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잖게 흔들리는 벽과 천장에서 작은 잔해들이 떨어졌다. 데이지가 움직일 수 없는 날 온몸으로 보호했다. 이대로 무너지기라도 하나 싶었는데 엘리베이터 문처럼 천장의 가운데가 갈라지고 천천히 열렸다.
“제이!”
너무나도 반가운 소리가 위에서 들려왔다. 떨어진 시간이 1년과도 같이 길게 느껴졌던 내 드라이어드들이었다.
“멀쩡하네. 데이지와 함께 간 것이 천운이었어.”
조금 지쳐 보이는 어닝이 우리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어찌 함께 끌려갔던 그들이 위층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다시 만났으니 됐다.
“데이지가 성목이 됐네?”
“네! 처음 열매에서 나왔을 때의 모습으로 돌아왔어요!”
엘더의 말에 데이지가 해맑게 웃으며 답했다. 이 사랑스러운 데이지가 이렇게 자라기까지 얼마나 끔찍한 일이 있었는지 아무도 모를 것이다.
내가 배를 끌어안고 끙끙대는 모습에 드라이어드들이 걱정하는 낌새를 보였다. 데이지가 활약할 때 내가 한 일이라곤 걷어차이고 뒈질 뻔한 일밖에 없으니 최대한 의연한 척해야지. 걱정할 테니 아픈 모습 보이지 말아야지.
그렇게 마음먹었지만 10초도 가지 못했다. 데이지의 도움을 받아 위층으로 끌어 올려질 때 괴성이 튀어나왔다.
“으억!”
드라이어드들과 다시 재회하니 긴장이 모두 풀린 것인지 미친 듯이 고통이 밀려왔기 때문이었다. 내가 가진 응급 구조 키트는 외상을 치료해도 속이 다친 것을 치료해 주진 않았다. 하다못해 진통제도 없었다.
“제이! 무슨 일이에요?”
데이지조차 내가 이렇게 심각한 상태인지 전혀 몰랐다는 듯 크게 충격을 받은 얼굴이 되었다. 하긴 내가 걷어차인 것은 데이지가 쓰러진 후였으니.
엘더가 호들갑을 떨며 치유의 힘을 사용하려 하고 메스키트는 상처를 확인하려 들었다. 하지만 아직 완전히 안전을 보장받지 못하는 곳에서 푸는 데 한참 걸리는 갑옷을 벗기는 싫었다.
오늘 일로 깨달았다. 항상 드라이어드들에게 보호를 받으니 내가 공격을 피해 구르다 다치는 것 외의 위험에 대한 갑옷의 필요성을 못 느꼈는데, 이거 없으면 난 죽은 목숨이었다.
초보자 장비는 무슨, 레벨에 맞춰 적당히 장비를 갖추자는 건 너무 안일한 생각이었다. 제일 비싸고 좋은 걸로 온몸을 둘둘 감아야 성이 풀릴 것 같았다.
또한 내가 스스로를 지킬 만한 무기가 필요했다. 전투에 도움이 될 만한 무기? 다 필요 없었다. 당장 눈앞에 닥친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는 비장의 수가 필요했다. 롬가토에게 의뢰한 연구가 빨리 좋은 성과를 보여야 할 텐데.
엘더의 치유의 힘은 내게 큰 효과가 없었지만 내 부상으로 또다시 짐이 되고 싶진 않았다. 애써 괜찮은 척 이를 악물었다. 의심스럽다는 메스키트의 눈이 따라붙었지만 필사적으로 참았다.
화제를 피하기 위해 어닝에게 물었다.
“여긴 대체 뭐 하는 공간이야? 데이지와 함께 간 것이 천운이란 건 무슨 말이야?”
“이 공간들은 나비 새끼가 행정 관리원으로서 가드닝 스킬을 발휘해 만들어 낸 것이야. 28번째 테라리움의 전 행정 관리원인 스케어크로우도 가드닝 능력이 있었는데 알고 있니?”
데이지2에게 들었었는데. 뭐였더라?
“행정 관리원님이 저를 개화시킨 후 세계수의 잔가지 한편에 그분의 특수한 힘으로 제 영혼을 묶어 두었습니다.”
데이지2가 개화한 후 과수원에서만 지내야 했던 그 능력이 떠올랐다.
“아는 눈치네. 스케어크로우는 테라리움 내의 세계수의 가지에 드라이어드의 영혼을 묶을 수 있었어. 드루이드가 없는 드라이어드라도 살아갈 수 있도록. 교감 능력이 뛰어난 그녀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지. 나비 새끼의 가드닝 스킬은 테라리움 내의 원하는 장소에 단일 필드 아티팩트 공간을 구현해 낼 수 있어. 종류는 한 가지로 제한되지만 그곳에서 자신의 드라이어드가 아니라도 포레스트를 이루어 지낼 수 있도록 하는 거야. 비록 드라이어드는 가상 아티팩트 밖으로 나갈 수 없지만.”
“가드닝 스킬은 또 뭐야?”
느낌상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원들만 쓸 수 있는 특수 스킬 같은데…?
“난 더 이상 보좌관이 아니니 그런 것까지 알려 줄 의무는 없어. 알아서 깨달으렴. 참고로 스케어크로우는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는데 알아서 습득한 경우였지.”
저거 일부러 그러는 거다. 왜 갑자기 심술을 부리는지 모르겠다.
“그럼 내가 파필리온의 능력으로 생성된 가상 아티팩트 안에 있었다는 거야?”
“이곳에 있던 나 또한 그런 같잖은 술수에 말려들었지. 가장 처음 발을 디딘 드라이어드와 유사한 종이 있는 가상 아티팩트가 이런 공간에 소환되는 걸로 보여. 그리고 벌레 연금술의 암적인 기술인 고독(蠱毒)법을 흉내 내려 했지. 한곳에 벌레들을 몰아넣고 가장 강한 것만이 살아남게 하는 기술이야. 저 드라이어드가 먼저 발을 디디지 않은 것이 내게 천운이야. 눈치껏 극락조화가 뛰쳐나가지 않았다면… 위험할 뻔했어.”
어닝이 메스키트를 턱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이제야 그녀가 내게 데이지가 함께 간 것이 천운이라고 말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개량종인 레드 데이지와 다르지만 같은 데이지 종이 우릴 맞았다. 그것도 포레스트의 왕인 드라이어드가 튀어나왔다.
만약 메스키트나 엘더도 함께였다면…. 메스키트에 대응할 수 있는 드라이어드가 있을까 싶었지만, 운 나쁘게 스페셜급 드라이어드라도 만났으면 어땠을지 생각하니 하얀 드라이어드에게 처참하게 당해 쓰러졌던 데이지가 떠올라 어깨에 소름이 돋았다.
“이게 연금탑 내부에 마련된 나름의 방어 장치 같은데, 잘만하면 계단을 통하지 않더라도 위층으로 올라갈 수 있겠어.”
어닝이 우리가 있던 장소처럼 활짝 열린 천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렇게 말하니 꼭 게임에서 탑을 오르는 콘텐츠가 떠올랐다. 자신이 현재 전투력으로 몇 층까지 갈 수 있나 시험할 수 있는 콘텐츠였는데, 보통 층이 높아질수록 난이도가 높아졌다.
“하지만 일일이 전투를 벌이며 가기엔 체류 시간도 길어. 계단 같은 안정적인 루트로 뒤쫓아오는 적들에게 금세 따라 잡힐 거야.”
방엔 숨을 만한 구조물도 없었기에 멈춰 있을 수도 없었다.
“올라가야지, 뭐…. 별수 있나.”
“그래? 그렇게 결정했으면 저 드라이어드는 돌려보내렴. 행여라도 저 드라이어드가 인식되면 큰일이니까.”
어닝은 다시금 메스키트를 턱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다시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우리 팀의 제일 믿을만한 구석을 아티팩트로 돌려보내라니…. 메스키트는 존재 자체만으로도 승리의 토템처럼 든든한 느낌을 주는 드라이어드였다.
“이런 곳에서 죽고 싶으면 내 말을 기꺼이 무시하고.”
어닝이 빈정거리는 투로 메스키트를 절절한 눈으로 바라보는 내게 말했다. 우씨…. 왜 자체적으로 제게 스펙 조율을 걸어야만 하나요….
메스키트는 어닝의 주장에도 전혀 문제가 될 것 없다는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지었지만, 기꺼이 날 위해 아티팩트로 돌아갔다. 그리고 가기 전 내게 이번엔 반드시 제때 지키는 방패가 되어 앞에 서겠다는 말을 남겼다. 아무래도 그녀가 없는 곳에서 크게 다쳐 온 내게 많은 것을 느끼는 것처럼 보였다.
어닝은 상황을 좀 더 유리하게 바꾸기 위해 꾀를 내었다. 드라이어드 없이 이동하는 방법은 일단 무리였다. 이 높은 천장은 드라이어드의 도움 없이 오를 수 없었다.
그렇다면 우리들의 드라이어드 중 가장 약한 드라이어드를 먼저 올려 보내 인식시키는 방법을 택했다. 그래서 훌륭하게 성장했지만 등급이 가장 낮은 데이지가 선발대로 선정되었다.
어닝의 결정에 데이지는 일말의 망설임 없이 그러겠다고 답했다. 데이지는 포레스트 왕 급의 드라이어드를 만나 힘든 전투를 벌였음에도 전혀 주저하는 것이 없었다. 오히려 조금 기대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의 시도는 불발되었다. 데이지가 먼저 위층으로 올라갔지만 어떠한 반응도 없었다. 어닝의 극락조화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런, 이미 한 번 인식된 드라이어드는 안 되나 보네.”
위층으로 통하는 천장 문을 열기 위해선 가상 아티팩트와 함께 소환된 드라이어드를 무찔러야 했는데, 이미 한 번 소환을 시도한 드라이어드는 통하지 않았다. 즉, 앞으로 남은 층을 더 올라가려면 드라이어드의 종이 그만큼 다양하게 있어야 한다는 건데….
드라이어드의 수가 더 이상 남지 않더라도 메스키트를 꺼내는 일만큼은 하지 않아야 했다.
어닝에겐 드라이어드가 극락조화를 제외하고 둘, 이쪽은 좀 더 다양해서 데이지와 메스키트를 제외하고 넷이었다. 다만 유니크 등급에 속하는 엘더나 바곳이 나서도 결코 좋은 상황은 아니었다.
실력파 힐러 미러전(동일 성능 캐릭터끼리 맞붙는 전투)으로 가면 절대 죽지 않는 좀비 싸움이 되거나 바곳이 나오면…. 아티팩트 안과 다름없다고 했으니 적에겐 바곳의 디버프가 안 통하나 우리는 통하는 최악의 상황이 될 수 있었다.
그래서 민들레 아이들을 불러왔다. 아이들은 위험한 곳에 내보내는 것이 내키지 않았으나 노멀 등급이라 가장 상황이 나았다. 민들레 아이들이 데이지 다음으로 발을 딛자 데이지와 함께 겪었던 것처럼 텅 빈 감옥 같은 공간에 풀이 자라고 민들레꽃이 피어나는 환상이 보였다.
단델리온과 무척 닮은 민들레 포레스트의 왕인 드라이어드가 나와 엄청난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전투를 치르게 되면 민들레 아이들이 상처라도 받지 않을까 했는데, 다행히도 아이들은 같은 포레스트의 왕이라 하더라도 전혀 다른 존재로 인식하는 것 같았다.
단델리온에게 격려를 받았던 데이지마저 단도를 빙글 돌리며 주저 없이 나서는 걸 보면 그녀를 떠올리는 건 오로지 나뿐인가 싶었다.
아이들은 눈을 빛내며 민들레 드라이어드가 사용하는 스킬들을 눈에 담았다. 아이들에겐 마치 전투 상황이 스타 강사가 가르치는 속성 과외와 다름없었던 것이다.
민들레 드라이어드를 이겨 내고 가막살나무까지 불러왔다.
데이지 홀로 전투에 나설 때보다 엘더와 바곳의 힘을 빌리니 할 만했다. 다만 어닝은 끝까지 나와 파티를 맺고 도와주거나 하지 않았다. 각자가 소환한 드라이어드는 각자가 처리하며 배타적으로 진행했다.
어닝은 유명한 연금술사지만 드루이드로서의 능력도 뛰어났다. 어닝에게 있는 세 그루의 드라이어드는 극락조화, 동백나무, 해머오키드였다. 전투 방식으로 보건대 지원형 둘에 공격형 하나였다. 회복형이 없어도 지원형들의 버프를 적절히 이용하여 어려움 없이 전투를 치렀다.
그리고 결국 남은 층에 엘더와 바곳을 인식시켜야 할 때가 왔다.
바곳 역시 개량종이라 어떠한 종의 드라이어드가 튀어나올지 예측 불가였다. 하지만 분명 독을 품은 종이 튀어나오겠지. 그나마 엘더가 바곳보다 덜 위험하다는 판단이 들었다.
먼저 보낼 드라이어드를 엘더로 결정했을 때, 얜 엄청 기대하는 눈을 했다. 동일 종의 드라이어드가 튀어나오는 것을 보며 내심 자기와 같은 엘더 플라워 종을 기대한 것처럼 보였다.
거기에 나오는 드라이어드들이 하나같이 포레스트 왕 급이었으니…. 결코 좋은 상황은 아니지만 엘더 플라워의 포레스트 왕을 보게 될 수도 있는 거 아닐까?
처음에 덩굴로 몇 층 높이까지 끌려 올라간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드라이어드 수로만 따지면 6층은 올라왔다. 바곳의 비밀을 풀어내기 위해서라도 더 올라가야 해.
“엘더, 네 차례야.”
“이 내게 대적할 수 있는 드라이어드는 없어.”
엘더가 호기롭게 스태프를 세우고 천천히 진입했다. 엘더의 어깨를 맴도는 나비가 어둠 속에서 작은 조명처럼 빛을 냈다. 곧이어 나무들이 우뚝 자라나고 달짝지근한 향기가 가득 퍼지기 시작했다.
엘더의 꽃향기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하지만 어디선가 맡아 본 적 있는 무척 익숙한 향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