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삼 시들링의 존재가 무척 달가웠다. 첫 만남이 무척이나 좋지 않았던 그가 내게 이렇게 도움이 될 줄 상상도 못 했다. 물론 16번째 테라리움으로 올 때 그를 다시 만나지 않길 바라기는 했지만.
얜 이제 내 길드원이다. 내게 복종하겠다고 약속도 했다.
로브 속에 감춰 둔 바곳을 꺼내 시들링네 쪽으로 밀었다.
“자, 우리 드라이어드들을 제외하고 여기 있는 자들 중 이 애가 어떤 드라이어드인지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이나 꽃 있어?”
바곳은 처진 강아지 눈을 하고 어깨를 붙든 내 손에 제 몸을 맡긴 채 얌전히 서 있었다. 과거의 바곳이었다면 진작 등 뒤로 숨었을 것이다. 그래도 자신과 비슷한 기운을 풍기는 벨라돈나는 조금 무서워하는 것 같기도 했다.
“어… 어?”
대화에 잘 참여하는 칼미아가 높은 소리를 내었다. 벨라돈나가 눈을 가늘게 뜨며 바곳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전투에 집중할 때 보였던 표정처럼 매우 매서워 보였다.
“설마 각시투구꽃…. 개량종인 건가요? 그게 어떻게 드루이드님의 곁에 있을 수 있죠? 분명히….”
“짠! 다 타 버렸다고 생각하셨겠지만 아주 운 좋게 딱 하나 살아남았고 아주 우연하게도 세계수의 축복이 닿아서 드라이어드가 되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그 드라이어드는 그때 드루이드님의 부케에서 본 적 없던 종이네요.”
나는 바곳을 얻게 된 경위를 그들에게 숨김없이 모두 말했다. 메스키트가 차분한 눈으로 날 지켜보았다. 내가 어디까지 그들에게 진실을 오픈할지 걱정되는 것일까?
“시들링이 받은 의뢰의 내용대로라면 드루이드님의 신원을 의뢰인에게 인도해야 하는데….”
난 시들링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너에게 바곳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유는 하나야. 난 파필리온이 싫어. 그러니 그 새끼가 나한테 접근하는 걸 ‘보호’해.”
그리고 이어서 바곳에게 숨겨진 진실, 아이가 인공 개량으로 태어난 존재임을 털어놓았다. 그들은 메스키트와 엘더가 처음에 보였던 반응처럼 분노하고 놀라워했다.
“이곳 테라리움의 연금탑에서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을 벌이고 있다는 건가요?”
“드루이드님은 어떻게 그런 존재를 품을 생각을 하신 건가요? 순리대로라면 세계수의 품으로 돌려보내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품겠다고 결정한 소중한 드라이어드야. 함부로 말하지 마.”
로즈우드가 그때의 누구처럼 똑같이 말했다. 엘더를 슬쩍 바라보았다. 엘더는 태평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벨라돈나가 아주 느린 걸음으로 바곳에게 다가왔다. 그녀는 허리를 숙여 뱀과 같은 눈으로 바곳을 샅샅이 훑어보았다.
“독을 품은 것이 자신의 주제도 모르고 땅 위를 활보하고 있다니. 수치로다.”
한겨울의 서리처럼 차가운 말투였다.
“독을 지닌 꽃은 항상 자신의 모든 감정을 죽이고 겸손한 자세로, 하늘이 아닌 땅을 바라보며 살아야 한다. 독의 용도를 명확히 알고 남용하는 일이 없어야 하며… 모체의 선조들이 어느 상황에서 독을 사용했는지, 어떤 것을 중독시켰는지, 얼마나 많은 운명을 쉽게 끊어 냈는지, 죄를 짊어진다는 자세로 머리를 조아려야 하지. 나의 종과 너에게 섞인 투구꽃의 종은 선조 때부터 인연이 매우 깊으며 공통된 신화가 계승된다. 신의 명을 받들어 운명의 실을 끊어 내는 셋의 사자 중 둘이 우리였으니까.”
바곳에게 매섭게 대하는 벨라돈나가 거슬렸지만 그녀가 하는 말은 굉장히 흥미로웠다. 그녀의 말투가 존재 자체에 대한 경멸보단 선을 살짝 넘긴 했어도 아이를 가르친다는 느낌이 들었다. 회초리를 휘두르며 아주 매섭게.
한편 그녀의 말을 듣고 있는 바곳의 얼굴색이 쌓인 눈처럼 하얗게 변했다.
“드루이드님, 부디 이 어리석은 나무를 제가 버팀목으로서 교육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드루이드님께서 품겠다고 결정하셨다면 허튼 곳에 흘리지 않도록 독을 갈무리하여 당신의 품에 온전히 품어지는 법을 가르쳐야 합니다.”
헐, 바곳의 스승이 되겠다고? 단지 같은 독초라는 이유로?
“내 주인, 제이. 벨라돈나는 세계수에서도 독을 품은 나무들 사이에서 명성이 자자한 종이었습니다. 그녀가 바곳에게 이치를 가르친다면 좋은 일이에요.”
메스키트가 그녀를 두둔할 줄은 예상도 못 했다. 벨라돈나는 완전 독초 계의 일타강사 아냐? 메스키트의 의견이 그렇다면….
벨라돈나는 시들링의 드라이어드 중 가장 강해 보이고 어렵게 느껴지는 드라이어드였다. 아직 덜 큰 바곳이 그녀의 가르침을 감당할 수 있을까? 그녀가 바곳의 머리에 창을 닮은 스태프를 갖다 대는 모습을 보며 잘 참고 많이 배워 오라고 마음속으로 바랄 수밖에 없었다.
“아, 그리고 난 연금탑에서 바곳에 대한 정보를 얻길 원해.”
“그건 위험하다.”
“알고 있어.”
시들링이 단번에 반박했다. 어떻게 얻을지 계획도 없는 상태지.
“연금탑에 대한 계획에 일단 넌 없어. 참견하지 마. 명령이야.”
당장 시들링이라는 좋은 패를 배치하는 것은 오로지 파필리온을 견제할 때뿐이다.
우리 애가 여기저기 타박 받곤 있어도 얼마나 기특한 애인데. 바곳이 온전하게 잘 클 수만 있다면 해 줄 수 있는 것은 다 해 주고 싶었다.
엄청난 디버프 능력으로 날 구해 주기도 했고. 최근엔 디버프 해제 능력도 얻어서 큰 역할을 하기도 했지.
그 외에도 자잘하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열심히 노력해서 잘하려고 했어. 상점가에서 팸플릿도 들어 주겠다며 거들고. 28번째에서 전복당한 그놈의 마차에서 작은 키로 깃털도 줍고…. 어, 그러고 보니 나 그때 새의 깃털을 하나 얻었는데.
주머니에서 깃털을 꺼냈다. 깃털을 발견했던 당시를 떠올렸다. 메스키트가 이 깃털이 발견한 장소와 맞지 않게 매우 화려했기에 어쩌면 마차를 공격한 자에 대한 단서가 될 수 있다고 했지. 그때 마차의 문엔 거칠게 톱 같은 걸로 찍은 흔적도 있었고.
문득 파필리온이 어깨에 올려 데리고 다니는 작은 노란 새가 떠올랐다. 머리와 날개깃이 포인트로 까맸던 그 새.
이 깃털도 노란색이고, 많이 바래서 깃털 끝이 밤색으로 보이긴 하지만 세월을 되감는다면 검은색에 가까울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노란 새와 매우 가까워 보였던 엉겅퀴 드라이어드. 톱을 사용했지?
뭔가 이상했다.
“왜 파필리온의 드라이어드가 마차를 공격했지?”
“그게 무슨 말이지?”
시들링이 물었다. 내가 그를 연금탑 계획에서 배제시킨 후부터 그는 쭉 불만스러운 눈빛을 하고 있었다. 새의 깃털을 빙글 돌렸다.
“시들링한테 맹독초를 회수해 오라고 의뢰를 한 건 파필리온인데…. 왜 파필리온의 드라이어드가 마차를 공격한 걸까? 왜 그때 맹독초를 회수하지 않고 몇 년이나 지나서…?”
그들에게 새의 깃털을 보여 주며 내 생각을 이야기했다. 마차를 발견하지 못했던 시들링네와 달리 우린 마차를 발견했고 거기서 얻은 단서들과 파필리온의 엉겅퀴 드라이어드를 떠올리게 된 이유까지.
맞지 않는 퍼즐이 너무 많았다. 시들링과 만나 이야기하며 시간이 꽤 오래 지나 있었다. 식탁 위 빈 접시들은 음식물이 딱딱하게 말라붙어 있었으며 오래 앉아 있었던 탓에 허리도 뻐근했다.
혼자 조용히 생각하고 싶어서 시들링을 돌려보냈다. 그는 16번째 테라리움에 세금을 내며 집을 가졌지만 굳이 내가 있는 여관의 옆 방에 머물겠다고 했다.
네 맘대로 하세요. 아쉬워하는 얼굴을 한 그를 돌려보내고 침대로 점프했다.
왜 꼬이는 거지? 파필리온, 이 새끼 진짜 뭐 하는 놈일까? 이미 시들링과 아주 오래 붙어 있던 것을 걘 월렛으로 다 들여다보고 있었겠지. 도청 기능이 없는 게 어디야. 사생활 보호 존나 안 되네.
아귀를 맞춰 보기 위해 스케어크로우의 일지까지 떠올려 가며 차분히 생각하다 문득 떠오르는 인물이 있었다. 스케어크로우가 ‘충실한 보좌관’이라 여기던 그 사람. 그 사람은 어떻게 된 거지? 난리 때 죽었나?
이 사람도 나름대로 생각해 보면 자주 등장했다. 외부에 28번째 테라리움에 대한 일을 알려선 안 된다고 막은 것도 보좌관, 전 28번째 테라리움의 전속 길드를 운영했던 길드 마스터도 보좌관. 길드를 해체시킨 것도 보좌관.
28번째 테라리움을 위임받으며 인연은 거기서 끝이라 생각했던 스케어크로우도 생각 이상으로 내게 깊게 엮였다. 이 보좌관도 뭐 있는 거 아냐? 데이지2에게 물어봐야겠다 싶어서 테라리움 아티팩트를 바라보았다.
“제이님! 알려드려야 할 일이 있어서 보고 싶었는데 다행이에요!”
불쑥 목소리가 들려왔다. 데이지2는 평소와 다르게 조금 초조해 보였다.
“테라리움에 마차가 한 대 왔는데 입주를 원하는 사람들도 아니고 여행객으로 보이지도 않고, 제이님이 미리 말씀하신 그 상회의 사람들로 보이지도 않았어요. 일단 너무 수상해 보여서 가막살나무 드라이어드가 쫓아내긴 했는데…. 완전히 간 것 같지는 않아서.”
“수상한 놈들? 감히 내 테라리움에서 뭘 했는데?”
“여기저기 살펴보기도 하고 과수원은 잔해들로 위험해서 들어가면 안 된다고 했는데도 무턱대고 들어가려 하고….”
파필리온이 보낸 놈들이다! 단번에 필이 왔다. 테라리움 근처의 불에 대한 치안이 좋아졌는지 이젠 마차 한 대쯤은 우습게 왔다 갔다 하나 보네. 감히 어딜 염탐하려 들어?
핸드폰을 꺼내 28번째 테라리움 관리 화면을 확인했다. 염탐꾼들이 테라리움 내부에 있는 것은 아닌지 방문객 정보에 아무도 뜨지 않았다. 그 화면에서 아무도 28번째 테라리움에 접근할 수 없도록 관계자 외 접근 불가 제한을 걸어 버렸다.
길드원만이 예외였다. 사업 계획서에 따르면 작물 트리오의 방문은 아직 멀었다. 그건 그때 가서 풀어 주면 될 일이고.
“아무도 테라리움에 접근할 수 없도록 조정해 놨어. 또 무슨 일이 생기면 말하고.”
“네! 바로 알려드릴게요. 그런데 어떻게 기막힌 타이밍에 아티팩트를 확인하셨어요? 전 오늘 드루이드님을 못 볼 수도 있다 생각했는데. 운이 좋다면 밤쯤에나 드라이어드가 다녀가서 소식을 전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나 신기라도 있나? 갑자기 등골이 오싹해졌다.
“아, 그러고 보니 테라리움의 전 행정 관리원의 보좌관은 어떻게 됐는지 알고 있어? 스케어크로우가 충실한 보좌관이라고 생각하던데.”
“아뇨, 아시다시피 전 대피하다 잔해를 맞고 죽어서 그 뒤는 어떻게 됐는지 잘 몰라요.”
“그럼 그 보좌관에 대해 아는 대로 전부 알려 줄래?”
데이지2는 턱을 괴며 눈을 감았다.
“제가 잡일 담당이라 잘 알고 있을진 모르겠지만 열심히 떠올려 볼게요. 일단 여자였고요. 키가 딱 저만 했던 것 같은데. 그래도 전 행정 관리원님 대신 보좌관이 일을 지시할 때가 많았으니까…. 이름이 음, 딜… 델… 아! ‘델어닝’이었어요. 전 행정 관리원님의 신임이 굉장히 두터운 사람이었어요. 드루이드였고 앞 번대 테라리움 출신이라고 했던 것 같고. 일을 굉장히 잘하고 똑똑해서 주변에 인기도 많았던 것 같아요.”
“그리고 더 없어?”
“어… 음… 드루이드인데 그의 드라이어드를 본 적은 한 번도 없어요.”
수상하다. 엄청 수상한 사람이라고 온 우주가 속삭이고 있었다.
“알겠어. 혹시 과수원 정리하면서 그 보좌관인 델어닝이란 사람에 대한 정보를 찾으면 내게 또 알려 줘.”
데이지2와의 이야기를 끝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