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로를 빠져나오자 아주 넓은 공간이 나타났다. 땅에 내팽개쳐지기 전 데이지가 솜씨 좋게 날 보호하여 착지했다.
나보다 체구가 작은 데이지에게 폭 안겨 있는 것이 볼품없게 느껴졌으나 이 품이 그 어떤 곳보다 안전하다는 것을 알기에 얌전히 있었다. 한참 뒤에야 내게 가해지는 위협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닫고 조심히 데이지의 품을 벗어났다.
“드루이드님, 다친 덴 없으세요?”
통로를 워낙 거칠게 끌려왔던 탓인지 멀미를 좀 했지만 참을 만했다.
“우리 데이지가 보호해 줘서 난 괜찮아. 다행이야, 제때 날 지켜 줘서!”
역시 우리 데이지! 기특해서 머리를 쓰다듬는 것과 별개로 묘하게 주위가 조용한 게 신경 쓰여 돌아보았다. 이상하게 데이지 외 다른 드라이어드들이 보이지 않았다. 언제나 곁에서 든든하게 지켜 주던 메스키트는 물론 엘더나 바곳까지도. 이게 무슨 거지 같은 상황이지…?
덩굴에 잡혀 끌려 올라갔을 때, 분명 나와 어닝의 드라이어드들이 아티팩트에서 죄다 튀어나오는 것을 느꼈었다. 순식간에 좁은 통로로 들어가는 순간 체구가 작은 데이지가 재빠르게 날 붙잡았기에 함께 오긴 했지만….
설마…. 내가 끌려오기 전 자리에 다들 그대로 있는 거야? 헐, 그럼 내 드라이어드들은 어떻게 되는 거야?
아티팩트를 확인하려 했는데 이곳에 감도는 묘한 기운으로 인하여 불가능했다. 마치 사방에 내 테라리움 아티팩트가 있는 것처럼 집중할 수가 없었다.
가막살나무 군락지에서 아티팩트에 재가 뒤덮여 교감이 불가능했던 것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그땐 교감의 통로가 틀어 막혀 있었다면, 지금은 집중력이 흐려져 도통 종잡을 수가 없는 느낌이었다.
이 느낌은… 그래, 내가 마치 드라이어드가 되어서 누군가의 아티팩트 안에 있는 느낌 같았다.
다행히도 끌려온 곳에 적들이 포진해 있을 거라고 예상했던 것과 달리 아무것도 없었다. 당장 내 곁에 드라이어드가 데이지 하나라 하더라도 심장이 떨릴 정도로 불안한 상황은 아니었던 것이다.
이곳은 어닝의 말처럼 우릴 가둬 두기 위한 공간처럼 보였다. 사방이 막힌 넓은 공간. 창문도 문도 보이지 않고 몸을 숨길 구조물도 보이지 않았다.
천장에서 뚝뚝 떨어지거나 벽면을 타고 흐르는 물방울 때문에 눅눅한 습도가 느껴지는, 아주 불쾌한 곳이었다. 어닝과 헤매던 외부보다 조명도 어두워 불안한 분위기가 들었다.
이대로 꼼짝 못 하고 갇혀 있다가 적들의 손에 넘어가는 거야?
그때였다. 은은한 꽃향기와 함께 어두웠던 조명이 밝아지기 시작했다. 땅에서 잔디밭이 솟아오르고 계란프라이를 닮은 하얗고 작고 귀여운 꽃들이 빼곡히 피어났다. 그리곤 멀리서 하얀 꽃잎이 한데 모여 회오리치더니 기세가 줄고 점점 사람의 형태가 되었다.
갑자기 허공에서 생글생글 웃는 남성형 드라이어드가 나타났다.
드라이어드는 목덜미를 겨우 덮는 길이의 머리칼이 엘더를 닮은 하얀 백발이었고, 머리엔 땅에 핀 것과 같은 꽃이 탐스럽게 꽂혀 있었다. 마치 우리 데이지처럼.
유려한 곡선으로 퍼지는 진녹색 쇼트 코트에 여러 줄의 체인과 화려한 펜던트가 달린 한쪽 망토, 환한 빛을 내며 한데 모여 핀 하얀 꽃들이 천사의 깃털처럼 보이도록 장식된 날개까지. 꼭 우리 데이지가 성장해 포레스트의 왕이 되면 저런 모습일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 정도로 데이지와 닮은 느낌이 많이 드는 드라이어드였다.
쾌활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오랜만에 내 차례네. 내 포레스트의 영예로운 구성목이 될 나무들이 온 걸까나? 아니면 거름이 온 걸까나?”
그의 말에 데이지가 두 개의 단도를 빼 들고 내 앞을 막아섰다.
하얀 드라이어드는 눈만 굴리며 주변을 가볍게 둘러보더니 데이지를 보고 무척이나 실망하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내 다시 웃는 얼굴이 되었다.
“우리와 같은 데이지가 아니라… 천한 잡종 데이지네? 그것도 겨우 한 그루. 이 몸이 기꺼이 굽어살피러 온 바람이 없네. 이름만 같다고 배정받은 건 정말 자존심 상하는 일인데.”
뭐? 잡종 데이지? 저게 설마 우리 데이지를 보고 하는 말이야? 하얀 드라이어드는 생글생글 웃는 낯을 유지하면서도 녹빛이 감도는 노란 눈으로 우리 데이지를 차갑게 바라보았다.
“드루이드님, 저와 같은 데이지 종이에요.”
전투 모드에 돌입한 데이지는 한껏 진지해진 목소리로 내게 말하였다.
“말은 바로 해야지, 묘목아. 나는 너희와 같이 모체 신화도 없는 개량 잡종이 아니라 순수한 데이지 우성종이란다.”
저 자식이 우리 애 보고 못 하는 말이 없네. 설사 저 드라이어드가 적이 아니더라도 반드시 한 대 세게 먹여 줘야 마음이 풀릴 것 같았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난 그럴 힘이 없지. 저 도발에 넘어가 열을 부글부글 내며 주먹을 쥐는 나와 달리 데이지는 한 점 흐트러짐 없이 드라이어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레드 데이지 종의 역사가 짧아 모체 신화가 없는 건 상관없어요. 제가 신화가 되면 돼요. 제이 님의 드라이어드인 저는 특별하니까요.”
단호하게 말하는 데이지의 말에 온몸에 화끈하게 열이 오르는 기분이었다. 우리 애가 지금 뭐라고 한 거야? 기특함 수치 맥스라 상황도 잊고 끌어안을 뻔했다.
이 아이가 처음 만났을 때 작고 가여웠던 그 아이가 맞아? 잘 컸어, 우리 데이지.
레드 데이지에게 모체 신화가 없는 것은 처음 알게 된 사실이었지만 아무렴 어떠랴. 민들레의 왕인 단델리온처럼 모체로부터 계승되는 신화의 힘 같은 것 없어도 우리 애는 충분히 강해질 수 있지. 뿌듯한 마음에 절로 어깨가 으쓱거려졌다.
“감히…! 그래, 이름만 같은 데이지라고 한데 묶인 것도 화가 나는데. 이참에 순종과 잡종의 차이를 명확하게 보여 주지.”
그는 허리의 검집에서 두 개의 단도를 꺼내 쥐었다. 데이지의 단도보다 더 화려하고 흰빛의 영롱한 아우라까지 두른 것이 강화를 잔뜩 하거나 등급이 아주 높은 무기를 보는 것 같았다.
순종이네 잡종이네 떠들어 대지만 데이지와 닮은 모습이나 마찬가지로 두 개의 단도를 무기로 사용하는 점이 웃겼다. 같은 종에 머리색도 똑같으면서 부메랑을 사용하는 데이지2보다 저쪽이 더 데이지와 남매처럼 보일 정도였다.
문득 데이지2가 레드 데이지들도 다른 데이지들과 색깔만 다를 뿐이지 같은 꽃들끼리는 다 비슷하게 생겼다고 말한 것이 떠올랐다.
잔뜩 긴장한 데이지와 달리 저쪽은 무척이나 여유로워 보였다.
“보아하니 단순한 불과의 싸움은 좀 겪어 본 것 같은데, 날 그런 것들과 동급 취급하는 건 아니겠지? 우러러보거라. 이것이 순종들의 왕의 위엄이니까.”
순식간에 지척까지 온 그의 칼날에 데이지의 붉은 머리카락 끝이 잘려 나갔다. 여태 우리 데이지가 드라이어드들 중 가장 민첩하고 빠르다 생각했는데 하얀 놈은 상상 초월이었다. 움직이는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나였다면 칼 맞은 것도 한참 후에나 알았을 텐데. 그러나 간발의 차긴 해도 데이지는 공격을 피해 냈다.
나는 전투에 방해될세라 황급히 벽 끝까지 물러났다. 자리에 없는 메스키트를 대신해 급한 대로 팀의 메인을 데이지로 돌려 공격력을 상승시켰다. 이것이 당장 내가 데이지에게 해 줄 수 있는 전부였다.
굳게 맺어진 영혼의 연결을 통해 데이지가 아주 많이 긴장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갑자기 그녀가 처음 불과 전투할 때도 이렇게 긴장하진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 전엔 밀려나더라도 버텨 줄 굳건한 방패나 상처를 치유해 줄 힐러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만큼은 오롯이 데이지 혼자 전투에 임해야 했다. 그것도 단순하게 공격해 오는 불이 아닌 지능적인 드라이어드를 상대로.
심지어 상대는 날개로 보아 포레스트의 왕. 거기다 나라는 짐까지 딸려 있는 데이지가 무척이나 불리해 보였다.
화려하거나 특별한 기술 없이 두 데이지 드라이어드는 오직 단도와 빠른 움직임만으로 전투를 이어 나갔다.
하얀 데이지 드라이어드는 거추장스러워 보이는 날개를 달고도 무척이나 날렵하게 움직였다. 내 눈으로 다 좇지도 못할 움직임을 데이지는 용케 파악하며 맞서고 있었다. 그녀가 움직이는 궤적을 따라 별똥별의 꼬리 같은 은은하고 투명한 흰빛이 따라붙었다.
데이지의 손가락에 끼인 불멸의 다이아몬드 반지가 마치 경고등처럼 미친 듯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보석의 힘이 겨우 실력의 차이를 메꿔 주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데이지가 일방적으로 얻어맞는 것에 가까웠다. 금속끼리 맞부딪히는 소리가 수없이 많이 들렸고 데이지가 막아 낸 수의 배는 될 공격들이 데이지의 장비 이곳저곳에 많은 상처를 내고 있었다.
카메라 플래시처럼 반짝이는 빛이 수시로 터져 나왔고 그때마다 데이지가 수없이 많은 위기상황을 넘기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불이 장비를 태우는 공격이었다면 날붙이의 공격은 예리하고 치명적이었다. 두꺼운 장비를 찢고 큰 상처가 나자 한 번도 전투에서 아픈 소리를 내 본 적 없던 데이지가 결국 고통의 신음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는 내 가슴도 갈가리 찢겼다.
“잡종의 것은 불쾌하나 기꺼이 내 구성목들의 거름으로 사용해 주마. 영광으로 알거라.”
겨우 공격을 막아 내는 것에 성공해도 힘의 차이를 무시할 수 없었다. 멀리 밀려 날아가던 데이지가 벽에 박히기 전 줄기를 적의 사각지대인 날개에 감아 닻으로 삼고 멈춰 섰다. 그 행동이 하얀 드라이어드의 분노를 샀다.
“날개는 왕의 위엄, 손잡이 따위가 아니다!”
전투에서도 시종일관 웃음 유지하던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우리 애는 온 장비가 너덜너덜할 정도로 찢겼는데 그깟 날개 좀 터치했다고 저렇게 굴다니.
밀려서 가까이 온 데이지에게 포션이라도 주고 싶었는데 상대는 잠깐의 시간도 허락하지 않았다. 득달같이 데이지에게 달려들며 다시 단도를 휘둘렀다. 데이지는 막는 것을 포기하고 훌쩍 뛰어올라 공격을 피했다.
데이지가 작정하고 피해 다니자 상처를 입는 것은 덜했지만 그렇다고 그에게 유효타를 낼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데이지는 단도를 집어넣고 손목에서 뻗어 낸 줄기를 이용해 탄성으로 그를 요리조리 피하는 것에만 올인한 상태였다.
적잖이 약이 올랐는지 그는 데이지가 공중으로 뛰어오를 때를 맞춰 다트 날리듯 단도를 던졌다. 총알처럼 빠른 속도로 날아간 단도가 데이지의 목을 스치며 깊은 자상을 냈다.
그녀의 목에서 푸른빛을 띠는 물처럼 투명한 액체가 피처럼 왈칵 쏟아졌다. 내가 다이아를 깨물어 부술 때 보았던 그런 액체였다.
피부를 뚫고 나오는 드라이어드의 피는 처음 보았다. 이곳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데이지를 해하려 했던 드라이어드 무리를 메스키트와 엘더가 해치운 적이 있지만, 그땐 사람의 붉은 피와 섞여 알지 못했다. 드라이어드의 피가 푸른 빛의 투명한 액체라는 것을.
그리고 이런 사실을 절대 우리 애를 통해 알고 싶지는 않았다. 심장이 멈추는 기분이었다.
“데이지!”
목의 정중앙을 노리고 들어온 단도는 데이지가 그나마 간신히 피해 비껴 맞은 것이었다. 그녀가 목을 부여잡고 피할 자세를 취하기도 전에 연이어 옆구리가 찢겨 나갔다.
하얀 드라이어드는 날아갔던 단도를 줄기로 붙잡아 회수하며 그대로 채찍 삼아 데이지에게 상처를 냈다. 단도를 쥐고 하는 공격은 데이지가 족족 피하니 경로를 읽지 못하게 수를 쓴 것이다. 데이지는 큰 소리를 내며 땅에 떨어졌지만 포기하지 않고 비틀비틀 일어났다.
“분에 넘치는 힘으로 바크를 보호하고 있지만….”
그는 반지를 낀 데이지의 손가락을 보며 말했다.
“워낙 덜 여문 묘목이니 보호해 봤자지.”
“난 묘목이 아니에요.”
상처 입은 목을 붙잡고 있는 손 틈 사이로 이질적이게 신비로운 빛을 내는 액체가 새어 나와 흘렀다. 꼭 얼음이 녹아 흐르는 물을 보는 것 같았다.
옆구리의 상처는 데이지의 옷을 푹 적실 정도로 많은 피를 뿜어내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겁에 질린 기색 없이 하얀 드라이어드를 노려보고 있었다. 목소리에도 전혀 떨림이 없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 누가 보기에도 힘의 차이 때문에 가망이 없는 승부였다.
큰 상처를 입은 데이지의 움직임이 둔해졌다. 또 단도를 날리는 공격에 대응하기 위해 그와 최대한 거리를 벌리며 날아다녔지만 공간이 한정적이라 발버둥에 지나지 않았다.
“꼭 귀찮은 파리 같네!”
그가 다시금 단도를 날리려는 조짐이 보이자 데이지는 줄기를 뻗어 그의 날개를 감았다. 데이지가 확 잡아당겨 몸이 비틀린 그는 원하는 궤도로 단도를 날릴 수 없었다.
분노에 찬 그의 눈이 일순 날 노려보았다. 데이지의 약점. 재빠르게 움직이는 데이지를 묶을 수 있는 것.
당황한 내가 총이라도 꺼내 겨누기 전에 달갑지 않은 꽃향기가 진득하게 다가왔다.
“이게 죽으면 너도 별수 없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