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6화 (116/604)

“안녕? 블랙 릴리의 그대, 이야기 좀 할까?”

얼굴은 잘생겼는데 뇌는 덜 생긴 놈이 내가 있는 곳을 어떻게 알고 찾아왔다. 여관은 18번째에서처럼 고급스러운 곳으로 잡고 1층의 라운지에서 간단히 뭐 좀 먹으려고 자리를 잡은 터였다.

비어 있는 맞은편에 양해도 없이 앉더니 얼굴로 무마해 보려는 것처럼 실없이 웃어 댔다. 기어코 메스키트가 랜스를 꺼내자 여관의 점원들이 비전투 지역이라며 새파래진 얼굴로 뛰어왔다.

이곳이 마음에 들었고 더 돌아다니는 것은 귀찮았기에 소란을 피워 자리를 옮겨야 하는 불상사는 싫었다. 소란의 원인인 저놈을 쫓아내면 해결될 일이었다.

그런데 점원들은 저 이상한 놈을 쫓아내긴커녕 극진히 대하고 있었다. 오히려 자리 세팅을 해 주다니. 뭐지, 얼굴발인가? 엘더처럼 후광이 환각처럼 보이는 놈이었다.

놈은 손으로 턱을 받친 채 지긋이 날 바라보았다. 어쩐지 그 눈빛에 영혼이 없는 것 같은 허한 느낌이 들었다. 마치 인형처럼.

“날 싫어하는 것처럼 구는 사람은 처음이야. 남자든 여자든 다들 내 얼굴을 좋아했는데.”

“싫어하는 것처럼이 아니라 싫어. 아, 얼굴은 취향이야. 근데 너 말하는 게 미친놈 같아.”

“왜? 이런 게 좋지 않아? 얼굴은 잘생겨도 멍청하게 구는 게 입맛대로 다룰 수 있다고 좋아들 하던데. 똑똑하게 굴면 얼굴값 한다고 생각할 거잖아?”

“지금 넌 얼굴값도 못하고 있어. 완전 꼴값이야.”

재잘재잘 잘도 떠들던 남자의 입이 꾹 다물렸다. 그러곤 내가 애피타이저로 나온 찻잔을 드는 것이나 포크로 샐러드를 박살 내는 행위를 아주 유심히 지켜보았다.

“언제까지 거기 앉아 있을 거야? 우리 드라이어드들, 특히 메스키트가 폭발하기 일보 직전 같거든? 지금은 소란을 피우고 싶지 않다는 내 바람 때문에 겨우 참고 있는데 곧 한계 같아. 우리 드라이어드들은 자비가 없어.”

그때 그의 어깨에 앉아 있던 작은 새가 포르르 날아 테이블 위에 안착했다. 샛노란 새는 머리와 날개깃이 먹물에 한 번 담근 것처럼 까맸다. 주홍색 부리를 딱딱거리며 날 보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것이 꽤 귀여웠다.

“얘도 당신이 마음에 든대.”

“안 물어봤어.”

새는 내 샐러드에 곁들여진 견과류들을 노리는 것처럼 보였다. 손을 휘휘 저어 쫓아내려 하니 되려 놀아 주는 줄 알고 종종 뛰며 날갯짓을 했다.

“저리 치워. 먹을 것 앞에서 깃털 날리잖아.”

“얘 엄청 깔끔한 애야. 목욕물도 받아 둔 지 한 시간 이상 지난 거면 안 써.”

“하….”

들고 있던 포크를 내려 두고 똑같이 그를 마주 봐 주었다. 보석을 닮은 듯한 푸른 눈이었지만 반짝임이 없었다. 이렇게 사람 속을 태연하게 긁어 놓고 있으면서 무기력하다는 눈빛은 또 뭐람?

“대체 왜 이러는데? 인기 많다며? 나 말고 놀아 줄 다른 사람이나 알아봐.”

그때 순간적으로 그의 눈빛에 생기가 돌아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인형 같은 무기질한 눈이 아닌 살아 숨 쉬는 사람다운 눈을 했다.

“세계수의 28번째 테라리움 행정 관리원께서 여긴 웬일인가 해서.”

“…뭐?”

내가 행정 관리원인 걸 어떻게 알았지? 날 계속 바라보던 그가 내 주위에 선 드라이어드를 빠르게 스캔하는 것이 보였다.

“내가 알고 있기론 28번째 행정 관리원은 좀 더 나이가 많은 사람이었는데. 당신은 어려 보이기도 하고… 전해 들은 것과 많이 달라.”

“큼큼, 내가 행정 관리원이란 증거는?”

그가 월렛을 꺼내 흔들었다.

“그야, 내가 이곳 행정 관리원이니까 알 수 있지. 어떻게 된 거야? 행정 관리원이 바뀐 건가? 세계수가 메말라도 28번째 테라리움만큼은 행정 관리원이 바뀌지 않을 것 같았는데.”

헐, 저런 놈이 이곳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원이라니. 말세다, 말세야.

무의식적으로 손을 올려 입을 꾹 눌렀다. 아무것도 말해 주기 싫었다. 슬쩍 메스키트를 올려다보았다. 그녀와 눈이 마주치고 더 대화를 잇고 싶지 않은 내 마음이 전달되었다. 메스키트가 커다란 방패를 들어 나와 그의 시야를 완전히 차단했다.

저 자식이 행정 관리원이라면 여관 점원들의 태도가 극진했던 것도 이해된다. 테라리움 전체를 쥐고 있는 녀석이니 이 여관에서 아무리 그를 치워 달라 부탁해도 들어주질 않겠지. 다른 여관으로 옮겨도 테라리움을 월렛 하나로 훤히 꿰뚫고 있으니 또 쫓아올 확률도 있고.

무시가 답이다. 지금부터 그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해 주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제풀에 지쳐 나가떨어지겠지.

“와, 방패 정말 크네. 저기 나랑 이야기 안 해 줄 거야?”

우리 사이에 흐르는 기류 때문에 서빙을 하던 점원들만 눈치를 보며 고생이었다. 한쪽은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원, 내 쪽은 오늘 여관에서 제일 좋고 큰 방을 기한 없이 빌리고 풀 서비스를 선불로 신청한 VVIP 고객이었다.

팁도 아낌없이 뿌리니 온 점원이 달라붙어 서포트 중이었는데, 내가 여관을 옮기기라도 하면 그들 입장에선 엄청난 손해였다.

다이아는 법보다 빠르다. 테이블에 다이아를 한가득 올려놓으니 눈치 빠른 여관 주인이 달라붙었다. 테라리움 내에서 걸어 다니는 법이나 다름없는 행정 관리원은 날아다니는 다이아 부자도 있단 걸 오늘 알게 될 것이다.

그들은 결국 자신들의 행정 관리원에게 양해를 구했다.

“손님께서 불편해하시는 것 같으니 자리를 옮겨드리려고 합니다.”

“하하, 이상하네. 28번째 테라리움은 그렇게 경제 사정이 좋은 곳이 아니었는데. 어떻게 된 걸까?”

눈빛이 돌아온 그는 어느새 말투에도 느끼함이 빠지고 힘이 실려 있었다. 마치 처음 봤을 때의 모습은 모두 연기였다는 것처럼.

“조금만 더 나와 이야기해 주면 안 돼? 28번째 테라리움의 이야기를 하기 싫다면 하지 않을게. 난 당신에게 흥미가 있을 뿐이야.”

“손님께서 곤란해하십니다.”

끼익, 하고 의자 등받이가 젖혀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곳 말이야. 세금을 더 높이고 싶진 않을 거 아냐? 위치도 좋아서 노리는 곳도 많은데.”

그는 마치 악덕 건물주처럼 굴었다.

“하던 대로 계속하신다면 최소 몇 달 분의 세금만큼 제가 여기서 양껏 쓰고 갈게요.”

세금 그거 별거냐. 난쟁이들이 실수인 척 사고 한 번 쳐 주면 몇 년은 족히 뚝딱일 것이 분명했다. 그의 엄포에 뒤로 물러나려던 여관 주인의 다리에 힘이 실렸다.

“쉽지 않네. 아, 그래. 시들링 이야기를 해 볼까? 대체 ‘아이언비스트’랑은 어떻게 아는 사이인 거야?”

푸핫, 아이언비스트는 또 뭐야? 철 괴물이야? 걔는 왜 그런 걸로 불리고 다닌대?

“그 녀석 테라리움들에서 워낙 악명이 높아서 출입 금지된 곳도 많고 가까이하는 사람들도 없을 텐데, 어떻게 당신같이 영혼의 한계가 낮은 드루이드랑 아는 사이인지 궁금해.”

쪼렙 무시하지 마라. 너는 쪼렙이었던 때가 없었던 줄 아냐?

“아, 그래. 의뢰를 보냈지, 아래로. 그래서 만난 건가? 하지만 기간은 짧았는데. 대체 어떻게 했길래 당신과 대화하는 법을 배우고 싶다고 할 정도가 된 거야? 덕분에 다이아는 쏠쏠하게 벌었지만.”

“역시 이상한 걸 가르쳐 준 게 당신일 것 같더라.”

앗, 실수. 나도 모르게 대응해 주고 말았네. 하지만 메스키트는 우리 사이를 가로막은 방패 칸막이를 굳건히 지켜 주었다. 그의 작은 노란 새가 방패를 빙 둘러 총총 뛰어 오더니 또로롱, 하고 방울 소리 같은 울음을 냈다.

저 새는 대체 뭘까? 그의 트레이드마크 같은 건가?

“시들링이랑 친한 사이 아니야. 아니 걔랑 만난 건 또 어떻게 알고 있는데? 나랑 대화하고 싶어 하는 건 또 어떻게 알고?”

“아이언비스트랑 접촉한 모든 사람은 내게 보고하도록 되어 있으니까. 악명은 높아도 그는 유능한 드루이드라, 그를 감당 가능한 한 자릿수 테라리움들은 서로 데려가려고 난리거든. 관리는 힘들어도 뺏기면 손해지. 그가 16번째 테라리움으로 돌아오고 유일하게 접촉한 사람이 나를 제외하곤 당신뿐이야. 아이언비스트의 이야기가 흥미로워? 더 이야기해 줄게. 대신 내게 당신의 이야기도 해 줘.”

“아, 그런 거면 계속할 필요 없어. 나 그냥 방으로 올라갈래. 차라리 룸서비스를 시키겠어. 설마 방까지 따라오진 않겠지?”

자리에서 일어나자 엘더가 기다렸다는 듯이 로브 안으로 날 넣고 감싸 가렸다. 철컹, 느리게 메스키트의 방패가 따라붙었다. 그녀는 남자가 조금이라도 따라오려는 기색이 보이면 가차없이 랜스를 내지를 것처럼 보였다.

“그럼 입 다물고 있을게, 좀 더 같이 있어 주면 안 돼? 보고만 있을게.”

“뭐야, 왜 그렇게 징그럽게 굴어? 대체 나한테 왜 그러는데? 그냥 너 얼굴 좋다는 사람들한테 가지 그래? 내겐 예쁜 꽃들이 많아서 얼굴로 어떻게 해 보려는 심상은 안 통해.”

보란 듯이 엘더의 턱에 손바닥을 대었다. 이런 미모가 옆에 찰싹 달라붙어 있으니 미인에 대한 내성은 뛰어나단 말씀.

“그래도 잠깐…!”

그가 따라 일어나려 하자 결국 메스키트가 폭발했다.

“그만. 내 주인에게 더 이상 다가오지 마세요.”

그를 향해 겨눠진 메스키트의 랜스를 보며 노란 새가 또로롱, 하고 크게 울었다. 라운지에 강한 꽃향기가 자욱하게 풍기며 검은색 짧은 머리를 모두 쓸어 넘긴 여성형 드라이어드가 그의 아티팩트에서 튀어나왔다.

드라이어드는 아티팩트에서 나오자마자 제멋대로 생긴 거대한 톱을 가로 세워 메스키트의 랜스를 막아 냈다. 노란 새가 뾰로롱 유유히 날아 드라이어드의 어깨에 안착해 부리로 그녀를 콕콕 쪼았다.

그 드라이어드는 색깔은 달라도 본 적 있는 종이었다. 가슴에 브로치처럼 달린 꽃을 보니 더욱 확신이 생겼다. 28번째 테라리움으로 돌아가던 길에서 초보 드루이드가 데리고 있던 엉겅퀴 드라이어드와 여러모로 유사했다.

다만 그 뉴비의 드라이어드보다 훨씬 노련해 보이는 데다 검은색 꽃줄기가 얼기설기 얽힌 날개도 있고, 장비도 화려했다.

그나저나 검은색 엉겅퀴라니, 처음 본다.

“평소의 당신답지 않게 상대방이 적의를 품게 만들었네. 갑자기 왜 그러는 거야? 그래도 좀 상대를 봐 가면서 하는 게 어때? 저 드라이어드는 나도 버겁다고.”

“제발 여기서 소… 소란을 피우시면 안 됩니다! 모든 여관은 비전투 구역입니다!”

드라이어드들의 싸움에 행여 휘말릴세라 안전지대로 대피한 점원들이 목놓아 소리쳤다. 데이지가 무기를 꺼내 훌쩍 뛰어올라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는 것을 엉겅퀴 드라이어드가 유심히 지켜보았다. 예전의 바곳이라면 이런 분위기에서 내 품에 매달려 있었겠지만, 이젠 스태프를 꺼내며 제법 위협적인 포즈를 취할 줄도 알게 되었다. 기특하기도 해라.

“수가 제법 되네. 하나같이 잘 벼린 나무들이야….”

내 드라이어드들을 보며 엉겅퀴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러곤 제 주인을 힐끗 바라보았다.

“파필리온, 전투를 피하고 싶다면 저들을 강제 추방해.”

“추방하지 않을 거야.”

그는 자신의 드라이어드의 어깨를 잡아 자신 쪽으로 끌어당기며 날 바라보았다.

“알았어. 내가 갈게. 아이언비스트같이 위험한 놈이랑은 잘도 이야기하면서 왜 난 안 되는 거야? 내가 그놈보다 생긴 건 낫지 않아?”

“걔나 너나.”

“좀 더 위험한 게 취향인가 봐. 그렇지?”

그가 자신의 드라이어드에게 동의를 구하듯 바라보았다. 반면 엉겅퀴 드라이어드는 오늘 이 새끼가 뭘 잘못 먹었나? 하는 표정이었다.

그를 무시하고 계단을 향해 걸었다. 내 등에 대고 그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나도 알고 보면 위험한 사람인데!”

“대체 오늘 왜 그러는 거야?”

“알고 싶은 건 많은데 나랑 이야기해 주지 않는걸.”

“아, 그래. 당신 좋다는 사람은 많지. 드디어 수선화 드라이어드처럼 구는 당신에게 현실을 일깨워 주는 사람이 나타났나 보네.”

내가 방으로 향하자 점원들이 화색을 띄우며 황급히 날 안내했다.

“저기, 내 이름은 파필리온이야. 다음에 다시 찾아올게!”

또 다급하게 소리치는 그에게 중지를 펴 보였다.

16557706690038.jpg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