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5화 (115/604)

하루가 채 다 가기 전에 16번째 테라리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곳도 18번째 테라리움처럼 번화했고 사람들로 복작거렸다.

날 테라리움 안까지 모셔다 놓고서야 이리스가 만족스러운 표정을 했다.

“가이아 길드의 첫 의뢰 완벽하게 완수할게요!”

“앗, 이것도 가져가세요. 28번째 테라리움에서 가막살나무에게 전해 주면 돼요.”

주머니에서 가막살나무의 소중한 묘목을 꺼내 그녀에게 전달했다. 내 주머니 속의 인벤토리는 음식을 넣어 놔도 썩지 않고 물도 처음 넣었을 때의 온도와 똑같았다. 묘목도 그날 캐냈던 그대로였다.

이리스는 조심히 묘목을 받아 든 후 뿌리 쪽을 수건으로 감쌌다. 그리고 주머니 속에 쏙 집어넣었다.

“제이 님이 마차를 마련해 주셔서 생각보다 훨씬 빨리 의뢰를 완료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이제 벌도 있으니 중간중간 보고를 드리겠습니다! 혹시 이상한 녀석을 만나면 바로 알려 주십쇼! 마차가 없으면 달려서라도 길드 마스터님을 지키러 오겠습니다!”

“뭘 그렇게까지야….”

“다녀올게요!”

이리스와 제퍼가 명랑하게 소리치며 마차를 타고 돌아갔다.

18번째의 것처럼 거대한 연금탑이 저 멀리서 보였다. 저기가 내 목적지. 바곳의 비밀을 품은 곳.

그런데 어떻게 할까? 18번째에선 필라의 소개라도 있었지. 무슨 핑계로 가면 좋을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들어가더라도 바곳의 정보엔 어떻게 접근하지? 인공 개량은 금지된 일이니 분명 외부인에게 공개하지 않을 텐데.

연금탑이 잘 보이는 광장의 분수대에 걸터앉아 곰곰이 생각했다.

갑자기 어어, 하고 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익숙한 얼굴이 놀란 눈을 하고 날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도 마을이 넓으니 마주칠 확률은 높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어떻게 입장하자마자 시들링의 드라이어드를 마주칠 수 있어? 이게 무슨 개떡 같은 우연이야?

“드루이드님이 여긴 웬일이세요?”

연분홍 꽃가지가 여러 갈래로 엮인 날개가 인상 깊은 칼미아 포레스트의 왕, 칼미아 라티폴리아 드라이어드였다. 그녀가 여기 있다는 건 근처에 주인인 드루이드도 있을 확률이 높았다.

못 본 척해라. 황급히 자리를 뜨려는데 이번엔 가는 방향에 바이올린을 든 브라질리안 로즈우드 드라이어드가 서 있었다. 그 역시도 날 보며 놀란 얼굴을 했다.

아씨… 잠깐만. 불안한 예감이 적중했다. 커다란 그림자가 지고 은색 갑옷이 아닌 평범한 차림을 한 시들링이 서 있었다.

갑옷이 그의 목을 전부 감싸고 있어 턱 끝에만 살짝 보였던 불그스름한 화상 흉터가 가슴이 탁 트인 셔츠를 입으니 훤히 드러났다. 판판한 가슴까지 내려오는 화상 흉터가… 지나치게 섹시해 보였다.

아, 그래. 쟤도 나름대로 잘생긴 놈이었지. 덩치만 놓고 보면 진짜 취향인데.

시들링은 불이 활활 타오를 것 같은 눈을 하고 날 바라보고 있었다. 굳게 일자로 다문 입술이 작게 달싹이는 것이 보였다.

“그… 드루이드님. 정말 여기서 뵐 줄은 몰랐네요. 그렇지 시들링? 시들링도 많이 놀란 눈치인가 봐요, 하하.”

칼미아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곧이어 벨라돈나를 제외한 그의 드라이어드들이 쏙쏙 나타났다. 카돈은 그때와 같이 메스키트를 보며 유명인의 광팬처럼 굴었다. 혼자서 군중의 소란을 죄다 씹어 먹을 만큼 시끄러웠다.

“다시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메스키트 님을 생각하며 열심히 수련했습니다! 이제 저도 비록 방패는 없지만 전선에 나가 맞서 싸울 수 있습니다!”

“덜떨어진 새끼….”

블루 멜로우가 카돈을 보며 질린 얼굴로 혀를 찼다.

“셋… 셋이 끝났어. 잠깐만! 벨라돈나가 없다고 그렇게 막 나가면 어떡해? 시들링, 기다려! 블루 멜로우는 드루이드님께 이야기한 게 아니야. 혼잣말이니까 카운팅하면 안 돼! 물론 나도 너에게 하는 이야기니까 이것도 세면 안 돼! 아니 엄연히 따지자면 카돈도 메스키트에게 이야기했어!”

시들링의 드라이어드들이 그의 굵은 팔뚝을 목줄처럼 움켜쥐고 한데 모여 웅성거렸다.

“가위바위보라는 거 해 볼래? 누가 할지 정하자.”

“난… 안 할래…. 세계수의 28번째 테라리움에서… 쫓아내던 모습… 무서웠어….”

“나이가 제일 어린 놈이 하자.”

“나이가 제일 많은 성목이 모범을 보여야지!”

그러더니 결국 칼미아가 다가왔다.

“저기… 드루이드님. 그날 이후로 시들링이 정말 많이 공부했거든요. 인간들의 학원도 등록하고 수업도 열심히 받았어요. 그때랑 정말 다를 건데…. 다시 만나지 말자고 했지만 쟤는 정말 드루이드님을 다시 만나기를 기대해 왔거든요…. 그러니까….”

“안쓰럽다… 안쓰러워….”

블루 멜로우의 딴지에 칼미아가 눈을 날카롭게 뜨며 이를 갈았다.

“그, 쟤 입은 옷도 달라졌잖아요? 수업에서 코디해 준 대로 열심히 한 거거든요…. 호감을 주는 모습이라고…. 진짜진짜 많이 노력했어요. 그러니까 한 번만 기회를….”

“대체 뭔 수업이에요, 그거?”

아니 무슨 학원을 다녔길래? 옷차림을 코디해 주는 학원도 있어?

“아, 됐어요. 그렇게 굴 필요 없어요. 기껏 대화하는 정도인데. 뭐 할 말 있으면 해 봐. 난 여기에 볼일이 있어서 왔을 뿐이야.”

내가 허락하기 전에 먼저 말 걸지 말라는 건 용케 잘 지키고 있네. 발언권을 주자 드디어 시들링이 입을 열었다. 그리고 드라이어드들이 많이 바뀌었다며 신신당부했던 그가 꺼낸 첫마디는….

“한 떨기 장미꽃 같은 그대….”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시들링의 목소리가 맞는데? 무표정을 하고서 대체 영문도 모를 소리를 잘도….

“고대하던 그대의 숨결에 닿기 위해 내 한 몸 낮춰서….”

“큽, 시발, 야, 멈춰! 멈춰! 어디서 뭘 배워 온 거야?”

두 주먹을 꽉 쥐고 시들링을 응원하는 자세를 취하던 드라이어드들이 오히려 날 보고 알 수 없다는 표정을 했다.

“왜 그러세요? 배운 대로 안 까먹고 잘하고 있는데.”

칼미아가 의문을 가득 담은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아니 오히려 물어봐야 할 사람은 난데?

“대체 무슨 학원이에요?”

“저기 간판이 보이는 건물에 있는, 사람에게 호감을 얻는 화술을 가르치는 학원이에요. 아주 인기 많고 유명한 강사가 가르쳐 주는 곳이에요. 수업료가 비싸서 그런지 학생은 시들링밖에 없지만. 시들링을 좀처럼 받아 주는 곳이 없는데 선뜻 도와주겠다고 친절하게 제안해 준 곳인 걸요!”

“맞습니다. 시들링은 배운 대로 잘하고 있어요. 일단 말도 부드럽게 하고.”

대체 어디가? 무뚝뚝함 그대로인데?

“상대를 먼저 칭찬하고 아름다운 용어들을 사용하라고 했습니다. 잘 모르겠다고 하니까 장미꽃 얘기도 알려 줬고요. 분명 청혼할 때 쓰이는 꽃이라 애틋한 마음을 잘 전달할 수 있을 거라고 했는걸요.”

로즈우드가 열심히 시들링을 변호했다. 무슨 해괴한 걸 배워 온 거야?

“야! 너 호구 잡혔네! 생긴 건 그렇게 안 생겼으면서!”

“호구 잡혔다는 게 무슨 말인가요?”

“멍청하게 이용당했다는 거지! 그런 말도 안 되는 거에 돈을 낭비하는 놈이 어딨어? 나야 다이아가 넘쳐나지만 너 같은 사람은 아껴야 할 거 아냐?”

“앗! 시들링도 다이아 많아요.”

내게 일일이 대꾸해 주는 칼미아는 문제점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는 눈치였다.

“그렇지만 가르쳐 주는 드루이드가 정말 인기가 많은 사람인데…. 자길 따라 하면 시들링도 사람들에게 호감을 줄 수 있다고 했는데….”

“됐어요! 으이그, 멍청한 놈아! 그런 거에 사기를 당하냐?”

시들링의 얼굴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그의 드라이어드들이 황급히 그를 달랬다.

“아냐, 넌 일단 배운 대로 잘했어. 그런데 더 노력해야 하나 봐. 드루이드님과 잘되지가 않네. 좀 더 공부해서 오자. 그래도 꽤 오래 대화했지? 효과는 조금 있었나 봐.”

“시들링보다… 네가 더… 오래 대화한 것 같은데….”

호구 잡힌 것이 뻔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그를 도와줄 의리는 없었다. 시들링을 뒤로 하고 일단 여관이라도 잡자는 생각에 거리를 걸었다.

그러다 칼미아가 가리켰던 그 미친 학원이 있는 건물을 지나치게 되었다.

화술 학원

화술 학원은 개뿔. 그냥 지나치려는데 계단에서 누군가 내려오는 것이 보였다. 대체 시들링을 호구 잡는 사기꾼은 누군가 얼굴이라도 보자 하고 지켜보았다. 키가 훌쩍 크고 날씬한 모델핏의 남성이 열쇠고리를 돌리며 내려오고 있었다.

그림자가 걷히고 드러난 얼굴은… 어머, 미남. 그것도 지독하게 내 취향인 화려한 꽃 같은 외모였다. 엘더에 버금가는 미모에 그를 드라이어드라고 착각할 정도였다.

달콤한 꿀 같다거나 별을 녹여낸 금사로 엮었다는 등의 온갖 수식어를 갖다 붙여도 어울릴 것 같이 찬란하게 곱슬거리는 금발을 가르마를 타 넘긴 데다 푸른 눈이라니. 지독하게 환상적인 색 조합이었다.

깨끗한 흰 피부에 높은 콧대, 정돈된 눈썹과 생기가 도는 입술까지. 엘더를 처음 보고 미모에 숨이 멎을 뻔했던 것만큼 충격적이었다. 그는 완전 잘생긴 남자였다.

너무 취향이라 넋 놓고 바라본 바람에 그와 눈이 마주쳤다.

“안녕? 그쪽의 고귀한 블랙 릴리 같은 여성분을 보니 내 가슴속에 깊은 울림이 오고 말았는걸.”

“뭐야, 이 미친 새끼는.”

입을 여니까 확 깬다. 우리 엘더도 입 다물면 잘생기긴 했지만 입을 열어도 귀여우니까 용서가 됐다. 근데 저놈의 주둥이는 구제 불능이었다.

지금 보니까 어깨에 작고 귀여운 노란 새도 얹고 있었다. 입을 안 열었으면 숲의 요정 같은 모습이었을 텐데, 지금은 저 모습도 확 깬다. 뭔 살아 있는 새를 어깨에 얹고 다니고 있어. 단단히 미친놈이네.

가만. 말투로 보면 시들링을 가르친 사람은 저 남자가 분명했다. 시들링의 드라이어드들이 그를 인기 많다고 표현했던 건… 설마 저 외모에 반한 여자들을 이야기했던 건가?

이야, 시들링. 잘못 알아도 단단히 잘못 알았다, 이놈아.

“앗, 그냥 가는 거야? 우리 어디 가서 달콤한 차라도 마시며 스윗한 대화를 나누지 않을래? 그대의 존재 자체만으로도 내겐 물오른 딸기를 한가득 베어 문 것처럼 달콤하게 다가오지만.”

“아, 꺼지세요.”

그리고 왜 초면에 다짜고짜 반말이야. 더 가까이 다가오려는 그를 메스키트가 랜스를 들어 위협적으로 제지했다.

“와우, 엄청난 드라이어드를 가지고 있네.”

“진짜 안타깝다. 왜 미모를 저렇게 써먹냐.”

진짜 안타까워서 마음속 말이 절로 나왔다.

“오, 그대도 내 외모가 마음에 든 거? 그럼 그대의 한 송이 해바라기가 되어 그대가 차분히 감상할 수 있도록 그대라는 해를 좇겠어.”

해바라기고 나발이고. 중지를 세워 보이고 메스키트를 방패 삼아 빠른 걸음을 했다.

엮이지 말자, 이상한 놈이야. 오염된 마음을 정화하기 위해 엘더를 열심히 봤다. 그래, 우리 엘더가 최고지. 다시는 한 눈 안 팔게. 내가 미쳤지.

16번째 테라리움엔 이상한 놈들이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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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터 버전(Alter 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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