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6화 (126/604)

“제이… 제이…. 눈 좀 떠 봐요.”

“드루이드님….”

날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곧이어 물속에서 확 건져진 것처럼 꿈에서 깨어났다. 나는 어느새 메스키트의 품에 안겨 누워 있었다. 울 것 같은 얼굴로 날 보고 있는 내 드라이어드들이 제일 먼저 눈에 보였다. 바곳은 이미 울고 있긴 했다.

“갑자기 쓰러지셔서…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는 줄 알고….”

데이지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내 손을 꼭 붙잡았다. 날 기절까지 몰아넣었던 비명 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몸에 힘이 하나도 없어서 일어날 수 없었다.

애써 꿈틀거리는 내게 메스키트는 좀 더 누워 있으라며 이마를 짚어 주었다. 정신을 잃기 전 이마에 닿았던 차가운 금속은 메스키트의 건틀렛이었구나.

“무슨 짓을 한 거지? 사주를 받았나?”

“전 모르는 일입니다! 정말입니다!”

화가 가득 찬 시들링의 목소리와 겁에 잔뜩 질린 윈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우… 걱정시켜서 미안해. 쓰러진 기억은 안 나는데.”

일단 내 드라이어드들을 안심시키려 입을 열었다. 그러자 둘의 목소리도 뚝 끊겼다. 투박한 발소리가 나더니 내 위로 그림자가 하나 더 생겼다. 시들링이었다.

“공격을 받았나?”

“아니, 그건 아니고. 어디 아픈 데는 없어.”

“여관으로 돌아가라. 이곳에 더 있는 것은 네게 위험하다.”

안 그래도 그러려고 했다. 저 검은 나뭇가지가 세계수의 가지란 걸 알게 된 이상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정말 세계수의 가지라면 무턱대고 파괴하는 것은 좋지 않았다.

“저… 그럼 제 부탁은….”

멀리서 윈터가 애절한 목소리로 물었다. 일어나려고 낑낑대자 메스키트와 엘더가 함께 안다시피 날 부축해 끌어 올려 주었다.

“저거 부수면 안 돼.”

“하지만 그러면 저 너머에 있는 드라이어드를 만날 수가….”

“그리고 난 어닝의 강연 티켓을 못 얻겠지. 그래도 부수면 안 돼.”

메스키트의 팔을 지지대 삼아 버티며 힘겹게 말했다.

“우리가 못 가니 그 드라이어드한테 이쪽으로 오라고 하자. 틈이 있으니 대화 정돈할 수 있겠지.”

내 제안에 윈터가 입을 다물었다.

“내 주인, 제이. 정말 괜찮나요?”

“이상해…. 드루이드인 네가 쓰러졌는데 우린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았어. 오히려 너에게서 세계수의 힘이 느껴졌는데. 어떻게 된 거야?”

메스키트와 엘더는 주변에 아무도 없고 오직 나만 이곳에 있는 것처럼 굴었다. 그래, 내게 이상이 생기면 드라이어드들도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했지. 우린 서로 영혼이 연결된 상태니까. 세계수의 힘이 느껴졌다면 내가 꾼 건은 역시 단순한 꿈이 아니겠지?

“그… 다 설명해 줄게. 단, 저 사람이 없는 곳에서.”

윈터를 턱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저 사람은 외부인이나 다름없었다.

“일단 나 정말 저 사람이 가지고 있는 티켓이 필요해. 그러니 지금은 저 사람이 만나려고 하는 드라이어드를 불러올 방법을 생각해 보자.”

16번째 테라리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다. 비밀을 알아내려면 내가 알고 있는 유일한 단서인 어닝을 만나야만 했다.

내 말에 메스키트는 말없이 날 가만히 바라보았다. 노랗게 타오르는 태양과도 같은 눈에 어쩐지 주눅이 들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내가 괜한 짓을 하는 걸까?

“좋아요, 그렇게 해요. 당신만 무사하다면 괜찮아요.”

이내 그녀는 덤덤한 목소리로 말하며 내 머리에 손을 올렸다. 언제 주눅 들었나 싶을 정도로 그 말에 금세 용기가 생겼다.

“드라이어드를 찾고 있다고 했나요? 어렵진 않을 거랍니다. 근처에 드라이어드의 기운이 하나 느껴지거든요.”

“오! 가까이 있다면 다행이네! 저기요! 댁이 찾고 있는 드라이어드 종이 뭐예요?”

내 질문에 윈터는 머뭇거리며 쉽사리 답을 하지 못했다.

“아니, 본인이 찾고 있는 드라이어드가 무슨 종인 줄도 몰라요? 왜 찾는 건데요, 대체?”

“그게…. 저는 벌레에 대핸 잘 알아도… 꽃은…. 그… 하얀 꽃과 노란 꽃이 동시에 피어 있고… 나비처럼 생긴 꽃인데….”

그는 손등을 주무르며 자신 없는 목소리로 더듬더듬 말했다.

“무슨 하얗고 노란 꽃이 동시에 피어 있어요? 꽃잎 색이 여러 개인 것이 아니라?”

“아닙니다…. 정말로 하얀 꽃과 노란 꽃이 함께 피어 있습니다. 보고 있기만 해도 귀엽고 예쁜 꽃이에요….”

드라이어드의 꽃을 상상하는 그는 무척이나 즐겁지만 한편으론 또 아련한 표정이 되었다.

“하얀 꽃과 노란 꽃이라….”

메스키트가 중얼거리더니 생각에 잠겼다. 곧이어 그녀는 엘더를 불렀다. 단지 이름만 불렀을 뿐인데 엘더는 갑자기 한 팔로 내 어깨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메스키트가 들고 있던 랜스를 땅에 꽂자 데이지가 손목에서 줄기를 뿜어 바곳을 꽁꽁 묶었다. 메스키트가 뭘 하려는지 대강 눈치챘다.

“뭐 하는 거예요?”

칼미아가 메스키트를 보며 물었다. 저쪽은 그렇다 쳐도 윈터는 일반인인데?

“윈터, 엎드리거나 주위에 있는 뭔가를 붙잡아요!”

내 외침에 그가 반사적으로 넙죽 엎드리자마자 땅이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메스키트가 드라이어드를 찾는 기술을 쓰기 위해 뿌리를 내리자 동반되는 강한 지진이었다.

시들링은 물론 그의 드라이어드들은 깜짝 놀라 휘청거리긴 해도 잘 서서 버텼다. 다만 블루 멜로우가 들고 있던 수정구를 놓칠 뻔하며 저글링을 하듯 튕기다 칼미아의 날개를 움켜잡는 것이 보였다.

“내 날개는 손잡이 같은 게 아냐! 왕의 위엄이라고!”

“메스키트의 지진을… 나 같은 화초가 어떻게 버티라고?”

그가 원망하는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저긴 양반이었다. 일반인인 윈터는 비명을 지르며 땅을 움켜쥐고 있었다.

지진은 곧 멎었다. 그리고 랜스를 거둔 메스키트가 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인동덩굴이에요, 제이.”

“응? 인동덩굴?”

“네, 흰 꽃과 노란 꽃이 함께 있다고 해서 금은화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답니다. 저 역시도 그걸 생각하고 찾았는데 다행히 맞았군요.”

“와… 정말 그런 꽃이 있구나. 금은화라니. 보고 싶다!”

그리고 그녀는 랜스를 들어 검은 나뭇가지를 가리켰다.

“그 드라이어드가 지진 때문인지 이쪽으로 오고 있는 것이 느껴져요.”

메스키트가 가리키는 곳을 보니 나뭇가지 틈으로 희끄무레한 것이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역시 아까 내가 잘못 본 게 아녔어.

그런데 좀 전에도 여기 있었으면서 왜 티를 안 냈던 거지? 왜 멀리 가 버린 거야? 혹시 도망간 건가? 드라이어드가 드루이드들을 보고 도망갈 일이 뭐가 있어?

“무슨 일이죠? 이 비명 소린 하얀 인간이 지른 것이 맞죠? 그는 괜찮나요?”

검은 나뭇가지 너머로 앳된 청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신 인동덩굴 드라이어드 맞지?”

“제발 그가 안전한 건지 알려 줘요!”

드라이어드는 내 말을 무시하고 제 할 말만 했다. 하얀 인간이 누군데? 설마 윈터?

윈터는 지진이 멎자 간신히 일어서더니 후들거리는 다리로 옷에 묻은 흙을 털고 있었다. 음, 저 사람이라면 피부가 창백해서 하얀 인간이라고 불릴 만하지.

“윈터, 당신이 찾는 드라이어드가 저기 있는데요.”

인동덩굴이 있는 곳을 가리키며 말하자 윈터가 고개를 퍼뜩 들더니 내가 가리킨 곳을 향해 달려갔다. 하지만 검은 나뭇가지가 빼곡히 막고 있어서 드라이어드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정말 그 드라이어드가 와 준 건가요? 치즈! 네가 맞니? 치즈!”

“치즈? 웬 치즈?”

윈터가 소리치며 부르자 인동덩굴은 입을 다물었다. 희끄무레한 것이 멀어지는 것이 보였다. 마치 그가 안전하단 걸 확인했으니 볼일은 끝났다면서.

“제발 치즈! 어쩌면 내가 이곳에… 다시 못 올 수도 있어. 난 이제 얼마 살지 못해. 죽는 건 당장 내일이 될 수도 있어…. 그러니… 여기 드루이드분들도 계시니 하나만 알려 줘. 너는 내 치즈가 다시 태어난 게 맞지?”

“거기 인동덩굴 드라이어드! 당신네 하얀 인간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데. 이렇게 애타게 부르는데 답 좀 해 주지?”

“네? 하얀 인간이 죽는다고요? 그가 왜 죽어요? 아픈가요?”

멀어지던 드라이어드가 다시 빠르게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치즈! 드루이드님, 드라이어드가 뭐라고 말하진 않나요? 치즈가 맞다고 하나요?”

윈터는 마치 저 드라이어드의 목소리 자체도 들리지 않는 것처럼 굴었다.

“치즈가 뭔데? 먹는 치즈?”

“치즈는… 제가 키우던… 사랑하는 고양이의 이름입니다…. 제 고양이를 묻은 무덤에 어느 날 고양이의 털색을 닮은 하얗고 노란 꽃들이 폈어요. 그리고 저 드라이어드가 나타났죠. 전 그래서 치즈의 영혼이 다시 태어났다고 믿었습니다…. 고양이가 떠나고… 전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죽을까 생각도 했었습니다. 하지만….”

무덤에서 핀 나무나 꽃을 그 죽은 사람의 영혼이라고 믿는 옛날이야기는 많았다. 하지만 결국 전설이나 허구일 뿐, 그걸 진짜로 믿다니. 키우던 고양이를 정말 아끼고 사랑해서 다시 태어났다고 믿고 싶은 거였구나….

하지만 모든 드라이어드는 세계수의 축복의 힘으로 태어나는데 그가 아무리 믿고 있다 해도….

“어리석군. 드라이어드는 꽃이 모체인 생명일 뿐이지, 죽은 고양이의 환생 같은 것이 아니다.”

시들링이 단호하게 윈터를 향해 말했다. 그걸 상식적으로 누가 모르겠니? 저 사람은 그냥 믿고 싶을 뿐이잖아.

그나저나 이걸 저 드라이어드에게 어떻게 물어봐야 해? 너 고양이 맞니?

“당신, 죽은 고양이의 무덤에서 피어난 꽃이 맞나요?”

인동덩굴은 다시 입을 꾹 다물었다. 허구를 믿는 윈터라 하더라도 그를 대하는 인동덩굴 드라이어드의 태도도 뭔가 애틋함이 있었다.

윈터는 애타는 눈으로 날 바라보고 인동덩굴은 답이 없었다. 이 검은 나뭇가지만 아니었어도 붙잡아 놓고 물어보겠는데. 답답했다. 그냥 맞다, 아니다라고 말만 해 주면 되는 걸 인동덩굴은 왜 말을 하지 않는 거야.

만약 맞다면 인동덩굴 드라이어드가 고양이의 환생은 아니더라도 윈터가 그냥 고양이라 믿으며 애정을 쏟게 해도 문제없지 않을까 싶었다. 어차피 둘은 말이 안 통하니까.

“전… 자연 발생 드라이어드가 아닙니다….”

하지만 인동덩굴은 뜻밖의 말을 했다. 자연 발생 드라이어드가 아니라고? 그럼 열매에서 태어났단 거 아냐? 열매에서 태어난 드라이어드가 왜 이런 동산을 헤매고 있지?

“이 사실을…! 부디 그에게 말하지 말아 주세요.”

그리고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윈터는 인동덩굴이 무덤에서 핀 꽃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데 이게 무슨 상황이람?

“전 주인이… 있었던 드라이어드입니다.”

“뭐? 그럼 영혼의 연결이… 헙!”

인동덩굴이 비밀로 해달란 부탁이 떠올라 급하게 입을 막았다. 하지만 시들링이 눈치 없이 입을 열려는 것이 보였다.

“야! 입 다물어! 넌 인정머리도 없냐?”

“왜 그러지? 그는 잘못된 사실을 알아야 한다.”

“어떻게 말할지는 내가 결정해.”

“드라이어드는 고양이가….”

“입 다물어. 명령이야.”

다행히 시들링이 입을 다물었다. 다만 우리의 대화를 들은 윈터가 초조한 얼굴로 내게 재촉하기 시작했다. 난 아직 드라이어드가 말을 다 끝내지 않았다며 애써 그를 달랬다.

“전 버려진 게… 아닙니다…. 그저 여기서 기다리면 꼭 다시 데리러 오겠다고 하셨습니다.”

윈터가 강하게 믿는 것처럼 인동덩굴도 염원하듯 강하게 믿는 것이 있었다. 먹먹한 목소리로 애써 말하는 드라이어드가 불쌍하게 느껴졌다. 정말 드라이어드를 두고 간 드루이드가 다시 돌아올까? 어쩐지 데이지의 과거가 떠올라 데이지를 말없이 꼭 끌어안았다.

“영혼의 연결을 강제로 끊지 않고 제가 버틸 수 있도록 영혼의 조각을 떼어 내 주셨기에 지내는 것은 무리 없습니다. 그러니… 하얀 인간에게 사실을 알리지 말아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왜?”

“그가 절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습니다. 그저 내버려 두세요…. 하얀 인간을 처음 봤을 때, 그는 무척이나 위태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제 꽃은 만병을 낫게 하는 약초이나 마음의 아픔까진 낫게 하지 못합니다. 그를 위로하는 마음을 전달하고 싶어 그가 매일 찾는 무덤에 꽃을 피워 두었을 뿐입니다.”

이 사실을 윈터에게 어떻게 전하지? 차라리 어쩌다 무덤에서 피어난 꽃이면 낫지, 아예 관련도 없는 꽃인데. 머리가 아파 와 이마를 짚자 엘더가 다급하게 어디 아프냐며 빛을 내는 손을 내 머리에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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