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2화 (122/604)

윤곽을 어렴풋이 알아볼 수 있는 동트기 직전의 새벽, 사정없이 내 몸을 흔들어 잠을 깨운 데이지 덕에 눈을 떴다. 막 자다 깨서 어눌한 말투로 무슨 일인지 물으니 이리스의 파티가 도착했다고 알렸다.

“이… 새벽에? 아니 여긴 어떻게 찾았대?”

침대에서 구르듯 내려와 문을 열자 무척이나 초췌해 보이는 그들의 모습이 보였다. 오랫동안 연금탑에서 연구를 하며 앉아 지냈던 루프에겐 여간 강행군이 아니었는지, 그녀는 벽을 짚고 후들거리는 다리로 겨우 서 있었다.

“절… 급하게 찾으셨다고….”

루프가 내 어깨 너머로 보이는 소파에 열렬한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 앉고 싶다고 온몸으로 외치고 있었다. 이리스와 함께 그녀를 방 안으로 부축했다.

넓은 방 안에 외부인들이 몰고 온 차가운 밤공기가 가득 찼다. 어깨가 으슬으슬 떨리며 잠이 확 달아났다. 베드 테이블에 놓인 물병을 들어 루프 몫의 물을 컵에 따랐다.

루프는 긴장이 풀려서인지 막 사막을 횡단한 사람처럼 곧 죽을 듯 보였다.

“어우… 이 새벽에 고생시켜서 미안해요. 오느라 수고했어요. 다른 분들도 이렇게 빨리 의뢰를 수행해 주셔서 감사해요!”

“길드 마스터가 내린 긴급 의뢰래서 최선을 다했어요! 마침 황금 호박 상회에서 제일 빠른 마차를 수배해 도와줘서 다행이었어요. 그쪽에서 제이 님께 잘 말해 달라고 하더라고요.”

이리스는 웃으며 말했지만 목소리에 피곤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들은 각자 리빙룸의 소파에 자리를 잡고 앉으며 방 안 곳곳을 구경했다.

“제가 있는 곳은 어떻게 찾았어요? 새벽에 올 줄 모르고 미처 말해 놓질 못했는데.”

“테라리움에서 가장 크고 비싼 여관으로 찾았어요. 찍었는데 맞아서 다행이에요.”

찬장에서 컵을 더 꺼내 와 이리스의 파티를 위한 물도 따랐다. 그들은 그것이 생명수라도 되듯 벌컥벌컥 들이켰다. 고생시킨 것이 미안해서 양심이 찔려 왔다.

“오늘 이곳 테라리움에서 유명한 연금술사의 강연이 열리는데, 그 연금술사를 만나야 할 일이 있거든요. 강연 참가 조건이 까다로워서 루프가 꼭 필요했어요.”

루프에게 어닝의 강연 팸플릿을 건넸다. 그녀는 팸플릿을 보자마자 숨을 흡, 하고 들이켜며 크게 놀랐다.

“세상에! 어닝이 여기에 있어요? 말도 안 돼…. 죽은 줄 알았는데! 와, 그런데 상상했던 모습 보다 더 젊네요. 역시 드루이드는 수명이 길다더니…. 어닝이 여자인 것도 처음 알았어요. 와… 진짜 어닝이라니.”

루프는 소녀 팬처럼 팸플릿에서 눈을 뗄 줄 몰랐다. 상기된 목소리로 어닝에 대한 온갖 찬양을 하며 누구 하나 공감이라도 해 준다면 도화선에 불붙은 폭죽처럼 펑 터질 것 같이 보였다.

“어닝은 저희 벌레 연금술 전공자들에겐 신과 같은 존재예요! 그분이 세운 업적들이 얼마나 대단한데요. 벌레 연금술의 토대를 마련했을 뿐만 아니라 상업성도 증명해서 수많은 전공자들이 밥 벌어먹고 살 수 있게 해 줬어요. 벌레 연금술을 전공하는 연구원 중 어닝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절대 없을 거예요! 저도 연금탑에 막 들어왔을 때 어닝이 집필한 책으로 공부했어요.”

오호, 역시 엄청 대단한 사람이었구나. 루프의 입을 통해 들으니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왜 28번째 테라리움의 전 보좌관으로 있었는지, 더욱 괴리감이 느껴졌다.

“거의 1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행방불명된 이유도 있지만, 절대 1번째 테라리움의 연금탑 밖으로 나오질 않아서 엄청 신비로운 사람이었는데 직접 강연을 할 줄이야…. 그래서 제이 님, 제가 뭘 하면 되는 건가요?”

“거기 강연 참가 조건에 해당돼요?”

기껏 루프를 데려왔는데 말짱 꽝이 되는 건 아니겠지?

“네! 몇 년 전 일이긴 한데 3번째 테라리움의 학술지에 공동 연구자로 기재된 적 있어요. 제가 개발한 루프 패러사이트 5호의 기반이 되는 이론으로요. 논문 마감 날이 다가와서 급한 대로 세계수의 축복을 이겨 내고 그 일부를 먹이로 삼는 기생충이 생긴다면 특수한 효과를 얻을지도 모른다고 좀 소설을 써서 냈거든요. 그때 당시엔 욕만 먹고 묻혔는데 나중에 뒷받침하는 논문을 다른 정식 연금술사가 내면서 재조명 받고 함께 연구한 걸로 인정되어 학술지에 공동 연구자로 실리게 됐어요. 최근엔 이론을 바탕으로 정말 발명에 성공해 낸 사례가 생겨서 저도 무리하게 연구비 당겨써서 만들긴 했는데….”

그 뒤는 어르신께서 아시다시피…. 하며 루프가 말끝을 흐렸다. 아니, 언제까지 필라처럼 날 어르신으로 부를 거야? 민망한데….

루프의 기생충을 구매했을 때 먹이로 세계수의 일부를 주어야 한다는 설명을 들었던 것이 떠올랐다. 그때도 정말 기생충이나 그런 기생충을 만든 루프나 둘 다 괴이하다 느껴졌었는데. 기생충 먹이로 세계수의 일부를 먹일 생각을 최초로 해낸 사람이 루프였다니….

“대체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거람….”

중얼거리는 내 말에 루프가 당연하다는 듯이 답했다.

“수많은 테라리움에 수많은 연금탑이 있고 그 배는 되는 수의 연금술사들과 연구원들이 있는데, 그중에서 살아남으려면 항상 남들은 하지 않을 생각을 해야만 하니까요.”

루프가 말을 하던 중 소파 끝에 있는 넓적한 쿠션을 끌어왔다. 부드러운 벨벳 소재로 만들어진 쿠션은 그녀가 살짝 누르는 것만으로도 짙은 색의 자국이 남았다. 루프가 손바닥을 쫙 펴 쿠션의 대부분을 꾹꾹 누르자 분홍색의 쿠션이 물에 젖은 것처럼 얼룩덜룩한 자주색이 되었다.

루프는 그중 손자국이 찍히지 않은 엄지손톱만 한 분홍색의 부분을 가리키며 말했다.

“늦게 태어날수록 먼저 태어난 연구원들이 숭덩숭덩 파헤쳐 놓은 지식의 땅에서 손바닥만큼의 작은 영역이라도 온전한 곳을 발견해서 파야만 하고, 그마저도 판 곳에서 모두 보물이 나오진 않아요.”

그녀는 쿠션을 세워 들었다. 그러곤 손자국이 찍히지 않은 분홍색의 모서리와 테두리 부분을 가리켰다.

“평생을 걸쳐 한 곳을 팠는데 수맥도 발견 못 한 사람이 있는 반면, 남들이 파 보지 않았던 곳을 살짝 걷어 냈을 뿐인데 금맥을 발견하는 사람도 있어요. 따지고 보면 연금술사들은 금맥을 찾아 헤매는 광부들이나 다름없어요.”

나는 연금술사 같은 거 못 할 거 같아. 서브 직업은 개뿔. 그냥 지금 하고 있는 드루이드나 열심히 잘 해야지.

“이건 여담인데 연금술사들 중엔 일부러 주점이나 도박장을 자주 방문하는 사람들도 있대요. 온갖 상식 밖의 이야기가 나오는 곳을 찾아 헤매면서 어떻게든 아이디어를 얻어 내려는 거예요. 그런 면에서 저는 그런 곳을 방문하지 않아도 잘 생각해 내니 재능이 뛰어난 거죠. 하지만 조금만 편해지려고 하면 금세 도태되는 그곳에 더 있고 싶진 않았어요. 재능이 저를 가만두지 않아도.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가업이나 잇고 배워 두면 평생 먹고살 수 있는 기술을 배우고 싶어서 연금탑을 나오게 된 거예요.”

루프도 필라처럼 자존감이 매우 강해 보였다. 잘난 척을 하지만 그게 또 밉게 보이진 않았다.

“여기 강연에 가셔야 한다는 거죠? 그렇다면 이러고 있을 것 아니에요! 어쩌면 이미 늦었을지도 몰라요!”

루프가 안고 있던 쿠션을 휙 던지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르신, 티켓값 주세요!”

그녀가 두 손을 모아 내게 내보이며 초조한 얼굴을 했다. 갑작스러운 루프의 행동이 당황스러웠지만 착실히 폰을 꺼내 다이아를 털어 냈다.

“무려 어닝의 강연이라고요! 이미 티켓을 사기 위해 밤을 새워서 줄을 서 있을 거예요! 어쩌면 3일 전부터 줄을 서고 있을지도 몰라요.”

“그래서 이 새벽에 줄을 서려고요?”

루프가 다이아를 받자마자 뛰쳐나가려고 하길래 급하게 팔을 붙잡았다.

“1번째 밖으론 나오지도 않던 어닝이 두 자릿수 테라리움에 방문하는 게 얼마나 희귀한 일인데요! 어쩌면 앞 번대 테라리움에서부터 티켓팅에 실패한 사람들과 뒤 번대에서 올라온 사람들로 이미 선착순이 끝났을 수도 있어요.”

“혼자 가진 말고….”

만일을 위해 그녀에게 제퍼와 헤르마를 붙여 주었다. 둘은 이리스가 주최한 가위바위보에서 졌다.

제퍼가 울상을 하며 털레털레 그녀를 따라 나갔다. 헤르마는 제 볼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다크서클이 턱까지 내려오겠는디….”하며 이리스를 향해 약하게 항의를 하고 그 뒤를 따랐다.

“무슨 일 생기면 늘 하던 대로 연락하고! 꼭 제이 님의 티켓 사수 의뢰를 완수하고 와!”

이리스가 방문을 닫으며 작게 소리쳤다.

“자, 그럼 제이 님. 긴급 의뢰에 대해 더 말씀해 주실 것이 있으시죠? 왜 꿀벌을 보낼 수 없는 상황이라 하신 거예요? 위험한 상황이신가요? 제이 님을 쫓는 조직과 관련된 일인가요?”

그녀가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날카롭게 물었다.

생각해 보니 온전히 내 편인 이리스의 파티가 16번째 테라리움으로 입성한 것은 내게 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나는 시들링에게 오픈한 정보만큼 이리스와 노토스에게도 이야기해 주었다.

28번째 테라리움에서 일어났던 비극을 듣고 이리스는 붕어처럼 입만 뻐끔거릴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런데 바곳에 대한 비밀을 알게 되었을 땐 의외로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많이 놀라진 않네? 우리 드라이어드들은 엄청 난리였는데.”

“인공 개량종에 대한 이야기는… 지금 당장은 저희 드루이드들끼리만 알고 있는 게 좋겠어요. 여행을 하며 온갖 해괴한 연금술사들을 많이 만나 봐서 충격이 덜한 것뿐이에요. 다만 이건 우리 같은 사람들 한정이에요. 우리와 드라이어드들은 생각 체계가 달라요. 아마 이 자리에 아티팩트 안의 드라이어드들이 나와서 함께 들었다면 제이 님의 드라이어드들과 똑같은 반응을 보였을 거예요.”

죽음의 늪에서 메스키트와 엘더가 엄청 분노했던 것이 떠올랐다.

“특히 헤르마의 월계수 드라이어드는 이 일을 모르는 것이 좋겠어요. 그 드라이어드는 영광과 명예를 수호하는 나무…. 세계수의 명예를 위해 제이 님의 바곳을 죽여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할 거예요. 심할 경우 바곳이 필드에 나왔다면 월계수는 출전을 거부할 수도 있어요.”

그 말을 듣고 눈살을 찌푸리자 이리스가 한숨을 쉬었다.

“노토스의 소나무들도 고지식한 편이에요. 소나무 고목들의 과거를 볼 수 있는 능력 때문에 옛것의 기억과 가치를 그대로 답습하는 드라이어드들이에요. 세대가 변하며 드루이드에 맞춰 생각이 유연해지는 드라이어드들이 있는 반면, 노토스의 소나무들처럼 올곧게 옛것을 이어가는 것이 굳은 절개를 지키는 것이라 생각하는 드라이어드들도 있어요. 소나무는 대대로 드루이드에게 충성이 강한 만큼 세계수에 대한 충성도 강해서… 바곳을 결코 좋게 보지 않을 거예요.”

새삼 내가 바곳을 영입하기로 마음먹자 생각을 바꿔 준 내 드라이어드들이 고마웠다. 자칫 잘못하다간 드라이어드들끼리 불상사가 일어나 팀이 삐걱거릴 수도 있었다.

“그래서 바곳의 정보를 얻기 위해 이곳 테라리움의 연금탑에 가셔야만 한다고…. 이건 길드의 도움이 필요해요, 제이 님. 비록 수는 적지만 함께 움직여야 한다 생각해요.”

이리스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시들링의 간섭을 매몰차게 끊어 냈던 것에 비해 이리스의 파티를 향해 도움의 손길을 건네는 것은 훨씬 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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