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8화 (128/604)

“네? 세계수의 가지라고요? 과수원에서 엄중히 보호 관리를 받고 있어야 할 세계수의 가지가 왜 그런 동산에 있었다는 거죠?”

이리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물었다. 그리고 곧 메스키트가 그녀 다음으로 입을 열었다. 놀란 이리스와 달리 메스키트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침착했다.

“내 주인, 제이. 제가 본 검은 그것이 세계수의 가지라고 말하는 건가요?”

“드라이어드들의 놀란 눈치를 보면… 아무도 몰랐나 본디…. 그럴 수가 있나 싶은디….”

세계수에서 태어나거나 세계수가 뿌린 축복에서 태어나는 드라이어드들이 세계수의 가지를 알아보지 못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동산에 갔던 드라이어드 중 검은 나뭇가지가 세계수의 가지임을 알아보는 드라이어드는 아무도 없었다. 다들 불쾌함과 함께 세계수의 힘을 느꼈을 뿐이었다.

본능적으로 공격을 거부하기도 했고, 어떤 드루이드는 드라이어드의 모체라고 착각하기도 했다.

“그… 내가 세계수의 가지랑 대화를 좀 해 봤는데.”

이렇게 말하니 엄청 대단한 사람이 된 것 같아. 내가 말이야, 이 세계에서 제일 높은 존재랑 말도 하는 사이인데 말이야.

“세계수의 가지와 드라이어드처럼 대화를 하셨다고요?”

놀라는 포인트가 여러 개다 보니 어디에서 중점적으로 놀라야 할지 모르겠다는 것처럼 다들 긴장한 얼굴로 날 바라보았다. 메스키트는 “그렇다면 그때겠군요….” 하며 내가 쓰러졌던 때를 회상하는지 걱정이 가득 감긴 손길로 내 어깨를 짚었다.

이리스의 파티가 걱정하지 않도록 기절했던 이야기는 빼고 꿈에서 겪었던 일을 설명해 주었다.

“어째서 세계수의 가지인 걸… 알아차리지 못했을까요?”

칼미아가 충격 받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게 제일 의문이었다.

“그래서 혹시나 하고 과수원을 들러서 확인해 봤는데 거기에 건강한 가지가 있었어. 테라리움에 가지가 둘 존재할 수 있나?”

“아뇨. 테라리움을 수호하는 세계수의 가지는 하나씩이에요. 가까울수록 가지가 더 크고 굵을 순 있어도…. 많은 테라리움을 돌아다녀 봤지만 하나 이상의 가지가 존재하는 곳은 본 적 없어요. 이건 아마….”

내 의문에 이리스가 답해 주며 시들링을 힐끗 바라보았다.

“아이언비스트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부럽다! 나도 저 고렙들처럼 많은 테라리움을 돌아다녀 보고 싶다! 그래서 저렇게 아는 척하고 싶다! 우물 안 개구리의 심정이 이러할까?

“루프, 예비 연금술사의 견해론 어때요?”

“어….”

자신에게 관심이 집중되자 당황스러운지 루프가 얼굴을 살짝 붉혔다. 루프는 시들링과 멀찍이 떨어진 자리에 앉아 평소의 활발한 성격도 죽인 채 입을 다물고 있던 터였다.

다들 조용히 루프가 말하길 기다리자 결국 그녀가 머뭇머뭇 이야기를 꺼냈다.

“제게 물어보시는 건 혹시 연금술이 개입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셨다는 거죠? 저도 그럴 확률이 높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연금술의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니까. 누군가의 생각지도 못한 아이디어가 힘을 발휘하고 있을 수도 있어요. 다만 말 그대로 ‘생각지도 못한’ 아이디어니… 감히 추측할 수가 없어요.”

“연금술로 드라이어드들의 눈까지 속일 수 있다니…. 하지만 이곳은 금지된 인공 개량도 진행하는 곳. 규정을 무시하고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면 상상을 초월한 것들이 많이 있을 수도 있겠어요.”

이리스가 루프의 말에 긍정하며 말했다. 이들과 검은 세계수 가지의 정체와 세계수의 가지를 도와줄 방법, 그리고 16번째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원이 과연 이 사실을 알고 묵인하고 있을지, 아니면 주도하고 있을지 등을 토론하며 오랜 시간을 보냈다.

시들링은 직설적이며 사회성 꽝인 화법을 사용하지만 고렙인 만큼 아는 지식과 보고 겪은 정보의 양이 이 중에서 제일이었다.

이리스의 파티 역시 정보가 많았다. 특히나 여행 중 사람들에게 입수한 정보나 소문 쪽에서.

루프는 아직까지 시들링을 무서워하며 좀처럼 나서진 못했지만 연구원이었던 그녀였기에 연금술과 관련된 견해를 적절히 내놓았다.

문제는 나. 아는 것이 없는 텅 빈 백지 같은 난 메스키트를 대변인으로 세웠다. 메스키트는 내 드라이어드니까 메스키트가 하는 말은 곧 내 의견임.

그러다 곧 어닝의 강연이 시작할 시간이 되었다. 오랜 토론 끝에도 뭐 하나 확실시된 것은 없었다.

루프는 급하게 여관 측의 도움을 받아 강연에 입고 갈 옷을 마련했다. 물론 다이아는 내가 냈다. 정장을 말쑥하게 차려입은 루프는 온몸으로 설렘을 뿜어내며 발을 동동 굴렀다.

티켓에 기재된 정보에 의하면 티켓을 보유한 1인만 입장 가능이라 내가 따라가는 것은 아쉽게도 불가능했다. 하지만 아주 잠깐이지만 강연이 끝나면 스폰서 타임이 있었고 그땐 강연 참가자의 지인이나 후원자가 1명 참가할 수 있었다.

다만 스폰서 타임의 참가 자격은 어닝의 눈에 띈 소수만 가능했다. 그 자리가 루프가 잘해 준다면 내가 어닝을 볼 수 있는 유일한 기회가 될 수 있었다. 루프는 어떻게든 어닝을 스폰서 타임 때 나와 만나게 만들겠다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리스와 제퍼 그리고 내가 루프를 배웅해 주었다. 스폰서 타임 때 참가하기 위해 근처에서 내가 대기해야 했기 때문이다.

가면서 분위기가 흉흉했던 무리의 이야기를 우연히 엿듣게 되었는데 어닝의 강연 티켓을 강탈하기 위해 몸싸움이 나기도 한 듯했다. 어닝의 인기가 정말 대단하구나.

“제가 잘할게요! 팸플릿을 보면 질의응답 시간이 두 번 정도 있는데 그때 획기적인 질문을 하고 말 거예요. 꼭 어닝의 눈에 띄어서 어르신을 스폰서 타임까지 이끌게요!”

“잘 부탁할게요.”

입장하기 위해 줄을 서는 사람들이 보였다. 드라이어드와 함께 있는 이도 있었는데, 연구원이면서 드루이드를 겸하고 있는 듯했다. 그렇다면 루프도 드라이어드 하나 정돈 데려가도 되지 않을까?

대기 줄로 향하려는 루프를 붙잡았다. 그리고 아티팩트를 통해 28번째 테라리움에 있을 데이지2를 불러왔다.

데이지2는 과거의 28번째 테라리움을 겪었던 드라이어드. 데이지2에게 실제로 어닝을 보고 그녀가 보좌관인 델어닝이 맞는지 확인을 부탁할 생각이었다.

또한 운이 좋다면 델어닝이 데이지2를 알아보지 않을까? 레드 데이지 드라이어드는 노멀 등급이라 흔했지만 혹시 모를 일이니까.

강연이 열리는 곳은 대강당의 2층 강연장. 내가 대강당 안의 1층 카페테리아에 있을 예정이기 때문에 데이지2가 나와 떨어져 루프와 동행하는 것이 가능했다.

“와, 28번째 테라리움 밖으로 나오는 건 처음이에요. 민들레 묘목들 이야기를 듣고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릅니다. 아, 물론 그 위태했던 전투를 겪고 싶은 마음은 아닙니다. 다른 테라리움은 이렇게 생겼군요. 저희 28번째 테라리움도 정비가 끝난다면 이런 건물을 몇 채나 세울 수 있을 겁니다.”

데이지2는 무척이나 수다스러운 드라이어드였다. 아티팩트에서 나온 순간부터 신이 나서 떠들어 댔다. 함께 가게 될 루프가 일반인인 것이 다행일 정도였다. 드라이어드와 대화가 통하지 않으니까.

입장 대기 줄은 빠르게 줄어들었다. 곧 데이지2와 함께 루프도 강연장 안으로 사라졌다. 카페테리아는 강연장에 들어간 참가자들의 지인들로 북적거렸다. 그들 속에서 운 좋게 테이블을 차지한 우리는 간단히 음료수를 마시며 스폰서 타임을 기다렸다.

그리고 곧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시들링을 데려오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뜬금없이 파필리온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저 새끼가 여긴 또 웬일이야?’

그의 주위는 수행원으로 보이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아무도 대동하지 않고 테라리움 안을 ‘지나가는 NPC 1’처럼 잘만 돌아다니던 26번째의 행정 관리원과 무척이나 상반되는 모습이었다. 자기가 무슨 연예인인 줄 알아.

잘생긴 행정 관리원의 등장에 카페테리아가 금세 시끄러워졌다. 연예인 맞았다. 인기 장난 아니네.

나와 엮이지 않길 빌었지만 그는 곧장 나와 일행들이 있는 테이블로 걸어왔다. 눈치껏 이리스와 제퍼가 그를 경계하며 시립했다.

“블랙 릴리의 그대, 이곳에 애처롭게 앉아 있기엔 그대의 지위가 너무 고귀한걸.”

“갈 길 가. 난 원래 카페에 앉아 있는 거 좋아해.”

별로 좋아하진 않지만 오늘부터 엄청 좋아할 예정이다.

“그대가 어닝의 강연에 관심이 많을 줄은 몰랐는걸. 나와 함께한다면 귀빈석으로 갈 수 있는데, 어때? 내가 그댈 에스코트할 기회를 주지 않을래?”

그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곧 다시 보게 될 거라던 말은 이걸 뜻했군.

파필리온을 보는 이리스의 표정이 헛소리하는 제퍼를 볼 때처럼 구겨졌다.

내가 어닝을 만나려고 하는 이유를 파필리온이 알아선 안 됐다. 그와 함께 귀빈석으로 간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루프를 믿고 스폰서 타임을 기다리는 것이 나았다. 대꾸를 하지 않고 손을 휘젓자 그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데이트 신청을 또 거절당하다니. 거절당하는 것은 물론 그것도 한 사람에게 여러 번이라니, 처음이야.”

주변 시선을 의식하는 것인지 파필리온은 더 이상 내게 질척거리지 않았다. 다만 사람들이 입장할 때 사용한 강연장 문이 아닌 다른 곳으로 향하기 전, 아주 작은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여관의 라운지에서 들었던, 느끼함을 뺀 그 말투였다.

“원하는 대론 되지 않을 거야.”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 그는 홀연히 가 버렸다. 원하는 대론 되지 않을 거라고? 설마?

그 의미는 시간이 한참 지난 후에 알 수 있었다.

누군가 오늘 있을 스폰서 타임이 취소되고 경품 추첨 시간으로 변경되었다고 떠들어 댔다. 행정 관리원이 직접 테라리움을 방문해 준 어닝과 그녀의 강연을 듣기 위해 모인 우수한 인재들을 위해 감사함을 전하기 위한 자리로 변경했다고.

“뭐, 어차피 스폰서 타임에 갈 수 있는 사람은 소수였으니까. 행정 관리원이 직접 그렇게 변경하니 우리가 뭐 어쩔 수 있나?”

처음엔 무척이나 아쉬워하던 여론이 금세 사그라들었다. 카페테리아 점원이 행정 관리원의 지시라며 모두에게 무료 음료와 디저트, 그리고 여관 일일 숙박권을 나눠 주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더러운 수를 쓰다니! 우리 몫으로 받은 것들을 전부 쓰레기통에 버리고 분개하자 이리스가 공감하며 발을 굴렀다.

“어닝을 꼭 만나야 한다고 하셨잖아요. 그 얼굴만 반반하고 속은 음침하기 그지없는 남자가 제이 님의 계획을 알아차리고 막는 걸까요?”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놈이에요. 시들링이 아주 치밀한 놈이라고 했으니까요. 그런데 스폰서 타임이 아니면 어떻게 어닝을 만나지?”

어닝의 강연 티켓을 따내기 위해 고생도 했는데 전부 물거품이 되다니! 윈터와 인동덩굴 드라이어드 사이에서 내 양심이 얼마나 갈려 나갔는지 알아?

카페테리아는 목적을 잃은 사람들이 모두 떠나고 무척이나 한산해졌다. 우린 방법이 없을까, 터질 듯한 머리를 굴리며 초조하게 루프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였다. 누군가 우리에게 다가왔다.

오렌지색에 듬성듬성 남색이 섞인 긴 머리칼. 새의 날개를 닮은 듯한, 손을 덮을 정도로 소매가 긴 오렌지색 로브, 새들이 앉는 횃대를 닮은 스태프를 든 여성이었다.

결정적으로 귓가에 꽂힌 난초 같은 꽃을 보고 그녀가 드라이어드임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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