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1화 (111/604)

그때 여관 로비에 날 찾는 사람이 있다는 말을 점원이 전해 주었다. 누굴까? 혹시 칼롱?

“저 잠시만 다녀올게요.”

“네, 천천히 다녀오세요. 저흰 제이 님의 의뢰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을게요!”

이리스의 파티가 내가 맡길 의뢰 예정 목록을 토대로 스케줄과 동선을 짜고 있는 것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가 제이인데여. 절 찾는 분이 누구시죠?”

로비의 문 앞에 서 있던 정장차림의 남자가 내게 다가와 허리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제이 님. 제 고용주께서 제이 님과의 면담을 원하셔서 이렇게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고용주께선 5번째 테라리움을 거점으로 다양한 테라리움에서 활동하는 황금 호박 상회의 대주인이십니다.”

“대단해 보이는 사람 같은데 전 왜요?”

“제이 님의 보스께서 혹하실 만한 사업 아이템이 있어서 제안을 드리고자 하십니다.”

보스라고 하는 걸 보니 28번째 테라리움을 경매하는 자리에 있던 사람 중 한 명인가 보다. 제안은 이곳 행정 관리원이 중계하여 받기로 했는데 왜 날 따로 찾아왔지?

“18번째 테라리움의 과수원엔 따로 찾아가기로 했는데 왜 따로 보려는 걸까요? 흐음… 아!”

경쟁자보다 먼저 거래를 선점하겠다는 거구나? 경매 때 다들 득달같이 서로 물고 뜯긴 했지.

한번 받아 주면 다 따로 날 찾아올 위험이 있어서 싫었다. 그냥 일정 잡고 한꺼번에 보는 것이 낫지. 이곳 행정 관리원과 해결할 일도 있어서 과수원은 빠른 시일 내에 방문하긴 해야 하니까.

그에게 거절 의사를 말하려는데 로비로 들어서던 정장 차림의 여성이 이쪽을 보고 매서운 눈을 했다. 정확히는 내 앞의 남자를 향한 눈이었다. 온갖 혐오와 경멸이 담겨 있는 눈치였다.

님, 저분께 뭐 죄지었어요?

그녀는 맹렬한 걸음으로 다가왔다.

“욕심이 돼지처럼 그득그득한 늙은 호박에서 보냈구나? 감히 거래를 가로채려 하다니!”

“그러는 그쪽은 이빨 빠진 옥수수 사람 아닙니까? 보아하니 제이 님께 따로 면담 일정을 잡으려고 한 것 같은데 도착한 시간만 다를 뿐 같은 생각인 게 분명하군요. 보석상 이름이 옥수수라니. 끔찍한 네이밍 센스만큼 하는 짓도 끔찍하군요.”

“누가 할 소릴!”

둘은 날 멀뚱히 세워 두고 개와 고양이처럼 싸우기 시작했다. 소란에 점원들이 여럿 이쪽으로 달려와 말렸다.

“귀하신 고객분들이 많이 쉬고 계시는 곳입니다. 체통을 지켜 주세요.”

점원 중 가장 높은 지위로 보이는 사람이 출동하여 한마디 하자 둘은 말싸움을 멈췄다. 다만 서로를 노려보는 것으로 보아 속으로 어떤 쌍욕을 주거니 받거니 하고 있을지는 모를 일이었다.

“안녕하세요, 제이 님. 전 보석 상회 주얼리 콘의 소속으로 저희 사장님께서 따로 제이 님과의 면담을 희망하시기에 이렇게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그 어떤 제안이라도 저 늙은 호박보다 잘해 드릴 수 있음을 자부합니다.”

“일개 보석상 따위가 전 잡화를 취급하는 우리 황금 호박에 될 것 같아?”

둘 사이에 다시 전란의 기운이 돌기 시작했다.

“아니 저는 따로 만날 생각이….”

“안녕하세요, 제이 님.”

이번엔 또 누구야? 또 누가 끼어들어 싸움이 커지나 싶었는데 다행히 여관의 맞춤 유니폼을 입은 점원이었다.

그가 고급스럽고 빳빳한 편지봉투 하나를 내게 건넸다. 왁스 실링에 콩알이 알알이 박힌 콩깍지 문양이 찍혀 있었다. 호박이 나오고 옥수수가 나오더니 이젠 콩이 나오네? 뭐 하는 작물들이야. 왜 하나같이….

“아니 그건!”

“좀생이 쥐콩 놈들의 인장 아닙니까? 근본도 없는 놈들이 어딜 감히!”

작물들끼리 사이가 극악이네. 봉투를 열어 편지를 보았다. 안녕하세요, 제이 님. 저희는 그레이트 빈 연합입니다, 로 시작해서 저들처럼 따로 만나고 싶다는 말을 글로 표현했을 뿐이었다.

“이렇게 내버려 뒀다간 밑도 끝도 없이 대면 신청하겠네요. 확실히 말할게요. 따로 누군가와 만날 생각은 없어요. 제안서는 그때 이야기됐던 것처럼 18번째 행정 관리원 측으로 보내 주시고 회의를 원한다면 역시 과수원의 회의실에서 하겠어요. 안 그래도 조만간 과수원에 들르려고 했으나 이렇게 안달 난 걸 보면 일정을 빨리 잡는 게 좋겠죠? 오늘 방문할 거예요. 오늘 저녁 식사 후가 좋겠네요. 당신들의 고용주들이 참여하든 말든 알아서 결정하라고 해 주세요. 제안서만 보는 것도 상관없으니까.”

내 말에 둘은 인사를 하곤 바삐 사라졌다. 인기인이 된 기분이야. 아주 여기저기서 만나 달라고 난리네.

식당으로 돌아가 식후 디저트를 즐기고 있을 때, 이번엔 행정 관리원 측의 사람이 와서 일정을 잡았다고 전해 주었다.

과수원에 들르기 전에 연금탑을 먼저 방문할 생각이었다. 필라와 루프를 만나고 내 총의 탄환을 만든 연금술사도 만나기 위해서였다.

이리스의 파티가 동행할 필요는 없으니 자리를 뜨기 전 그들에게 활동 지원금을 명목으로 다이아를 가득 안겨 주었다.

“전에 말했던 것처럼 각자 벌을 마련해 두는 것이 좋겠어요. 저는 말벌을 쓰고 있긴 한데 이건 일대일 통신밖에 되지 않으니까요.”

“와… 드디어 꿀벌을 사용해 보는 때가 오다니….”

그들은 이젠 길드에 가입한 후라서 합리화가 쉽기 때문인지 많은 다이아를 꽤 덤덤하게 받아들였다.

“그리고 벌을 사고 나면 노토스를 제외한 세 분은 드라이어드 열매를 사시는 게 어때요? 운 좋게 바곳 같은 회복형 드라이어드를 얻을 수 있을지 모르니까요.”

“확실히 그런 특수한 회복의 힘을 사용하는 드라이어드가 있으면 좋겠다고 어제 일로 느꼈어요. 하지만 지금은 열매철이 아니라 앞 번호대의 과수원은 열매가 다 떨어졌을 거예요. 의뢰를 위해 뒤 번호대 테라리움으로 내려가면 알아볼게요. 아니면 설익은 열매를 마련해서 돌아다녀 보겠습니다!”

다이아를 넘기고 난 후에 각자 볼일이 있어서 여관 밖에서 헤어졌다.

헤어지기 전 이리스가 아티팩트로 드라이어드 몇을 돌려보내는 것은 어떠냐고 제안했는데 돌아가겠다고 나서는 드라이어드도 없을뿐더러 같이 다니는 것이 익숙하여 내버려 두기로 했다.

높은 등급의 드라이어드를 골라서 공격하는 사람들에 대한 소문은 조금 무서웠지만 메스키트가 다 이겨 줄 거란 믿음이 있었다. 비장의 패를 숨기는 전략도 좋지만 애초에 완전 세 보이는 애들을 끌고 다니면서 감히 덤빌 생각 못 하게 기선 제압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연금탑에 도착하니 입구에서 막아섰던 때와 다르게 극진한 환영을 받았다. 이게 바로 Tree 1단계의 위엄이었다.

안내 데스크에 무기 상점 주인의 소개장을 건네니 해당 연금술사가 마침 재중이라 면담 일정을 금방 잡아 주겠다고 했다.

기다릴 동안 필라를 만나러 그의 연구실로 향했다. 여기도 계단이 참 많아. 왜 엘리베이터가 없는 거람. 이것저것 뚝딱 잘도 만들어 내는 사람들이 말이야.

가는 길에 익숙한 얼굴들이 내게 인사를 해 왔다. 아티팩트 공방에서 합성 연금 의뢰를 하던 사람들이었다. 그날 좀비 같은 얼굴로 죽어 가던 사람들이 지금은 무척이나 밝아 보였다. 다이아를 잔뜩 벌었나 보군.

필라의 연구실에 도착해 똑똑 문을 두드리자 문 너머로 그가 대답했다.

“누구세요?”

“제이입니다.”

“아이고 어르신!”

문이 활짝 열리고 그가 반겨 주었다. 그런데 저번에 방문했을 땐 돼지우리처럼 더러웠던 그의 연구실이 텅 비어 있었다.

짐을 한쪽에 잔뜩 쌓인 상자들에 죄다 쑤셔 박았는지 상자들이 저마다 터질 것처럼 부풀어 올라 내용물의 끝자락을 내보였다. 마치 이사를 준비하는 모양새였다.

“연구실 옮겨?”

“저번에 어르신께서 제안해 주시지 않았습니까? 28번째 테라리움으로 이주하는 것은 어떠냐고. 그래서 동료의 꿀벌을 빌려 가족들에게 연락을 했더니 너무 좋다며 당장이라도 이사하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번호가 큰 테라리움 중 불에 전소당한 곳이 있다는 소문에 주변이 흉흉하고 장사도 잘 안된대요. 빨리 앞 번호로 가고 싶으시다고…. 그래서 이렇게 미리 준비 중이었습니다!”

“와, 잘됐네!”

“네! 드디어 오랜 꿈이 이뤄졌어요! 다행히 드루이드인 동생이 동료들과 함께 가족들의 이사를 도와주겠다고 해서 루프 쪽보단 사정이 낫습니다. 그런데 어르신, 옆방 놈이 얼마나 고약한지 아십니까? 글쎄 벌을 빌리는데 다이아를 얼마나 많이 요구하던지. 메시지 글자당 다이아를 요구하질 않나, 전달하려는 테라리움이 멀다며 추가금을 요구하질 않나! 이건 분명 제가 발명품으로 큰 다이아를 벌었다는 사실이 새어 나간 것이 분명해요. 대체 어떻게 알아챈 건지!”

나보다 다이아도 잘 벌면서! 필라가 왼쪽 벽을 바라보며 발을 쿵쿵 굴렸다. 가족들의 이주 준비 외에 루프를 따라가는 것도 그의 목적 중 하나 것 같았다.

“그런데 연금탑에선 네가 나가는 거에 별말 없었어? 그… 돈 많은 사람들이 연구원들을 빼 가는 걸 경계한다며?”

“네, 전 계속 성과를 못 내서 강등이 예정되어 있었고 언제 쫓겨나도 할 말 없었던 상태였으니까요. 오히려 루프 쪽에서 아예 연구원을 그만둔다고 하자 연금탑 학장들이 난리였어요. 5급인 저와 다르게 루프는 1급으로 예비 연금술사에 그것도 희귀한 벌레 연금술 전공이라 연금탑 입장에선 지적 재산 손실이거든요. 애초에 그렇게 절절맬 거면 연구비라도 든든하게 지원해 줘서 걔가 도박에 손대지 않게 해 주든가.”

“루프 역시 대단하네.”

“그렇죠? 아, 루프도 보러 오신 거죠? 걘 어르신이 주신 다이아로 도박 빚 갚고 벌도 사서 가족들과 상의 이미 끝났을 거예요. 루프 금방 불러올게요!”

잠시 뒤 루프가 필라와 함께 나타났다.

“어르신!”

처음 봤을 땐 몰골이 정말 말이 아니었는데, 오랜 시간 동안 그녀를 괴롭히던 문제가 해결되어서인지 말쑥해져 있었다.

“그냥 제이라고 불러도 돼요.”

“아, 얘가 어르신이라고 하니까 저도 입에 붙어서…. 이주 건을 가족들에게 모두 전달했고 다들 동의했어요! 다만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가족 중에 연로하신 할아버지가 계셔서….”

나는 이사를 호위해 줄 이리스의 파티에 대해 말해 주었다. 또한 필라 가족의 이주도 결정되었으니 물자 호송 의뢰건보다 이주민 호송 의뢰 건을 앞당기면 둘의 이주 시기를 맞출 수 있을 것 같았다.

루프는 59번째 테라리움, 필라는 42번째 테라리움이니 42번째까지 먼저 호송 후 거기서 합류하여 함께 이동하면 딱일 것 같았다.

호위 인력은 정해졌으니 다음은 운송 수단이 되는 마차였다.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과수원으로 갈 예정이었다. 그때 필라의 연구실에 사람이 찾아왔다. 내가 안내 데스크에 부탁한 연금술사 면담 건에 대해 알려 주기 위해서였다.

내 총의 총알을 만든 연금술사와의 면담이 끝나면 같이 저녁 식사나 함께하자고 했더니 둘 모두 흔쾌히 승낙했다. 엄청난 만찬을 기대한다며 기뻐하는 필라에게 루프가 눈치를 주었다.

그들과 인사하며 필라의 연구실을 나섰다. 그 연금술사는 어떤 사람일까?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