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사하는 내내 제퍼가 활발하게 길드명을 제의했다. 마치 상사에게 과하게 아부하는 직원처럼 해괴한 이름들이 나왔다. ‘제이와 똘마니들’이라든가 ‘제이 교단’, ‘제이파’, ‘제이랜드’ 등, 하나같이 내 마음에 들지 않는 것뿐이지만.
시종일관 제퍼를 타박하던 이리스마저 슬쩍 고개를 끄덕여서 충격이었다.
“제 이름은 좀 빼 주세요. 민망해요.”
“그래, 넌 어떻게 생각이 그렇게 일차원적이야?”
이리스가 뒤늦게 나를 편들어 제퍼를 타박했다. 아니 분명 제퍼에게 동의하셨잖아여?
“음, 그럼 이건 어떤가 싶은디….”
조용히 생각에 잠겨 있던 헤르마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유별나게 팀 내에 모체의 신화를 따르는 드라이어드들이 많다 보니 공부를 좀 하다 알게 된 단어인디….”
제퍼가 남성이라 본인의 드루이드랑 사이가 좋지 않은 히아신스 드라이어드나 만약 여성형이었다면 헤르마와도 사이가 좋지 않았을 월계수 드라이어드의 이야기였다.
“아, 맞아. 히아신스를 첫 개화했을 때 왜 나를 그렇게 싫어하는지 말해 주지 않아서 진짜 애먹었잖아. 그래서 다 같이 정보를 찾아다녔고! 나중에 헤르마가 개화시킨 월계수가 아니었다면 신화에 대한 힌트도 못 얻었을 거야. 모체의 신화는 같은 종들밖에 알지 못하니 다른 종의 드라이어드들에게 물어봐도 모르고. 히아신스가 날 싫어하는 게 설마 모체의 계승 신화 때문일 줄은 꿈에도 몰랐지.”
제퍼가 헤르마의 말에 맞장구를 치며 말했다. 이리스가 뒤이어 설명해 주었다.
“그런데 히아신스나 월계수가 레어 등급이라 희귀한 탓에 모체의 신화에 대한 자료를 찾는 것이 쉽지 않았어요. 애초에 모체의 신화는 드라이어드들이 입을 열지 않는 한 알기 힘든 것이라 일반인은 절대 알 수 없고, 신화가 계승되지 않는 드라이어드도 많거든요. 드라이어드의 종은 아주 많고 드루이드의 수는 한정적이며, 그런 드루이드들도 다들 저마다 할 일에 바쁘니 굳이 드라이어드들의 모체의 신화를 조사해 자료를 넘기는 자들도 없는 편이죠. 있다 하더라도 테라리움 곳곳에 흩어져 있어요. 원하는 정보를 얻기 위해 신화에 대한 모든 자료를 닥치는 대로 전부 공부해야만 했어요.”
“다이아도 많이 들었지….”
고생했겠다고 생각하며 그들의 열정을 향해 작게 박수를 쳐 주었다. 묵묵히 기다리던 헤르마가 이제 자신이 말해도 되냐며 질린 표정으로 제퍼와 이리스를 바라보았다. 중간에 둘이 수다스럽게 대화의 주제를 가로채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닌 걸로 보였다.
“그래서 우연히 알게 됐지만 아주 나이가 많은 드라이어드들은 예로부터 세계수를 ‘가이아(Gaia)’나 ‘테라(Terra)’로 불렀다고 해서 말인디…. 테라는 테라리움과 헷갈릴 수 있으니 길드 이름으로 ‘가이아’가 어떤가 싶은디.”
내 뒤에 서 있던 메스키트가 “가이아라…, 그렇게 불렀던 때도 있었죠.” 하고 작게 말했다. 아주 나이가 많은 드라이어드들이나 아는 단어라고 하는데 메스키트는 대체 몇 살이야? 엘더도 잘 모르는 눈치인 걸 보니 정말 오래된 단어인가 보다.
등을 돌려 메스키트를 바라보니 내게 작게 미소 지었다. 그 웃음이 꼭 ‘비밀이에요.’ 하고 말하는 것 같았다.
“가이아란 이름이 거창하긴 한데 굳이 세계수의 옛 명칭을 쓰려는 이유는 뭐야?”
가이아라… 가이아, 하며 반복적으로 되뇌던 이리스가 물었다.
“네가 끼어들지 않았다면 진작 설명했겠는디. 세계수란 이름이 자리 잡히기 전, 생명의 잉태나 시작의 땅, 태초의 어머니 등이 담긴 뜻으로 가이아를 사용했다는디. 제이 님께 전해 들은 복원이 진행 중인 새롭게 일어날 28번째 테라리움이나 그 테라리움에서 새롭게 시작하는 전속 길드란 의미로 좋을 것 같아서.”
“오! 느낌 있다!”
제퍼에게 제안받은 길드명들보다 훨씬 멋있었다. 창의력이 부족해 보이는 제퍼나 제퍼의 제안에 흔들리는 이리스나 딱히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노토스를 보면, 더 들어 볼 것도 없이 헤르마의 제안보다 괜찮은 길드명이 나올 것 같지 않았다.
“그 오래된 이름과 뜻을 용케 알게 되었네요. 가이아라, 나의 세계수인 제이에게 무척이나 잘 맞는 이름이에요.”
무엇보다도 메스키트가 마음에 들어 하는 눈치였다. 그럼 확정이었다.
“좋아요! 우리 길드명은 ‘가이아’로 해요! 이제부터 가이아 길드가 되는 거예요.”
“어… 더 고민해 보진 않는 건감.”
헤르마는 자신의 제안이 단번에 승인되자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깔끔하게 세 글자 좋네. 핸드폰의 화면을 넘겨 길드명을 설정하는 곳에 가이아를 적어 넣었다.
가드너 등급은 전에 다른 테라리움들과 유사하게 작성해 둔 것을 대충 적용시키고 길드 룸의 역할을 하는 스톤헨지를 과수원 내의 전 행정 관리원의 집무실로 설정하자 금방 길드가 설립되었다.
그때였다. 심장이 빠르게 뛰며 온몸이 따뜻하게 달아올랐다. 갑자기 핸드폰에서 빛이 터져 나오며 주변이 새하얗게 잠식되었다.
내가 있던 여관 식당이 아닌 끝없이 초원이 펼쳐진 환영이 보였다. 발목까지도 오지 않는 키가 낮은 연한 녹색의 풀들이 빼곡하게 깔려 있었다. 지평선이 보일 정도로 풀 말고 아무것도 없는, 조금 외로운 느낌이 드는 초원이었다.
뒤이어 등 뒤에 아주 묵직한 존재감을 발산하는 무언가가 느껴졌다. 이건 언젠가의 꿈에서 한 번 느껴 본 감각이었다.
뒤를 돌아보자 아주 거대한 나무가 높은 곳에 우뚝 서 있었다. 하늘을 전부 뒤덮는 가지, 백옥처럼 새하얗게 빛나는 목질. 내게 쏟아지는 눈부신 새하얀 빛을 모두 나무가 뿜어내는 것처럼 보였다. 꿈에서 본 적 있는 세계수의 모습이었다.
“그 이름을 잇는 자….”
성별을 가늠할 수 없는 중성적인 목소리가 사방에서 울려 퍼졌다. 가슴을 절절 메우는 거룩한 목소리였다.
“모든 것이 태어나고 모든 것이 시작하는 축복을….”
갑자기 땅이 크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이리저리 몸이 휘청거릴 법도 한데 이상하게 마치 공중에 몸이 붕 떠 있는 것처럼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았다.
땅이 갈라지는 소리가 났다. 내가 처음에 바라본 넓은 초원 방향에서 커다랗고 길쭉한 바위들이 솟아오르는 것이 보였다. 내 키의 10배는 더 되어 보이는 바위가 10개 있었다. 그것들은 중앙을 기점으로 둥글게 모여 자리했다.
그 바위들을 신기하게 바라보는데 다시 한번 빛이 시야를 가렸다. 어느새 다시 여관의 식당이 보였다.
방금 그건 뭐였지? 나만 그걸 본 건가? 난 여전히 접시가 치워지지 않은 테이블 앞에 앉아 핸드폰을 들고 있는 채였다.
“‘제이랜드’도 꽤 괜찮지 않았어요? 제이 님이 다이아로 굽어살피는 곳이란 뜻이었는데. 저도 나름대로 의미 있는 이름이었다고요!”
제퍼가 아무렇지 않게 말을 걸었다. 내가 길드 이름을 정했던 순간부터 자연스럽게 대화가 이어지는 것을 보니, 환영 속에서 시간을 보냈던 것은 아주 잠시였던 것 같았다.
“아… 어… 하얀 빛이… 혹시 길드 만들 때 무슨 특별한 이벤트가 생긴다는 소리는 못 들어 보셨나요?”
“아뇨, 딱히 들어 본 적 없어요! 앗 길드 생성되었나요? 저희도 받아 주세요!”
꽤 거창한 길드 생성 영상을 시청한 기분인데. 세계수도 특별 출연하고. 평범한 거였나?
이리스의 파티를 길드에 가입시키기 위해 길드 화면을 둘러보는데 좀 전과 다르게 화면이 바뀌어 있었다. 또한 못 보던 금색 문구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가이아] 세계수의 28번째 테라리움 전속 길드
길드 마스터: 제이 / 부길드 마스터: (공석)
길드원: (공석)
세계수의 가지에 속한 길드에 특별한 인연으로 세계수의 축복이 닿았습니다.
길드 특성: 성장 촉진
길드에 속한 드루이드와 드라이어드가 축복을 받아 더욱 빠르게 성장할 수 있습니다.
영혼의 크기가 작은 드루이드와 어린 드라이어드일수록 더욱 많은 보너스를 받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