들었다. 바곳이 조금 겁먹은 얼굴로 어닝을 바라보았다.
“이게 각시투구꽃이라고? 설마? 아냐, 그럴 리 없어. 그래…. 그 맹독초일 리가 없지.”
혼자 중얼거리다 결론을 내린 그녀는 바곳의 어깨를 붙들었던 속도만큼 빠르게 떨어졌다. 그런데 그녀가 자신이 서 있던 자리로 돌아가며 중얼거린 말만큼은 놓칠 수가 없었다.
“다 타 버린 걸 눈앞에서 봤으니까.”
타 버렸다고? 타 버린 맹독초? 그 사건을 알아? 그것도 눈앞에서 봤다고? 그녀에게 물으려 할 때 갑자기 벽이 진동했다. 천장이 열릴 때와는 느낌이 달랐다. 벽의 문이 열리자 누군가 빛을 등지고 서 있었다. 아는 얼굴이었다.
“윈터?”
“아… 역시나 드루이드님이셨군요.”
동산을 내려오자마자 헤어졌던 그가 여기 있었다. 연금탑 소속 연구원이라고 했으니….
그는 여전히 힘겹게 숨을 쉬며 헤어질 때와 마찬가지로 음울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연금탑 내에 침입자 경보가 내려졌는데… 인상착의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드루이드님이시라…. 그런데 다른 한 분이 연금술사 어닝 님이실 줄은 꿈에도 몰랐네요. 상황이 좋지 않지만… 어닝 님, 팬입니다. 무척 존경하고 있습니다.”
그는 우리를 텅 빈 공간에서 밖으로 안내해 주었다. 드디어 돌벽 감옥이 아닌 사방이 푸른 곳으로 빠져나왔다. 그나저나 벽을 통해 나올 수 있긴 했구나. 위로만 갈 수 있는 줄 알았지.
“일단 두 분 모두 드라이어드들은… 아티팩트로 돌려보내 주시겠어요? 최대한 신중하고 조용하게 움직여야 합니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더니 우리를 어디론가 이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