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1화 (131/604)

저 새끼가 여긴 어떻게 알고…는 의미 없는 질문이었다. 내가 하루 종일 손에 폰을 달고 사는 것처럼 저놈도 손에서 월렛을 손에 놓지 않나 보다. 월렛으로 우리의 위치를 확인했겠지.

“고귀한 꽃들의 대화에 나도 끼워 주겠어? 무슨 재밌는 이야기를 하길래 당신이 주인공인 강연까지 잊어 가며 열중하는지 궁금할 정도인걸.”

“찢어 죽일 나비 새끼….”

어닝이 눈앞에 파필리온이 있다면 당장이라도 잘근잘근 씹어 뜯어 버릴 것처럼 중얼거렸다.

파필리온도 참 대단하다 싶었다. 어떻게 마이페이스가 강한 저 어닝을 존재 자체만으로 분노하게 만들 수 있는지. 세계수의 가지를 병해충으로 죽인 이야기를 낯빛 하나 안 바꾸고 하는 사람이었는데.

“문은 안 열어 줄 건가? 설마 이 내가 그 안에 누가 있는지 모른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방 안의 모두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선뜻 나서서 문을 열어 줄 사람도 없었다. 아니, 열려고 나서려 한다면 등을 곧게 세우고 선 어닝이 단호하게 막아설 기세였다.

“보물 같은 금은화의 그대, 허튼짓은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거야. 그대에게 허락된 시간은 안타깝지만 이제 없어. 그가 여기로 오고 있거든.”

“뭐…?”

파필리온의 말에 어닝이 주춤 뒤로 물러났다. 착각인지 모르겠지만 그녀에게서 두려움이 느껴졌다.

“제이 님, 어떻게 할까요?”

“쟤가 짜증 나는 놈이긴 해도 직접적으로 아직 해를 가한 적도 없고, 뭐…. 내가 여기 있는 게 잘못도 아니고…. 문을 안 열어 줄 이유는 없긴 한데요.”

이리스가 몸을 풀며 말하길래 언제라도 전투를 벌일 태세라 일단 말렸다.

“결국… 그 귀한 몸을 끌고 직접 행차하시는군. 하지만 나 하나 잡자고 내려오기엔 너무….”

어닝이 고개를 살짝 틀어 날 바라보았다.

“다시 욕심이라도 난 건가?”

그러곤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오더니 내 앞에 바짝 붙어 섰다.

“인페르노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있지?”

“인페르노?”

“전혀 모르나 보네. 당신의 28번째 테라리움을 먹어 치우려 침을 뚝뚝 흘리는 자들이야. 지켜내려면 적을 알아야 하지. 그들은 불을 숭배하는 집단, 워낙 비밀스럽게 움직이지만 세력은 상당히 커.”

“어…!”

“제이 님, 혹시 그 집단….”

불을 숭배하는 집단이라면… 카나비스 드라이어드 사건으로 나와 지독하게 얽힌 그 조직이었다. 불을 사용하는 마법사도 있고 불꽃의 모양을 한 화상 표식을 몸 어딘가에 달고 다니는 자들. 그런데 그 조직이 28번째 테라리움의 과거 참변과도 연관이 있었다고?

“그리고 나비 새끼의 말이 맞다면 그 인페르노의 수장이 지금 이곳에 오고 있다는데…. 아직 28번째 테라리움을 욕심내고 있다면 나뿐만 아니라 당신 역시 위험해. 내겐 금은화를 되찾기 위해 당신이 필요하기도 해.”

“제이 님이 지금 위험한 상태라고요?”

이리스가 기겁하며 어닝의 팔을 붙잡았다. 이거 생각했던 것보다 위기가 너무 빨리 온 것 아냐? 16번째 테라리움에 온 지 겨우 하루가 지났는데.

“언제까지 여기 문밖에 세워 둘 거야? 나도 좀 들여보내 주면 안 돼?”

문 너머로 파필리온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어닝의 표정이 다시 한번 찌푸려졌다.

“여기 테라리움 안에선 나비 새끼의 눈을 피할 수 있는 곳이 아무 데도 없다는 건 당신도 행정 관리원이니 알고 있겠지? 그 어느 곳에서도 숨을 수 없어. 가장 좋은 방법은 테라리움을 나가는 것뿐인데 이미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손을 썼겠지.”

“그럼 어떡해?”

“그렇다면 섣불리 손을 댈 수 없는 곳으로 몸을 숨겨야지. 마치 나무를 숨기려면 숲으로 가야 하는 것처럼 말이야. 벌레 잡자고 집 한 채를 거뜬히 불태울 인간이 절대 태울 수 없는 곳으로 가야 해.”

“그게 어딘데? 과수원?”

“인페르노의 수장은 세계수의 가지가 있는 곳이라 하더라도 거리낌 없이 불을 지를 인간이야. 하지만 오랫동안 공들여 준비해 놓은 곳으로 간다면 들인 시간과 자원이 아까워서라도 망설여 주겠지.”

하긴 벌레를 놓아서 세계수의 가지를 해한 사람도 있는데 불태우려고 하는 놈은 또 없겠어?

그렇지만 이 세계에서 세계수는 신적 존재 아니야? 왜 이렇게 다들 막 다뤄? 그런데 오랫동안 공들여 준비해 놓은 곳은 또 뭐람?

“잠깐만. 불을 지른다고? 혹시 그 인페르노의 수장이란 사람도 불을 사용하는 마법사야?”

“불을 사용한다니. 그는 불 자체란다. 아주 끔찍한 화마 그 자체지. 걸어 다니는 태양이야.”

사람이 맞긴 하지? 와, 스펙 죽이시네요. 걸어 다니는 태양이라니, 한겨울에 얼어 죽을 걱정은 안 해도 되겠네, 시발. 엄청난 보스 몹이 다가오고 있다고 하니 엄청 불안해졌다. 설명만 들으면 끝판왕 같은데 전 아직 거기 도전할 스펙도 안 되는데요?

“그래서 어디로 가면 되는데? 말만 들으면 어디 숨어 있든 타 죽게 생겼잖아!”

“연금탑으로 가야 해. 그곳만큼은 그분도 어쩔 수 없으실 거야. 일단 그곳에 들어가기만 해도 과격하게 행동할 수 없겠지. 아주 중심부까지 간다면 더욱 좋겠지만.”

연금탑? 내가 16번째 테라리움을 방문한 최종 목적인 그곳? 그런데 말은 참 쉽게 하는데 대체 연금탑엔 어떻게 들어가려고 하는 거지?

18번째 테라리움의 연금탑만 하더라도 입구부터 보안이 장난 아니었다. 다이아를 지불하고 나서야 겨우 입장하게 해 줬는데 여기도 다이아로 통할까 싶었다.

하지만 16번째 테라리움의 연금탑에선 바곳을 비롯한 인공 개량이 진행된다는 것은 확실했다. 드라이어드들이 끔찍하게 여기는 금지되는 일이 행해지는 곳이라 절대 호락호락하지 않을 것 같은데.

“말이 쉽지, 어떻게 들어갈 건데?”

“들어가는 건 아주 쉽지. 가는 길이 까다로울 뿐.”

어닝은 외투와 가방을 챙기곤 극락조화 드라이어드를 불러냈다. 극락조화 드라이어드가 날갯짓하는 새처럼 공중에서 사뿐히 내려섰다.

“원래는 내 금은화가 있는 동산에서 나비 새끼의 축사 시간이 끝나면 사용하려고 했던 방법인데.”

그녀가 드라이어드를 불러내길래 혹시 전투 상황이 생기나 싶어서 나도 내 드라이어드를 불러내려고 했다. 하지만 그녀는 손을 저으며 내 행동을 저지했다.

“안에서 시위해 봤자 소용없어. 열어 주지 않으면 그냥 이쪽에서 열게.”

문손잡이가 덜컥거리는 소리를 냈다. 잠시나마 우리 모두가 문을 바라본 채로 행동을 멈췄다.

“잠겼네? 그럼 뭐 어쩔 수 있나? 문을 박살 내 버려야지.”

문을 박살 낸다고? 하, 진짜 상종도 하기 싫은 놈이다. 파필리온의 엄포에 어닝의 말이 빨라졌다.

“내 극락조화의 능력을 사용할 거야. 내 사랑스러운 꽃은 꽃을 새로 보이게 할 정도로 위장 능력이 탁월하지. 행정 관리원의 월렛을 잠시나마 속일 수 있을 정도로 말이야.”

어닝이 눈짓을 하자 극락조화 드라이어드가 횃대를 닮은 스태프를 가볍게 휘둘렀다. 그러자 나와 어닝, 이리스, 제퍼에게 손바닥만 한 밝은 오렌지색 꽃잎 한 장이 천천히 떨어져 내렸다. 뭐야, 루프는? 내가 루프를 가리키자 어닝은 고개를 흔들었다.

“하지만 드루이드에게만 사용할 수 있어. 드루이드는 세계수의 축복으로 자연과 가까운 자. 그렇기에 드루이드는 극락조화의 능력으로 자연에 완벽히 동화시킬 순 있어도 일반인은 무리란다.”

그 말은 꼭 루프를 포기하라는 거잖아?

“루프만 두고 갈 순 없어. 루프도 우리 편인 걸 알 건데 그녀를 가만둘 리 없잖아.”

“기회는 저 녀석이 문을 박살 냈을 때, 단 한 번뿐이야. 이곳에 발이 묶여 버린다면 연금탑에 숨을 기회도 사라져. 그녀는 장래가 촉망받은 아주 유능한 연구원이긴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어… 어르신…. 전…. 전 괜찮아요. 잘 도망쳐 볼게요!”

루프가 떨리는 목소리로 두 주먹을 꽉 쥐고 말했다.

“루프는 말 그대로 일반인이야. 그녀를 지킬 드라이어드도 무기도 없어. 나 때문에 16번째 테라리움까지 와준 루프를 절대 혼자 두고 갈 수 없어. 차라리 파필리온을 쓰러뜨리고 연금탑으로 가겠어.”

나 살자고 루프를 버리고 간다고?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애초에 내 부탁이 아니었다면 그녀는 이런 위험한 16번째 테라리움엔 오지 않았을 터였다.

메스키트가 파필리온은 영혼의 한계가 아주 큰 드루이드라고 했지. 파필리온도 만만찮은 고렙 유저라는 건데, 그래도 이리스와 제퍼도 있으니….

“당신 행정 관리원이면서 왜 이렇게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처럼 굴까? 이 테라리움은 그의 아티팩트 안이나 다름없어. 그런 그를 상대로 어떻게 해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해?”

어닝의 지적에 아차 싶었다. 드라이어드들이 최상의 컨디션이 되는 테라리움 아티팩트. 내게 28번째 테라리움이 그러하듯 파필리온도 이곳은 완벽한 자신의 영역이었다.

“마스터님, 제가 남겠습니다!”

그때 제퍼가 꽃잎을 이리스에게 넘기며 말했다.

“제가 남아서 이분을 챙기겠습니다요. 싸우지 않고 도망만 친다면 할 만하겠죠. 바로 여관으로 향해 길드원들과 합류할게요. 거긴 아이언비스트도 있으니 큰 도움이 될 겁니다.”

그러자 이번엔 이리스가 제퍼의 것은 물론 자신의 꽃잎까지 모두 제퍼에게 다시 넘기며 말했다.

“아니, 차라리 제가 남을게요. 란타나의 힘이 통할지 모르겠으나 통한다면 7번까지 행동을 묶을 수 있어요. 도망치는 덴 방어형도 있는 제가 더 수월하겠죠. 그리고 전 길드에서 제이 님 다음이잖아요? 길드 마스터의 부재를 제가 메꿔야죠.”

“좋은 길드원들을 두었구나.”

어닝이 내 손에 있는 극락조화의 꽃잎을 집어 내 입가에 꾹 갖다 대며 말했다.

“당장 꽃잎을 먹어. 눈물겨운 의리지만 아티팩트 안에서 드라이어드에게 가해진 모든 위해 기술이 해제되는 것은 알고 있겠지? 란타나 드라이어드의 기술은 통하지 않아. 그러니 남을 거면 둘 다 남아. 어차피 내겐 이 사람만 필요하니까.”

꽃잎을 먹으라고? 그때였다. 큰 소리가 나며 거대한 문 두 짝이 허공을 날았다. 그래서 반사적으로 입가에 대어진 꽃잎을 와작 씹었다. 비누를 씹는 것처럼 불쾌한 맛이 났다. 당장 뱉고 싶었지만 갑자기 몸을 잠식해 오는 홧홧한 기운에 놀라 그럴 틈도 없었다.

이리스와 제퍼의 아티팩트에서 튀어나온 드라이어드들이 기술을 사용하자 사방에 형형색색 꽃잎이 흩날리며 시야를 가렸다. 그 속에서 누군가 내 손목을 잡아끌고 달리기 시작했다. 힘이 대단해 이끄는 대로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그때와 같은 수를 쓰는군.”

순식간에 파필리온을 지나쳐 방을 나와 어느새 복도를 달리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난 큰 소리에 강연장의 사람들이 죄다 빠져나오며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내 손목을 붙잡고 달리는 어닝은 군중 속을 요리조리 잘도 피해 달렸다. 대강당 건물을 나가는 출입구까지 금방이었다.

하지만 그곳에 파필리온과 동행했던 사람들이 먼저 기다리고 있었다. 결국 전투를 벌여야만 하나 싶었는데 달리는 어닝은 멈출 기세를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가 문에 가까워졌을 때, 예상과 달리 그들 중 아무도 우리를 제지하지 않았다. 너무나도 쉽게 문을 통과해 건물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정말 신비로운 힘이지? 이게 바로 내 꽃의 위장 능력이란다. 그들은 우리를 공기와도 같이 당연한 존재라 여겨 특별히 인식할 수 없어. 자연 그 자체가 됐기 때문에 나비 새끼의 월렛에도 탐지되지 않는 거야.”

그녀는 달리며 숨도 차지 않는지 웃으며 말했다. 난 숨차서 뒈질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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