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7화 (127/604)

인동덩굴은 자신의 이야기를 끝내고 윈터의 안위를 걱정했다. 그가 곧 죽는다는 것이 무슨 뜻이냐며.

“당신과 이야기하고 싶어서 연구를 하다… 그… 좀… 심각한 병을… 아씨, 시들링이 멀쩡한 놈이라면 그냥 저놈이 커뮤니케이션하게 했을 텐데!”

사이에 낀 나만 양심에 칼질을 당하고 있잖아!

“그가 죽는 이유가 저 때문이라고요…? 단지 저와 이야기하고 싶어서?”

인동덩굴은 아주 큰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드루이드님… 이제 알려 주세요. 저 드라이어드는 제 치즈가 다시 태어난 게 맞나요? 아니라면… 아니라면 그것도 괜찮습니다. 저는 죽기 전에 사실을 알고 싶을 뿐입니다.”

“그게 말이죠….”

윈터가 재촉하자 그냥 이 자리에서 도망가고 싶었다. 서로 영혼이 연결된 상태도 아니면서 서로에게 왜 이렇게 애틋한데! 에라 모르겠다. 윈터를 보고 고개를 저었다. 곧 죽는다는 사람의 소원이 먼저지.

“그런 건가요…. 하지만 우리 치즈 털색과 똑같은 꽃이었는데….”

고개를 푹 숙인 윈터를 더는 볼 수가 없어서 엘더의 뒤로 숨었다.

“하지만… 그렇다면 그것대로 다행입니다. 만약 드라이어드가 다시 태어난 치즈라면… 제가 우리 치즈를 두고 먼저 가게 되는 것이니까요. 그런 일은 있어선 안 되죠. 제가 죽는다면 그곳에… 치즈가 기다리고 있겠군요. 정말 다행입니다.”

그가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어닝의 강연 티켓을 꺼냈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부탁드려도 될까요? 드라이어드에게 정말 고마웠다고… 전해 주십시오. 거리가 멀어서 드루이드가 아닌 제 말이 잘 닿지 않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드라이어드들은 보통 사람들의 말을 알아듣기 위해선 행동, 표정 등… 모든 것을 읽어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이 검은 나뭇가지가 절 가리고 있으니… 부탁드립니다.”

“어… 네, 그 정도야, 뭐.”

“드라이어드가 다시 태어난 치즈가 아니더라도… 정말 우리 치즈 같았습니다. 착하고 다정했어요. 이렇게 검은 나뭇가지가 생기기 전까진… 매일 찾아가도 먼저 치즈의 무덤에서 절 기다려 줬습니다. 곁에 앉아 제 이야기를 들어 줄 때면… 정말 치즈가 제 옆에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 모든 행동이… 제가 지금까지 죽지 않고… 버틸 수 있게 해 준 원동력입니다…. 정말 고마웠다고… 전해 주십시오.”

아이고, 정이 단단히 들어 버렸겠네. 울먹이며 말하는 윈터 때문에 나도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당신에게 정말 고마웠다고 전해 달래요.”

“설마… 그에게 사실을 말한 것입니까? 왜 그러셨어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가 버티지 못할 건데. 당장 죽으려고 할지도 모릅니다. 이미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줄을 매달았던 사람입니다. 절 무엇이라고 믿든 그것이 그의 행복이라면…!

“당신 덕분에 죽지 않고 버틸 수 있었대요. 그래서 정말 고맙대요. 당신이 걱정하는 것만큼 당장 죽으려고 들진 않아요. 오히려… 후련해 보이네요.”

내 말이 끝나자 윈터는 티켓을 건넸다. 그는 힘겹게 웃고 있었다.

“이제 다신 이곳에… 오지 않을 겁니다. 치즈가 아니니까… 더는 제 오해로 귀찮게 굴지 않을 겁니다. 돌아가서 주변을 정리하고 조용히 때를 기다릴 겁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드루이드님.”

그러곤 그가 먼저 등을 돌려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곧 내게도 얼른 내려오라며 손짓을 했다.

“안 돼…. 안 돼…. 사실을 알아 버리면….”

검은 나뭇가지 너머로 드라이어드가 왠지 모르게 무척 초조하게 중얼거렸다.

어쨌든 어닝의 강연 티켓을 얻었으니 볼일은 끝났기에 윈터를 따라 걸었다.

“내 주인, 제이. 저 드라이어드는 아주 오래 전에 영혼의 연결이 끊긴 것처럼 느껴진답니다. 힘을 많이 잃었어요. 이미 드루이드가 남겨 준 영혼의 조각이 모두 닳아 사라지고도 한참이 지났을 거예요.”

메스키트가 나와 맞춰 걸으며 안타까운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영혼의 연결이 끊겨 야생의 상태가 된 드라이어드는 무척이나 고통스럽다고 했는데. 주인 되는 드루이드가 정말 드라이어드를 데리러 올까? 마치 유기한 것 같잖아….

하지만 드라이어드의 말투는 드루이드가 돌아올 거라 진심으로 믿고 있는 것 같았다.

얼마나 외로웠을까? 사실을 알게 된 윈터는 다신 이곳에 찾아오지 않겠다고 했지. 드라이어드가 윈터에게 비밀로 해달란 건 윈터를 위해서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서였을 수도 있지 않을까 싶었다.

검은 나뭇가지가 치워진다면 인동덩굴 드라이어드를 다시 한번 만나러 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가 원할지는 모르겠지만 나라도 드라이어드를 거두기 위해.

동산을 내려오자 벨라돈나는 다시 시들링의 아티팩트로 돌아갔다.

여관으로 바로 향하기 전, 16번째 테라리움의 과수원으로 향했다. 확인해야 할 것이 있었다.

과수원엔 당연하다는 듯이 파필리온이 미리 마중 나와 있었다. 검은 정장을 빼입은 것이 무척이나 잘 어울려서 어째 더 잘생겨 보였다.

“나의 아름다운 블랙 릴리! 날 보러 오신 건가, 그대? 나 역시도 간밤에 그대의 얼굴이 달처럼 떠올라 무척이나 보고 싶었지. 아, 하지만 먼 하늘의 달처럼 닿지 않는 그대.”

잘생겼단 말 취소다. 라운지에서 본성을 보여 줬던 것과 달리, 파필리온은 다시 미친놈으로 바뀌어 있었다. 시들링은 파필리온으로부터 날 보호하라는 지시를 기억해 내 앞으로 성큼 나가 그의 시야로부터 날 가렸다.

“응? 그대는 웬일인가? 수업 시간은 아직인데. 그대 역시도 저 블랙 릴리를 보고 날아든 한 마리의 나비 같은 것인가?”

“수업은 필요 없다. 그녀와는 이미 깊은 관계를 맺었으니.”

“야이 미친놈아! 듣는 사람 오해하니까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시들링의 말에 파필리온의 눈가가 살짝 떨리는 것이 보였다.

“넌 됐고, 과수원에 볼일이 있어서 왔을 뿐이니 꺼져.”

“우리 과수원에 무슨 볼일이 있으실까나?”

파필리온을 무시하고 과수원 안내원을 불렀다.

“드라이어드 열매 따는 방으로 안내해 주세요.”

“드루이드님, 죄송합니다만 이번 시즌의 열매는 모두 수확되었습니다.”

“그냥 보기만 할게요.”

“열매가 목적이 아니라면 뭐가 당신의 궁금증을 자아내는 것일까? 호기심이 가득한 그대도 사랑스러워.”

안내원이 파필리온의 눈치를 보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지나친 호기심은 독이 되지. 그대는 달콤한 꿀을 품은 꽃, 독과는 어울리지 않아. 그렇지?”

파필리온이 몸을 기울여 시들링 뒤의 날 보며 음습하게 웃었다.

“뭐 켕기는 거라도 있어? 없다면 그냥 열매가 따는 방을 보여 줘. 보기만 하고 갈 테니까. 그냥 다른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원으로서 궁금한 것뿐이야.”

“아, 그런 이유라면. 우리 자랑스러운 과수원을 맘껏 구경시켜드리지.”

하지만 나를 보는 그의 눈빛은 내 말이 그저 핑계일 뿐이란 걸 알고 있는 듯했다. 내가 동산에 있던 걸 월렛으로 봤겠지. 안내원은 파필리온이 승낙하자 나를 과수원 안으로 안내했다. 안내원을 따라 걷는 내 뒤로 시들링과 파필리온도 따라왔다.

“그런데 어떻게 된 건가? 나의 블랙 릴리와 아주 ‘깊은’ 관계를 맺었다니?”

“그녀와 난 하나가 됐다.”

“야! 같은 길드가 됐다는 말을 그런 식으로 말하는 놈이 어딨어?”

입만 열면 이상한 놈이 둘이나 내 뒤에 있어.

“길드… 라고?”

파필리온이 중얼거렸다. 시들링과 같은 길드가 된 걸 그가 바로 알게 하고 싶진 않긴 했는데.

안내원을 따라 긴 의자들이 가지런히 놓인 대기실을 지났다. 대기실은 조금 넓은 것 빼고 26번째 테라리움과 별반 다를 것이 없어 보였다.

도착한 곳의 굳게 닫혀 있던 거대한 문이 열리고 드디어 열매 따는 방에 들어가게 되었다.

은은한 조명과 상쾌한 공기. 그리고 예상했던 것과 달리… 새하얀 빛을 내는 거대한 세계수의 가지가 온전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이게 왜 여기 있어? 그럼 동산에 있는 검은 세계수의 가지는 대체 뭐야?

세계수의 가지를 다시 만난 바곳이 입을 헤벌레 벌리고 가지를 바라보았다.

“자, 여기가 16번째 테라리움의 세계수의 가지가 있는 곳이야, 나의 블랙 릴리. 어때? 잘 관리되고 있지? 다이아를 잔뜩 주고 귀여워하는 만큼 매달 열매를 풍성하게 맺어 주고 있지. 6번째 테라리움에서 공인한 인증서도 매달 최고점을 갱신시키고 있어. 아름다운 그대의 테라리움도 8번째 테라리움에 인정받으려면 아주 잘 관리해야 할 거야.”

“그래… 잘 관리되고 있네.”

때깔이 아주 곱다 고와. 아프다고 비명을 지르며 도와 달라고 할 땐 언제고 엄청 멀쩡해 보이잖아?

하얗게 빛나는 세계수의 가지에 손을 대 보았다. 모조품이 아닌 진짜가 분명했다. 메스키트를 바라보았다. 팀의 메인으로 나와 영혼의 연결이 더 굳게 맺어진 그녀라면 내가 뭘 궁금해하는지 알겠지?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세계수의 가지가 확실했다.

“봤으니 됐어. 갈게.”

“차라도 한잔 마시는 게 어때?”

“너랑 마시면 아무리 차라도 체할 것 같으니 됐어.”

“할 이야기는 없고?”

그가 ‘있을 텐데?’ 하는 웃음으로 날 바라보았다. 미쳤다고 내가 너에게 말하겠니. 시들링을 끌고 방을 나왔다.

“뭐, 어차피 곧 다시 보게 될 테니까.”

곧 다시 볼 거라고? 그런 끔찍한 소리를 하다니. 매몰차게 나가는 날 파필리온은 의외로 따라오지 않았다. 그저 세계수의 가지 아래에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그가 이 이상 귀찮게 굴지 않는다면 나야 환영이었다.

바로 여관으로 향했다.

방에 도착하자마자 이리스가 무척이나 반겼다. 내가 안전히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며 어디 다친 데는 없는지 내 몸 이곳저곳을 살폈다. 그녀에겐 내가 동산에서 쓰러졌단 이야기는 비밀로 해야겠다.

어닝의 강연 티켓을 얻어 왔다고 하니 루프가 무척이나 기뻐했다. 내가 준 티켓을 두 손으로 받고 한참이나 들여다보았다. 연구원 일을 그만두겠다고 했지만… 아직 그녀는 자신의 전공을 꽤 좋아하고 마음에 담아두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때 시들링이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려 하길래 붙잡았다. 동산에서 내가 겪었던 꿈속의 일은 그도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그도 내 길드원으로서 한 배를 탄 것이나 다름없으니까.

시들링을 붙잡자 오히려 그의 드라이어드들이 무척이나 기뻐했다.

넓은 리빙룸에 길드원들과 빙 둘러앉아 차분히 이야기를 꺼냈다.

“지금부터 내가 하려는 말을 믿을 진 모르겠지만… 믿기 힘겹더라도 꼭 믿어 줬으면 해.”

“제이 님의 말은 전부 믿을게요.”

“당연하죠! 저희 길드 마스터님이신데.”

이리스가 길드원으로서 보이는 충성심이 너무 고마웠다. 제퍼는 좀 과한 것 같지만. 이 못난 쪼렙을 믿고 따라 줘서 너무 감사합니다.

“내가 윈터를 따라 동산에 가서 보고 온 것은….”

그들뿐만 아니라 내 드라이어드들의 눈치도 보았다.

“세계수의 가지였어.”

리빙룸 안에 엄청난 정적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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