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0화 (130/604)

어닝은 약속했던 것처럼 시간이 좀 흐르자 방으로 되돌아왔다. 그녀는 감은 눈을 꾹꾹 누르며 아주 작게 한숨을 쉬었다. 무척이나 피곤해 보였다.

“지금은 경품 추첨 시간이야. 나비 새끼가 달갑지도 않은 환영 축사를 하고 있을 때지. 뽐내기와 관심을 좋아하는 녀석이니 꽤 오래 시간을 끌 거야.”

“파필리온이 월렛을 보고 있지 않을 때를 노린 거군요?”

“그래. 똑똑해서 다행이구나.”

조롱처럼 들리진 않았다. 그녀는 어두운 색의 외투를 걸치며 내게 어서 나가자며 종용했다. 나는 소파에 앉은 채로 그녀를 불러세웠다.

“문제가 있어요. 그 동산, 아무나 출입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에요. 권한이 필요해요.”

난 여기 테라리움의 연금탑 소속인 윈터와 동행했기에 동산에 갈 수 있었음을 그녀에게 말해 주었다. 어닝은 이젠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한숨을 쉬었다.

“정말이지…. 소속 연구원이 필요하고 동행은 한 명뿐이라…. 결국 당신이 가서 내 드라이어드를 데려와 줘야겠네.”

안 되는 이유를 굳이 또 말해 주기엔 입이 아플 정도라 답하진 않았다. 몇 번을 말해. 검은 나뭇가지가 가로막고 있다고.

“그래, 그 검은 나뭇가지.”

이젠 클릭을 안 해도 스크립트가 알아서 자동 재생이 되네요. 혹시 스킵 되나요? 혼자 열심히 떠들고 나서 그녀가 어떤 결론을 내릴지 빨리 확인하고 싶네요.

하지만 예상과 달리 선택지가 떠 버렸다.

“분명 당신에겐 수준급의 드라이어드들이 있어. 그런데도 돌파하지 못한다는 건 다른 힘이 작용하고 있다는 거겠지. 당신, 내게 하지 않은 이야기가 있지? 난 당신에게 숨겨도 되지만 당신은 내게 숨기면 안 돼. ‘연금술사’인 어닝의 도움을 받고 싶다면 지금 당장 이야기해.”

그녀의 말에 곧바로 검은 가지가 세계수의 가지란 걸 이야기하지 않은 사실이 떠올랐다. 흠, 한번 떠봐?

“드라이어드들이 검은 나뭇가지를 공격하려 하지 않았어요. 할 마음이 전혀 들지 않는다고 해야 하나?”

“꽃들이 무기를 꺼내지 않는 건, 단 두 가지 경우뿐이지. 자신의 소중한 작은 세계수와 진정한 세계수를 공격해야 할 때. 그렇다면 그 검은 나뭇가지, 세계수의 일부로군.”

히익. 루프가 별안간 호루라기처럼 높은 소리를 내었다. 그 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자 그녀는 황급히 입을 가렸다. 자신도 모르게 낸 소리인 듯했다. 시종일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눈으로 어닝을 바라보던 이리스와 제퍼마저 그녀를 향해 작게 손뼉을 쳤다.

와, 나와 시들링은 물론이고 윈터가 데려왔다던 드루이드들도 헤맸던 문제를 저렇게 단순하게 풀어 버린다고? 지능 스탯 차이인가?

“내 말이 맞나 보군. 외부인인 당신이나 다른 이들이 그 검은 가지를 발견하도록 파필리온이 내버려 둔 거라면, 과수원엔 대외용 세계수의 가지가 온전히 존재하고 있다는 건데. 검은 가지의 정체를 들키지 않을 자신도 있고.”

제멋대로인 그녀에게 들었던 일말의 비호감이 모두 쓸려 내려갈 정도였다. 진짜 머리 잘 굴린다. 멋있네. 만렙 연금술사냐고 묻고 싶어질 정도였다. 지능 스탯이 저렇게 대단할 정도면 다시 한번 연금술사 겸직을 재고해 볼만 한데?

“드라이어드들은 그 검은 나뭇가지가 세계수의 가지란 걸 알아보지 못했어요. 오히려 불쾌하다고 했는데요?”

내 말에 어닝은 시선을 옆으로 빼고 턱을 톡톡 두드렸다. 그녀는 곧 시선을 내리고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드라이어드는 세계수를 공경하고 조건 없는 무한한 애정을 느끼는데 불쾌함이라…. 정반대의 감정을 느끼게 만들었다고? 설마…. 그렇군. 감히 내 것을 흉내 내 먹였군.”

저거 무슨 말인지 물어봐도 어차피 안 가르쳐주겠지?

“그래서 그 대단한 세계수의 가지가 길을 막고 있으니 치울 수도 없어요. 드라이어드들은 공격에 협조를 해 주지 않고 물리적인 힘은 통하지도 않아요. 금방 재생해 버리기도 하고. 그걸 먼저 해결하지 않는 한 그 인동덩굴 드라이어드와도 만날 수 없을 거예요.”

“그 정돈 쉽지. 한 번도 해 봤는데 두 번이라고 못 해 보겠어?”

“뭐라고요?”

내 의문에 그녀는 작게 웃었다.

“꽤 똑똑한 행정 관리원이라 이미 거기까진 알고 찾아온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네? 28번째 테라리움이 뭐 때문에 망했는진 이미 알고 있을 거 아냐? 그리고 그 원흉 역시 이미 추리를 끝낸 줄 알았는데?”

설마 그 말은…. 전혀 숨길 것이 없다는 듯 당당한 그녀의 태도에 확신이 들었다.

“그 하얀 벌레…. 당신 짓이 맞군요.”

“당연하지. 세계수를 좀먹는 벌레를 이 내가 아니면 그 어느 누가 만들어 낼 수 있었겠어? 물론 아이디어는 여기 있는 장래가 촉망되는 연구원이 제공해 주었지만 말이야. 생각하는 건 쉽지. 하지만 그걸 실현할 수 있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

그녀는 숨을 죽이며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던 루프를 가리키며 말했다.

“네? 저… 저요?”

루프는 갑자기 자신을 지목당하자 놀라 말을 더듬었다. 그러곤 미소를 짓고 있는 어닝과 그녀를 향해 이를 악문 날 번갈아 보더니 점점 눈이 커지기 시작했다.

“어르신… 전에 28번째 테라리움이 반파당했다고…. 그래서 거주지부터 새로 마련해야 할 정도라고…. 그런데 어닝님이 방금 세계수를 좀 먹는 벌레라고….”

루프의 얼굴이 도화지처럼 새하얗게 질려갔다.

“설마… 28번째 테라리움의 세계수의 가지가… 병충해의 공격으로 변을 당한 거였나요?”

“그래, 어지간한 공격으론 끄떡없고 재생력도 대단한 세계수의 가지를 불을 불러오지 않고 유일하게 죽일 수 있는 방법. 연구원 루프, 당신의 논문에 힌트를 얻었지. 공이 아주 컸어. 세계수의 축복을 이겨 내는 벌레를 만들어 내는 건 꽤 힘들었지만 무척이나 매력적인 연구였어. 큰 힘을 들이지 않고도 세계수의 가지를 천천히 무너뜨려 주었지.”

“내… 내 논문 때문이다니…. 내가 세계수의 가지를 좀 먹는 그런 끔찍한 벌레를 만들게 한 계기가 되다니….”

루프는 아주 큰 충격을 받았는지 몸을 웅크리고 잘게 떨었다. 안타까운 그녀의 모습에 위로를 해 주고 싶어도 상황이 너무 좋지 않았다.

만약 이 자리에 아티팩트에 돌아가지 않은 메스키트가 있었다면…. 신중한 그녀조차 어닝의 말을 듣고도 무기를 꺼내지 않고 견딜 수 있었을까?

“세계수의 가지를 말려 죽여 놓고… 거기다 테라리움까지 망하게 만들어 놓고… 당신은 그저 매력적인 연구였다고 칭하는 건가요?”

분노 때문에 내 목소리가 떨렸다.

28번째 테라리움의 참상을 두 눈으로 직접 목격한 입장으로써 태연한 그녀의 태도를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온 건물이 파괴당하고 불에 타고 멀쩡한 것이 하나 없었다. 수없이 많은 희생자를 집어삼켰을 불은 산처럼 거대했다. 그리고 그 불이 외부로 나가지 않게 생명력을 깎아 가며 최후의 그래프트를 펼쳤던 스케어크로우까지.

“아니. 단순 연구가 아니었지. 중대한 임무였지. 테라리움을 고립시키고 병들게 만들어 삼키기 좋은 먹잇감으로 만들고 무능을 느끼고 좌절한 행정 관리원까지 한입에 꿀꺽할 수 있게 만드는 임무.”

욕이 절로 나왔다. 머리 잘 돌아간다고 칭찬했던 것 취소다.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 추악한 행동을 할 수 있지? 당장이라도 그녀와 그녀의 드라이어드인 인동덩굴 따위 무시해 버리고 방을 나오고 싶었다.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그녀를 존경해 마지않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그녀의 실체를 전부 까발리고 싶었다.

“내가 끔찍하게 느껴지니? 충분히 그럴 수 있지. 바른 생각을 하는 인간이라면 내 행동에 분노하는 것도 이해가 가. 하지만 전 행정 관리원도 아닌 지금의 당신이 날 처벌할 권리는 있어? 28번째 테라리움에 당신의 지인이 있었어? 고향이었나? 아니면 내 행동에 의해 소중한 것을 잃기라도 했어? 뭐, 그렇다면 당신에게 사과를 하겠어. 하지만 그것도 아니라면 당신은 날 직접적으로 어떻게 할 수 없어. 그리고 당신은 아직 날 필요로 할 거야.”

“당신은 세계수의 가지에 해를 가했잖아! 그것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죽었어!”

그녀에게 더 이상 연장자의 대우는 필요 없었다.

“후후, 그렇다면 저 뒤 번대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원들은 모두 대역죄인이겠구나. 불의 침입으로부터 세계수의 가지를 지켜내지 못했으니. 그도 아니라면 세금을 충분히 걷지 못해 세계수의 가지에 다이아를 보급해 주지 못하는 무능한 행정 관리원들 역시 동일 선상에 있겠구나. 다이아를 공급받지 못한 세계수의 가지는 메말라 가니까.”

저 여자가 아니라 내가 이상한 거야? 어떻게 저렇게 뻔뻔하게 궤변을 늘어놓을 수 있지?

“아니면 자연을 수호하는 드루이드로서 내게 그렇게 화를 내는 건가? 하지만 나도 드루이드인걸. 우린 애초에 스스로의 선택 없이 세계수의 축복을 영혼에 심고 태어나지. 태어날 때부터 정해지는, 불로부터 세계수를 수호하는 사명? 아니, 그런 건 없단다. 유일하게 불을 무찌를 수 있는 드라이어드를 다룰 수 있기 때문에 그 사명을 수행할 수 있는 것은 드루이드뿐이라 여겨지는 것뿐이지. 자, 그렇다면 이제 세계수의 가지를 해한 내게 윤리 말고 무엇으로 분노하겠니?”

“아니, 그 윤리. 당신이 행한 짓이 많은 피해를 입히고 도덕적으로 옳지 않은 짓이니까 당신을 비난하겠어. 당신 진짜 끔찍한 사람이야! 생명에 대한 존엄을 기본적으로 생각하지도 않잖아? 당신은 양심도 없어?”

내가 조금만 더 화술이 뛰어났다면…. 그녀가 날 쏘아붙였던 것만큼 나도 그녀의 코를 납작하게 눌러줄 수 있는 주장을 펼칠 수 있었을 텐데!

이리스가 나서 뭐라고 내 말을 거들려 하자 어닝은 별안간 호쾌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정말 당신은 스케어크로우랑 닮았어. 올곧은 모습이 한 번쯤 부러뜨려 보고 싶을 만큼 매력적이었지.”

그녀는 너무 웃어서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으며 그리움을 담은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뭐야, 재수 없어.

“물론 세계수의 가지를 작정하고 해한 일은 1번째 테라리움의 중앙 행정 관리부에서 규정 위반으로 날 지명 수배하고도 남을 일이야. 잡힌다면 큰 벌을 받겠지. 하지만 난 이 자리 외에서 내 입으로 스스로 병해충을 풀어 세계수의 가지를 해했다는 사실을 말할 생각은 없어. 그리고 내 말 외엔 내 행동을 증명할 증거가 당신에겐 없겠지.”

“이…!”

어닝의 말은 사실이었다. 증거는 없었다. 애초에 여기 오기 전까지 그녀가 범인인지 아닌지 갈팡질팡 의심만 했을 뿐이었다.

우리 사이에 달궈진 아스팔트처럼 불편한 기류가 흐르고 있을 때,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벌써 올 리가 없는데?”

어닝이 문을 바라보며 의문이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주인공이 이렇게 오래 자리를 비워서야 어떡하나?”

단순 스태프라 생각했는데… 저 목소리는 전혀 예상외의 인물이었다. 강연장에서 축사를 읊고 있을 파필리온이었다. 어닝의 얼굴이 아주 끔찍한 것을 본 것처럼 단번에 구겨졌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