웬 드라이어드지? 따뜻한 색감의 드라이어드는 아무 말 없이 우리에게 먼저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그러곤 팔을 들어 입을 가렸다.
새의 깃털처럼 조각조각 나뉜 소매가 차르르 아래로 흘러내리자 꼭 접은 날개처럼 보였다. 곧이어 쪼르르 우는 새의 울음소리를 닮은 높고 청아한 목소리가 그녀에게서 흘러나왔다.
“레드 데이지의 반려인 제이가 맞나요? 제 반려가 당신을 뵙길 원합니다.”
반려? 그것보다 레드 데이지라면 루프와 함께 보낸 데이지2를 말하는 걸까?
“내가 제이가 맞긴 한데. 반려라면 네 주인인 드루이드를 말하는 거야?”
“네, 제가 태어난 순간부터 죽을 때까지 영원히 함께하는 존재. 저를 따라오면 제 반려에게로 안내하겠습니다.”
“네 주인이 누군지 모르는데 무턱대고 따라갈 순 없어.”
이리스가 나와 드라이어드 사이로 끼어들며 날카롭게 말했다. 드라이어드는 이리스를 차분한 눈으로 보더니 다시 맑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경계가 심하여 레드 데이지를 들먹여도 바로 따라오지 않을 경우, 전언하라 했습니다. 28번째의 마지막 꽃 한 송이를 내게 보였다는 건 진상을 알고 싶은 거겠지? 극락조화의 위장 능력은 건물 안에서 오래 가지 않으니 애꿎은 나비가 꼬이기 전에 빨리 판단해야 할 거야.”
그녀의 말에 머리를 망치로 한 대 맞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어닝이다! 드라이어드를 보낸 것은 어닝이 분명했다. 어떻게 어닝과 연결된 거지?
“따라가자.”
“제이 님, 괜찮을까요?”
“드라이어드를 보낸 사람이 누군지 알 것 같아.”
내 말에 이리스는 드라이어드를 몸으로 막으며 경계하는 것을 멈췄다. 대신 여전히 수상한 눈빛을 보내며 드라이어드를 훑어보았다.
“극락조화 드라이어드라고? 정말 꽃이 새를 닮았네.”
“제 모체는 조매화(鳥媒花)이기에 새를 부르기 위해 새를 흉내 냅니다. 그러니 닮은 것이 당연합니다.”
제퍼가 극락조화 드라이어드의 귓가에 꽂힌 꽃을 보며 신기해하자 그녀가 덤덤히 말했다. 그 설명에 나도 신기해서 드라이어드의 꽃을 빤히 바라보았다. 잘 보니까 정말 횃대에 앉은 오렌지색 새를 닮은 것 같기도 하다.
그녀를 따라 불빛이 은은한 대강당의 복도를 걸었다. 그리고 어느 대기실 앞에 도착했다. 극락조화 드라이어드가 문을 두드리고 “데려왔습니다.”라고 말하자 지체 없이 문이 열렸다.
뒤이어 나타난 인물은 팸플릿에서 본 것과 똑같이 생겼다. 은발과 금안, 벌레 연금술의 대가 어닝이었다.
“기다리고 있었어.”
차분하고 여유로운 목소리가 우릴 반겼다. 그녀를 사진이 아닌 실물로 보자 은근한 포스가 느껴졌다. 어닝의 등 뒤로 소파에 앉아 있는 루프와 데이지2가 보였다.
“휴식 시간에 잠깐 자리를 비운 것이라 금방 돌아가 봐야 해. 그러니 얼른 이야기를 해 볼까?”
그녀의 말에 극락조화 드라이어드가 새의 날개 같은 팔을 뻗어 우리를 안으로 안내했다.
“나는 기억력이 좋아. 그래서 이 레드 데이지 드라이어드가 그때 과수원에서 일했던 자라는 걸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지.”
데이지2는 확신에 찬 눈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어닝이 그 보좌관 델어닝이 맞구나.
“날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 거라곤 정말 생각도 못 했어. 그날 28번째 테라리움의 모든 이들이 불에 타 죽었으니까. 하지만 저 꽃 한 송이가 끝내 당신을 내게 인도했네.”
“왜 유명한 연금술사면서 스케어크로우의 보좌관 행세를 했던 거죠?”
똑같이 반말로 응수하고 싶었지만 어닝은 포스로 보나 행동으로 보나 훨씬 연장자로 보여 차마 그럴 수 없었다. 더구나 그녀의 반말이 내게 하대를 한다고 느껴지기보단 그녀 자체의 높은 프라이드에서 우러나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스케어크로우라… 그 이름 정말 오랜만에 들어. 그리운 이름이네.”
어닝은 슬픈 얼굴이 되었다. 도저히 연기로는 보이지 않는 그녀의 태도에 의중을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녀는 진심으로 스케어크로우를 그리워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당신이 현재의 28번째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원이라 들었어. 그렇다면 스케어크로우는 결국… 죽은 거겠지? 그녀는 자신의 마지막 모습을 보는 것조차 내게 허락해 주지 않았어.”
“제 질문에 답해 주세요. 왜 보좌관을 하셨던 거예요?”
님 입으로 시간이 없다면서요. 왜 본론부터 들어가지 않고 빙빙 돌려요?
이 수수께끼 같은 모든 문제의 열쇠가 될 수 있는 어닝과 핵심 열쇠. 왜 유명한 연금술사인 그녀가 테라리움의 보좌관 행세를 했는가?
직접 본 그녀의 인기는 대단했다. 강연을 듣기 위해 밤새워 줄을 서고 몸싸움을 벌이는 사람들. 직업의 귀천을 따지는 것은 아니나 이토록 유명한 연금술사인 그녀가 행정 관리원도 아닌 행정 관리원의 보좌관을 하는 것은 정말 이상했다.
불순물이 섞이지 않은 맑은 옐로우 토파즈 같은 그녀의 금안이 날 똑바로 응시했다. 입을 다물고 날 뚫어져라 바라보는 그녀의 눈은 맹수처럼 형형했다. 그러다 곧 그녀의 입가가 부드럽게 호선을 그렸다.
“그야, 그것이 내 임무였기 때문이지.”
“…임무요?”
그러곤 입을 다물어 버렸다.
임무라니? 대체 무슨 임무?
그때 밖에서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어닝을 제외한 모두가 반사적으로 숨을 흡, 하고 참았다.
“어닝 연금술사님, 곧 휴식 시간이 종료됩니다.”
“아,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됐나요? 강연 자료를 보충하느라 아주 조금 시간이 필요한데 적당히 융통성을 발휘해 주시면 안 될까요?”
나를 대할 때와 달리 말투가 확 바뀌었다. 마치 인자한 모습을 연기하는 것처럼 보였다.
“어렵지 않습니다. 준비가 되시는 대로 속히 나와 주시기 바랍니다.”
그 말과 함께 밖의 인물의 발소리가 멀어졌다. 더 이상 발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 어닝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분이 보시기에 세계수의 28번째 테라리움은 테라리움 그 자체로나 행정 관리원이나 모두 맛 좋은 먹잇감이었어. 그래서 내가 파견된 거지. 둘 다 손에 넣기 위해.”
“그분은 또 누구예요?”
“이젠 날 죽이고 싶어서 혈안이 된 분? 후후, 난 분명 곱게 죽진 못할 거야. 결국 자신을 몇 번이나 속였단 걸 알았으니 날 불태워 죽여 버릴 거야. 단번에 타 죽으면 그나마 다행이지. 그 성정에 내 손발부터 천천히 태워 가면 어쩌나 몰라.”
끔찍한 이야기를 하면서도 얼굴은 무척이나 평온해 보였다. 심지어 웃기까지 했다. 아니 타 죽는다는데 웃음이 나와여? 대체 ‘그분’이 누구길래 그렇게 잔인한 짓을 한다는 거지? 설마 파필리온?
“더 알고 싶지? 그렇다면 내 소중한 드라이어드를 찾는 걸 도와줘. 이곳에 볼모로 잡혔는데 찢어 죽이고 싶은 나비 새끼가 아주 꼭꼭 숨겨놓은 것 같더라고.”
아주 자기 할 말만 해요. 묻는 것을 관뒀다.
어닝은 내 질문에 답을 해 준다기 보단 적절한 때에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만 했다. 꼭 정해진 스크립트 대사만 읽는 것처럼. 그럼 난 입 다물고 선택지 나올 때까지 클릭, 클릭만 해 줘야지, 뭐.
“얼굴이 반반하다고 찬사는 자자한데, 대체 어딜 봐서 그게 반반한 거야? 그래, 당신 뒤의 그 하얀 꽃 드라이어드처럼 말이야. 정말 요즘 애들 감성은 모르겠어. 우리 때는 튤립이 제일이었지. 튤립의 알뿌리처럼 꽉 차고 실한 것이 제일인데 말야.”
어닝은 내 뒤에 선 엘더를 가리키며 말했다.
아니 우리 엘더가 어디가 어때서요? 이 미모가 이 세상 미모라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보기만 해도 힐링이 되는 미모가 세상에 흔해요? 저는 밥 안 먹어도 얘 얼굴만 보고 살 수 있을 것 같거든요. 제가 살면서 이렇게 예쁜 얼굴은 처음 봤는데요!
잠깐, 우리 엘더를 들먹일 정도면….
“그 찢어 죽이고 싶다는 나비 새끼가… 설마 파필리온?”
“그래, 그 녀석. 불구덩이로 환장하며 뛰어드는 나방같이 구는 천박한 그놈 말이야.”
“앗, 찢어 죽이고 싶다는 말은 동의합니다.”
“내 드라이어드를 찾으면 강연이 끝나자마자 테라리움을 떠나려고 했는데 대체 어디에 꽁꽁 감춰 뒀는지. 지금쯤이면 내 기운을 느낀 꽃이 날 찾아왔어야 했는데. 나비 새낀 그래 놓곤 여봐란듯이 날 약 올리려고 강연에 나타나질 않나.”
어닝은 팔짱을 끼고 속사포로 파필리온의 험담을 했다.
“주인도 못 찾아낸 드라이어드를 제가 어떻게 찾아요?”
“다 타 버린 28번째 테라리움에서 꽃 한 송이를 찾은 당신이잖아? 온전한 테라리움에서 금은빛으로 아름답게 빛나는 내 꽃 한 송이라고 못 찾겠어? 그 애, 시기상으로 곧 세계수의 품으로 돌아갈 때가 다 됐어. 빨리 영혼의 연결을 다시 맺어 줘야 해.”
금은빛으로 빛나는 꽃에 시기상으로 곧 세계수의 품으로 돌아갈 드라이어드라 하면…. 세상에 이런 우연이 다 있나.
“금은화… 인동덩굴 드라이어드를 말하는 거예요?”
내 말에 어닝의 낯빛이 확 바뀌었다. 시종일관 여유로운 태도를 고수하던 그녀가 처음으로 초조함을 내비쳤다.
“당신, 꽃 찾는덴 아주 도가 텄구나? 그 아이가 어디 있는지 알아?”
나는 인동덩굴 드라이어드를 만난 곳과 검은 나뭇가지가 가는 길을 그물처럼 막고 있어서 갈 수 없는 사실을 그녀에게 알려 주었다. 물론 그것이 세계수의 가지라는 사실은 제외하고. 그러자 내 말을 들은 그녀가 불같이 화를 내었다.
“동산이라고? 이 테라리움에 좀 높은 언덕은 있어도 동산이라고 부를 만한 것은 없었는데. 거기다 길을 막은 검은 나뭇가지라니. 나비 새끼가 수를 썼군.”
그녀는 이를 아득 갈았다. 주먹 쥔 늘씬한 손등에 핏줄이 불뚝 올라온 것이 보였다. 그녀가 뭐라고 더 하려는 찰나 다시 한번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이젠 그녀에겐 이곳에서 더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내 금은화를 찾아와 줘. 그럼 당신이 알고 싶어 하는 이야기를 들려줄게.”
“말씀드렸잖아요. 길을 막은 장애물이 엄청 까다로워서 못 넘어간다니까요?”
“난 무조건 오늘 내로 이곳을 빠져나가야 해. 강연이 끝나고 나면 너무 늦어.”
“아니 글쎄…!”
아니 퀘스트 못 한다고요! 그 퀘스트 이미 지금은 완료 불가인 걸 제가 확인하고 왔다니까요? 검은 가지 치우려면 분명 선행 퀘스트가 존재하는 것 같은데, 제가 아직 그걸 못 했단 말이에요. 심지어 깨지도 못할 퀘스트에 시간 제한까지 빠듯하게 주면 제가 뭘 어떻게 하나욥!
“어닝 연금술사님, 시간이 너무 오래 지체되었습니다. 참석자분들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혹시 무슨 문제가 생기신 건가요?”
어닝은 문을 바라보며 짜증 난다는 표정을 지었다.
“죄송해요. 강연 자료를 보충하다가 제가 너무 열중해 버렸나 보네요. 지금 나갈게요.”
그러곤 그녀는 의자에 놓인 가방을 들고 와 소파 앞의 테이블에 거꾸로 들고 흔들었다. 가방에서 종이 뭉텅이가 우수수 떨어졌다. 그러곤 그걸 한 아름 주워 안더니 날 바라보았다.
“강연을 진행하다 틈을 봐서 빠져나오겠어. 여기서 잠시 기다려. 날 금은화가 있는 곳으로 안내해.”
“진짜 제멋대로시네요.”
“난 당신이 알고 싶어 하는 모든 걸 알고 있어. 항상 이 머리가 내 무기였지. 내가 무기를 쥐고 있는 한 주도권은 내게 있어.”
그녀가 문 앞으로 걸어가자 극락조화 드라이어드가 우릴 칸막이가 쳐진 장소로 안내했다. 그곳에 나와 이리스, 제퍼, 루프를 포함한 내 드라이어드들이 전부 몸을 감추기에는 무리였다.
드라이어드들을 전부 아티팩트로 돌려보내고 나서야 어닝은 문을 열고 밖에서 대기 중인 사람과 함께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