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2화 (132/604)

어닝은 곧장 연금탑을 향해 달렸다.

대강당을 무리 없이 빠져나갔던 것처럼 연금탑 입장도 수월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그러지는 못했다.

입구에서 바로 막혔다. 어닝은 차분히 숨을 고르며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나는 곧 죽을 사람처럼 헐떡대며 벽에 기대는 것이 고작이었다.

“연금탑 주변은 보안 때문에 특수 기술을 사용해. 사람을 물론이고 꽃 한 송이, 벌레 한 마리까지 위협이 될 수 있으니 탐지를 철저히 하지.”

정장을 입은 사람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죄송합니다만 이곳은 소속 연구원을 제외하고 아무도 들어오실 수 없습니다. 이곳은 후원자도 따로 받지 않습니다. 미리 예약하신 용건이 아닌 경우 따로 신청을 하신 후 심사를 기다려주시기 바랍니다.”

“헉헉… 심사… 무슨 심사까지 해.”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며 우리가 달려온 길을 바라보았다. 다행히 아직 우릴 쫓아오는 사람은 없었다.

멀리 대강당이 보였다. 와 진짜 먼 거리를 쉬지도 않고 뛰어왔네. 신기록일 거야.

“저는 연금술사 어닝, 6번째 테라리움 연금탑의 의뢰로 고위 연금직으로서 이곳을 시찰하러 왔어요.”

“금일 시찰에 대한 일정은 전달받은 것이 없습니다. 6번째 테라리움 연금탑에서 발행한 공문을 보여 주시기 바랍니다. 내부에서 확인 후 안내 드리겠습니다.”

오늘 단순히 강연을 하러 온 어닝에게 그런 것이 있을까? 하지만 그녀는 태연하게 가방을 뒤적거리더니 종이 한 장과 작은 검은색 구슬을 함께 꺼냈다.

“여깄어요.”

그녀가 종이를 건넴과 동시에 종이와 겹쳐 쥔 구슬을 힘주어 눌렀다. 구슬은 젤리처럼 말랑 눌리더니 톡 터졌다. 동시에 검은 아지랑이가 피어올라 종이를 확인하러 다가온 자를 훅 덮쳤다.

헉, 뭘 한 거야? 저렇게 대놓고 해도 돼? 제 얼굴에 수상한 검은 아지랑이가 끼쳐졌음에도 불구하고 정장을 입은 사람은 아무렇지도 않게 어닝이 건넨 종이를 받았다.

“확인했습니다. 들어가셔도 됩니다.”

그러면서 종이를 다시 어닝에게 건네곤 우리 둘을 순순히 연금탑으로 들어갈 수 있게 해 주었다.

“헐, 뭘 어떻게 한 거야? 진짜 공문서가 있었어?”

어닝이 들고 있는 종이를 힐끔 바라보았다. ‘강연 순서, 참가 예상 인원….’ 어딜 봐도 공문서가 아니라 단순한 강연 안내서 아냐?

“연금술의 힘을 이용했어. 딱 한 명에게 사용할 수 있는 분밖에 남지 않아 아끼고 있었는데. 포식자에게 먹이가 아닌, 오히려 피해야 할 것으로 보이게 하는 벌레들의 위장술이 총 집합된 결정체란다. 즉 정반대의 것을 느끼게 하는 기운을 풍기지.”

“오…. 어? 설마 그 연금술….”

“그래, 네가 본 검은 세계수의 가지에도 쓰인 힘이야. 하지만 불특정 다수의 눈을 오랫동안 속이려면 아주 많은 양을 사용했을 거야. 대체 내가 발명하고 나만 독점해서 사용하고 있던 그 연금술을 어떻게 얻어 냈는진 모르겠지만.”

연금탑 내부는 놀라웠다. 실상 방문해 본 연금탑이라곤 18번째 테라리움의 것뿐이었지만, 이곳이 다른 연금탑들관 차원이 다르다는 것쯤은 눈치껏 알 수 있었다.

연금탑 외관은 둘 다 높다란 탑이었지만 내부는 대학교 건물 같았던 18번째와 달리 16번째는 거대한 숲속을 거니는 기분이었다.

사방이 초록색이었다. 벽은 덩굴 식물이 빼곡히 수놓아져 있고 바닥은 푹신한 진짜 잔디 풀밭에, 곳곳엔 정체를 알 수 없는 나무도 자라고 있었다. 올라가는 길엔 등산 코스처럼 돌계단이 놓여 있고 나뉜 복도는 마치 숲속의 갈림길을 선택해 지나가는 느낌이었다.

천장에 규칙적으로 달린 오렌지색 수정에선 적절하게 쏟아지는 햇빛을 받는 것처럼 따뜻한 기운이 흘러나왔고 벽마다 물이 졸졸 소리 내 흐르는 수로가 있었으며 나무 사이를 훑고 지나는 것처럼 신선한 바람이 기분 좋게 볼을 스쳤다.

이상하게 우리 말곤 사람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일단 내부에 들어오는 것은 성공했으니 안전은 좀 더 보장되었어. 당장 급한 불은 껐어도 이젠 언제 어떻게 테라리움 밖으로 나갈지 궁리해야 된다는 건데.”

“그런데 여기 정말 연금탑 맞아? 다른 곳으로 차원 이동이라도 한 거 아냐? 어떻게 건물 안에… 이런 숲이 있을 수 있어?”

잎을 만져 보니 모조가 아니라 진짜였다. 와 정말 신기하네. 연신 감탄사만 내뱉고 있는 내게 어닝이 차분하게 말을 걸었다.

“기운을 더 느껴봐, 드루이드로서. 연상되는 것이 있을 거야.”

기운을 느껴 보라고? 무슨 기운을 느껴보란 거지? 전 지금 난데없이 산을 타게 된 등산객의 기운밖에 느껴지지 않는데요? 여기에 커다란 배낭만 매면 빼박입니다.

그녀가 시키는 대로 숨을 한껏 들이켜 상쾌한 공기를 폐에 가득 담아 보기도 하고 눈을 가늘게 떠 좀 더 유심히 살펴보기도 했다. 애초에 기운을 느끼란 지시가 뭘 어떻게 하라는 건지 모르겠다.

그때였다. 불현듯 이렇게 온화하고 평온한 느낌을 어딘가에서도 받아 본 적 있다는 것이 떠올랐다.

어디였더라? 그래.

“과수원의 온실….”

“맞아. 온실이 어떤 환경을 조성해 놓은 것인진 알고 있지?”

“세계수의 내부를 흉내 냈다고 했던 것 같은데.”

“맞아. 이곳도 세계수의 내부를 흉내 내 놓았어. 하지만 결국 인간들의 상상일 뿐. 세계수의 내부라고 이런 숲속이 튀어나오는 건 너무 틀에 박힌 지루한 생각 아냐?”

“헐, 왜 연금탑 내부를 세계수처럼 조성해 놔? 과수원에나 필요한 것 아냐?”

이곳이 마냥 생소한 나와 달리 어닝은 익숙하다는 듯 막힘없이 걸어 나갔다. 그녀를 놓칠세라 열심히 종종걸음으로 따라 걸었다.

“그야, 세계수를 만들려고 하니까 따라 하는 거지.”

“헐?”

세계수를 만든다고? 그건 또 무슨 해괴한 이야기야? 세계수가 그렇게 뚝딱 만들어지는 존재였어? 난 여태 꿈에서 봐 왔던 거대하다 못해 경이로울 정도로 아득하게 느껴졌던 세계수를 떠올려보았다. 오반데.

“인페르노는 16번째 테라리움에 제2의 세계수를 만들 계획이야. 이 계획이 완성된다면 지금 있는 세계수를 없애 버릴 예정이지. 허황되게 들려도 그들은 진심이고 그럴 만한 힘이 있어. 난 오히려 무척이나 체계적으로 준비하는 그들의 계획에 매력을 느낄 정도야.”

제2의 세계수라고? 무슨 게임 서버 증축하듯 말하나 몰라. 그리고 세계수를 없앤다니. 그건 또 어떻게 하려고?

우린 이제 복도를 헤매는 것을 멈추고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이 탑의 지하와 꼭대기엔 종자 보관소가 있어. 세계에 있는 모든 식물들의 씨앗이 지하에 보관되어 있지. 그렇다면 꼭대기의 종자 보관소엔 뭐가 보관되어 있는지 알겠니?”

그걸 내가 어떻게 알…. 설마…?

“연금술을 이용해 인공 개량을 통해 새로 만들어 낸 식물들이 보관되어 있지. 오, 이건 놀라지 않네? 금지된 일이니 뭐니 하면서 난리를 피울 줄 알았는데.”

“인공 개량, 그게 내가 16번째 테라리움을 방문한 목적이니까. 그럼 인공 개량종에 대한 정보를 얻으려면 꼭대기로 가면 된다는 거야?”

“뭐 할 수 있다면 해 보렴. 나로서도 탑의 꼭대기가 제일 안전하니 최대한 가까이 갈 수만 있다면 좋겠지만. 지하에 있는 종자 보관소의 씨앗들은 언제라도 다시 구할 수 있지만 꼭대기에 있는 것들은 달라. 인공 개량이 100% 성공하는 것은 아니라 우연의 일치로 태어난 종들이 많지. 그렇기 때문에 가치로만 따지면 인페르노의 수장에겐 지하의 것들보다 꼭대기의 것들을 지키는 것이 더욱 우선시돼. 우리가 꼭대기에 가까이 있다면 더욱 공격하지 못하겠지. 하지만….”

그녀는 팔로 날 밀어 벽에 붙어 서게 했다. 누군가가 우리가 가려던 길을 천천히 지나갔다.

“그만큼 경비가 삼엄해. 쉽게 갈 순 없을 거야. 우린 그저 적당한 위치에서 몸을 숨기고 나갈 궁리를 하면 돼. 언제까지고 여기에 숨어 살 순 없을 테니까.”

“그렇게 위험한 걸 잘 아는 당신이 강연이네 뭐네 하면서 잘도 테라리움들을 돌아다녔네. 나라면 내게 가장 안전한 곳에서 숨어서 절대 나오지 않았을 거야.”

우린 내부인의 모습이 완전히 보이지 않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걸었다.

“내가 단순히 강연을 위해서 돌아다녔겠니? 나 역시도 1번째 테라리움의 연금탑에 몸을 의탁해 숨기면 제아무리 인페르노의 수장이라도 날 건들 수 없지.”

그녀는 분한 얼굴이 되어 낮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분은 내가 배반할 것을 염려해 내 소중한 꽃들을 꺾어 여러 테라리움에 볼모로 묶어 놓았어. 16번째는 내가 스스로 금은화를 숨겨 놨기 때문에 위치를 알지만, 다른 꽃들은 내가 알 수 없는 테라리움들로 보내 버렸지. 이제 간신히 극락조화를 비롯해 세 송이를 찾았어.”

강제로 드라이어드와 연결을 끊게 해 볼모로 보내 버렸다고? 완전 기상천외한 약점 잡기였다.

“드라이어드들이… 순순히 그걸 받아들였어?”

“연결을 끊지 않으면 내 목숨이 위험하니 내 꽃들은 기꺼이 자신을 나로부터 꺾어 냈단다. 하나하나 내게서 꺾여 나가는 꽃들을 바라만 보는 게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알겠니?”

28번째 테라리움엔 테러를 일으켜 수많은 희생자를 낸 사람이면서. 다른 건 알 바 없고 자신의 것만 소중하다는 건가?

한 3층 정도 올랐을까? 우리는 얼마 못 가 멈춰 서야만 했다. 누군가가 우리가 가려는 길을 막고 지키고 서 있었다.

“이쯤에서 자리를 잡고 몸을 숨기자.”

“이왕 갈 거면 꼭대기로 가. 꼭대기 몇 층인데?”

난 바곳의 정보를 얻어야 해.

“연금탑은 매년 위로 증축되고 있어. 내가 있을 때만 해도 20층이었어.”

20층을 엘리베이터 없이 계단으로 오르라고? 심지어 이곳은 천장도 훌쩍 높아서 올라야 할 계단이 두 배는 더 되어 보였다.

“그리고 쓸데없는 소란은 좋지 않아.”

“아니 그렇긴 한데….”

그때였다. 갑자기 천장에서 내려온 굵은 덩굴이 나와 어닝의 허리를 칭칭 감았다. 우리가 이야기하는 동안 아주 조용히 뱀처럼 등 뒤로 스르르 접근했던 것이었다.

만약 내 곁에 드라이어드가 하나라도 있었다면 낌새를 알아차렸겠지만, 어닝의 극락조화 드라이어드마저 쓰임을 다했다며 조용한 이동을 위해 아티팩트로 돌아간 터였다.

칭칭 감긴 덩굴은 우리를 끌어당겼다. 나와 어닝은 서로 반대 방향으로 끌어당겨지고 있었다. 어닝의 팔을 황급히 붙들었지만 덩굴이 토할 것처럼 허리를 죄니 버티기가 힘들었다.

“침입을 눈치챈 거야! 벽 내부 공간엔 연금 실험실이 있지만 그곳으로 끌려가진 않을 거야. 우릴 가두거나 처리할 공간으로 끌고 가는 거지. 최선을 다해서 버텨!”

저도 그러고 싶은데요. 허리를 두 동강 낼 정도로 조여 대는데 어떻게 버텨요?

드루이드의 위험을 느낀 드라이어드들이 각자의 아티팩트에서 튀어나옴과 동시에 어닝과 내가 천장으로 훅 끌어 올려졌다.

내 곁에 작고 날렵한 데이지가 찰싹 붙자마자 우리 둘이 겨우 통과할 수 있을 넓이의 환풍구 같은 통로를 아주 빠른 속도로 정신없이 끌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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