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시간이 다 되어 가도록 루프가 돌아오지 않았다. 나와 함께 있는 이리스와 노토스에겐 룸서비스를 시켜 식사를 푸짐하게 대접했지만 다른 이들은 아침밥이나 잘 챙겨 먹고 있을지 너무 걱정되었다.
아주 수상한 16번째 테라리움이니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이 아닐까 걱정하는 내게, 이리스는 자신의 재킷 안쪽에 콕 박혀 있는 도깨비바늘의 열매를 보여 주었다.
꿀벌을 보낼 수 없는 상황이라고 했더니 그녀는 아주 현명하게 그들만의 오랜 전통적인 연락 방법을 사용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 생겼다면 드라이어드의 힘으로 이 열매를 회수했을 거예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이리스와 노토스에게 여관 내 방을 따로 잡아 주겠다고 했지만 그들은 내 안전을 핑계로 거절했다.
둘은 넓은 방의 넓적한 소파에 누워 돌아가며 쪽잠을 잤다. 침대를 양보했지만 그것마저도 거절당했다. 여관비를 아끼려 밖에서 잔 적도 많으니 푹신한 곳에서 잘 수 있기만 해도 좋다며.
여관 점원이 점심 식사도 방 안에서 해결할 거냐고 물어 올 때쯤 루프와 제퍼, 헤르마가 돌아왔다. 처음 보는 남자도 함께였다.
제퍼는 하품을 쩍쩍하며 소파에 누워 있던 이리스를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했다. 헤르마가 간신히 파들거리는 눈가를 누르며 내게 의문의 남성과 함께 오게 된 경위를 설명했다.
“루프 님의 예상대로 이미 줄을 서고 있던 사람이 많아서 말인디…. 표를 구하는 것은 실패했는디….”
헤르마의 말에 이리스가 누워 있는 제퍼의 옆구리를 발로 잘근잘근 밟으며 타박했다.
“야, 넌 의뢰도 완수 못 해 놓고 잠이 와?”
“연대 책임이다. 우리 다 같이 길드 마스터님의 의뢰를 완수 못 한 거야. 완수 못 한 너도 누워 있었는데 나도 좀 눕자. 먼저 온 사람들이 좋은 자리 다 차지해서 우린 딱딱한 길바닥에 앉아 있었단 말이야.”
헤르마가 둘을 한심하게 보곤 마저 이야기했다.
“표를 산 사람들에게 사정사정했는디…. 다 거절하고 딱 이분만 표를 팔아 주겠다고 해서 말인디….”
루프가 작은 목소리로 “다들 어닝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 해서… 죄송해요, 어르신.” 하고 말했다.
그들의 잘못은 아니었다. 어닝의 강연이 이 정도의 인기일 줄은 전혀 예상 못 한 내 잘못이었다.
일단 쉴 수 있도록 그들을 소파로 안내하고 점원을 불러 먹을 것을 내오도록 했다. 금방 따뜻한 음식들이 리빙룸의 낮은 탁자에 줄줄이 서빙되었다.
그런데 표를 팔겠다는 사람을 굳이 내가 있는 여관까지 데려온 이유가 뭘까? 엄청 많은 금액을 요구한 건가?
“안녕하세요, 표를 팔아 주시겠다고요? 얼마에 파실 건가요? 원하시는 금액만큼 다 드릴게요.”
왜소한 체격의 청년이었다. 키는 루프만 하고 정리 안 된 갈색 머리가 눈을 가릴 정도로 내려와 있었다.
해를 못 보고 생활한 것처럼 창백한 얼굴에 체격에 맞지 않는 큰 옷으로 잔뜩 싸매고 있어서 독감 환자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런데 저렇게 입으면 안 답답하나? 장갑까지 끼고 있었다.
“제가 원하는 건… 다이아가… 아닙니다.”
남자의 말투는 무척이나 힘이 없었다. 밖에서 달리기라도 하고 온 것처럼 굉장히 숨이 가빠 보이기도 했다.
“저래서 데려오게 된 건디…. 다이아야 제이 님이 활동 지원비로 많이 줘서 그걸 당겨쓰면 돼서 문제가 없는디…. 다이아는 안 받겠다고 해서 말인디….”
헤르마가 설탕 가루가 잔뜩 뿌려진 빵을 한입 크기로 찢으며 말했다. 다이아는 필요 없다고? 내가 제일 잘하는 게 다이안데…. 어떻게 다이아를 원하지 않는 사람이 있지? 다이아를 원하지 않는 사람은 처음이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거 커피에 찍어 먹으면 맛있어.”
이리스는 제퍼를 대할 때와 달리 헤르마에겐 밖에서 고생시킨 것이 미안했는지 꽤나 살뜰하게 챙겨 주었다. “빈속에 커피는 나 뒤지라는 건디….” 하며 헤르마가 앓는 소리를 할 때쯤 의문의 남자가 제 소개를 했다.
“저는… 윈터라고 합니다. 16번째 테라리움의 연금탑 소속… 2급 연구원입니다. 제 부탁을 들어주신다면… 후, 이 강연 티켓을 드리겠습니다.”
그는 빛을 받아 파란색에서 보라색으로 반짝이는 반들거리는 종이를 꺼내 보이며 말했다. 저것이 어닝의 강연에 참석할 수 있는 티켓이었다.
“그 부탁이란 게 뭔데요?”
그는 내 말에 조금 주저하더니 루프를 슬쩍 바라보았다.
“듣기론… 아주 대단한 드루이드분이 계신다고….”
루프가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네, 다이아를 준다 해도 안 팔려고 하길래 어르신의 권력으로 눌러 보려고 28번째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원이라고 밝혔어요.”
그러곤 그녀는 아주 당당히 말했다. 뭐, 내가 행정 관리원이란 사실이 비밀은 아니니 상관은 없지만…. 그나저나 이건 꼭 보상으로 강연 티켓을 얻을 수 있는 서브 퀘스트 같은 느낌이네.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원이라면… 아주 대단한 드루이드 맞죠? 저는 꼭 만나야 하는… 드라이어드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드라이어드에게 꼭 듣고 싶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보시다시피… 전 드루이드가 아니기 때문에 드라이어드와 소통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도움이 필요합니다.”
“드라이어드랑 이야기하는 것쯤은 어느 드루이드라도 할 수 있는 거 아닌가…?”
뭘 요구할지 몰라 잔뜩 긴장한 것 치곤 뭔가 시시한 퀘스트가 튀어나왔다. 그가 말을 하는 것이 너무 힘들어 보여 마실 것을 권했다. 하지만 그는 거절했다.
“그게… 그 드라이어드를 만나러 가는 길에 언제부턴가 정체를 알 수 없는 나뭇가지가 빼곡히 막고 있어서 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많은 드루이드분께 부탁드렸지만… 다들 실패하셨습니다. 그 어떤 공격으로도 길을 뚫을 수 없었습니다. 그분들 말론 정체불명의 나뭇가지에 세계수의 힘이 느껴지기 때문에… 드라이어드의 모체가 분명한데 도통 종을 알 수 없다고 하셔서….”
“종을 알 수 없는 드라이어드의 모체?”
“네, 그리고 제겐… 시간이 없습니다. 빨리 그 드라이어드를 만나서 듣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데….”
“그 장소가 여기서 먼가요?”
“아뇨, 테라리움 안입니다. 연금탑의 뒤쪽에 자리한 동산에 있습니다. 그곳에 가려면… 허가가 필요하지만 제가 연금탑 소속 연구원이기 때문에 동행을 한 명 데리고 갈 수 있습니다….”
윈터가 초조하게 입술을 물어뜯었다. 시간이 없는 것은 이쪽도 마찬가지였다. 당장 어닝의 강연이 오늘 늦은 오후였다. 강연이 끝나면 어닝은 다음 강연을 위해 바로 이 테라리움을 떠나 버린다. 제때에 맞춰 윈터의 의뢰를 끝내고 티켓을 받아야만 했다.
그나저나 한 명만 갈 수 있다고?
“제가 갈게요, 제이 님.”
이리스가 자진해서 자기가 다녀오겠다고 말했다.
“아뇨, 전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원이신… 드루이드님의 도움을 받고 싶습니다. 그 어떤 강한 드루이드라도 결국 길을 뚫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전… 특별한 드루이드에 기대를 걸고 싶습니다. 무려 세계수의 가지 하나를 담당하는 드루이드 아닙니까?”
“저여?”
Me? 날 가리키며 묻자 그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필 나?
“그, 여기도 행정 관리원 있잖아요? 왜 그 인간한텐 안 부탁하고?”
“16번째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원님께선… 굉장히 바쁜 분이라 아무나 뵐 수 있는 분이 아니십니다. 저도 열심히 만남을 요청드렸지만 매번 거절을 당해서….”
난 윈터가 말하는 행정 관리원이 어제 여관 라운지에서 죽치고 앉아 날 괴롭히던 파필리온과 동일 인물이 맞나 의심이 들었다. 그 새끼 하나도 안 바빠 보이던데.
“제이 님을 혼자 보낼 순 없어요.”
이리스가 강경하게 대응했다. 하지만 윈터도 만만치 않았다. 오직 행정 관리원인 내가 티켓을 필요로 한다는 말에 이곳에 왔을 뿐이라며 내가 아니라면 차라리 자신이 강연을 듣겠다고 했다.
“내가 행정 관리원이긴 해도 그렇게 막 대단한 사람은 아닌데….”
이 중 내가 제일 쪼렙인데여. 행정 관리원도 다이아로 됐는데여. 하지만 님이 다이아는 필요없다면서여?
“제이 님, 제퍼에게 맡겨 놓을 게 아니라 제가 직접 갔어야 했어요. 이 사람 말고 표를 팔아 줄 다른 사람을 찾아보겠습니다. 엄청난 다이아로 찍어 누르면 한 명쯤은 팔아 주겠죠!”
“무리라니까…. 다들 다이아를 마차로 싣고 와도 안 판다고 하던디….”
이리스가 냉정하게 자리를 털고 일어나자 윈터는 무릎 위의 두 손을 꼭 쥐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턱 막힌 목소리로 내뱉었다.
“표가 이유가 아니더라도 꼭 부탁드립니다. 전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죽기 전… 꼭 그 드라이어드를 만나야만 해요.”
정에 호소하면 안 되지. 한국인이 정에 얼마나 약한데. 힘겨운 목소리로 그렇게까지 말하면 제가 안 도와줄 수가 없잖아여.
이리스에게 손짓해 자리에 앉을 것을 부탁했다. 어디 들어나 보자.
“전 연구의 실패로 치명적인 병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는 턱 끝까지 싸맨 옷을 내려 목을 보여 주었다. 그곳엔 사람의 피부가 아닌 나무껍질 같은 것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의 창백한 피부색처럼 새하얀 나무껍질이었다. 징그럽기보단 뭔가 신비한 느낌이 들었다.
“온몸이 이렇게 굳어 가고 있습니다. 치료법을 알 수 없는 병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제 어리석음이 만들어 내 버린 병이니까요. 피부가 전부 이렇게 딱딱하게 굳고 나면… 몸속도 굳어 버릴 것입니다. 최근 숨을 쉬는 것이 힘들어지고 있습니다. 폐가 먼저 굳어 버린다면…. 전염되는 병은 아니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위대한 연금술사이신… 어닝 님을 만난다면 이 병에 대해 소견을 묻고자 했습니다….”
헐… 온몸이 나무껍질처럼 굳어 버리는 병이라니. 뭘 어떻게 하면 그런 병에 걸리는 거야?
그의 설명에 별안간 루프가 벌떡 일어나 그의 멱살을 붙잡았다. 그녀의 힘에 윈터가 줄이 끊긴 마리오네트처럼 속절없이 끌어당겨졌다.
“당신 그거 ‘백목마름병해충’이지? 그 위험한 걸로 대체 뭘 한 거야? 애초에 그건 오래전에 멸종한 병해충인데 어떻게 연금술사도 아닌 2급 연구원 따위가 얻게 된 거야? 안전 수칙은? 원본은 잘 보관되고 있는 것 맞아?”
윈터는 아주 힘겹게 루프의 손을 떼어 냈다. 반동으로 털썩 소파에 쓰러지듯 앉으며 초조하게 손을 주물렀다.
“역시 어닝 님의 강연에 참가할 수 있는 수준급의 연구원이시군요…. 알아볼 줄은 몰랐습니다…. 당신의 말처럼 전 ‘백목마름병해충’을 이용한 연구로 인하여 이 병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건 식물이나 하다못해 식물을 모체로 하는 드라이어드들에게나 위험한 벌레야. 무척이나 위험도가 높은 벌레지만 인간에게 해가 될 리 없어!”
루프가 말이 되는 소리를 하라며 윈터를 다그쳤다.
“그야… 제가 영향을 받은 건…. 병해충을 제 몸에 스스로 감염시키는 연구를 했기 때문입니다.”
윈터의 말에 루프가 소리를 꽥 질렀다.
지금 뭘 들은 거야? 자신을 대상으로 인체 실험을 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