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스전을 끝내고 나니 가막살나무의 영입으로 조금 답답했던 가슴이 뻥 뚫리는 것이 느껴졌다. 레벨 업의 신호였다. 하지만 이전까지 거대한 불을 해치우고 난 후 느끼는 것보단 아무래도 좀 덜했다.
훌쩍 자란 바곳을 바라보았다. 바곳이 자라며 COST가 늘어난 탓일까? 아니면 내 레벨이 높아져 폭업이 불가능해진 것일까?
“이것 좀 봐, 다이아가 하나 있는디… 아무래도 불이 삼켰다던 그 드라이어드의 것 같은디.”
가막살나무가 비틀거리며 헤르마에게 다가가는 것이 보였다. 헤르마는 군말 없이 가막살나무에게 다이아를 넘겨주었다. 그가 아픈 얼굴을 하며 두 손으로 다이아를 꼭 쥐었다.
“꽤 힘든 싸움을 한 것치고 얻은 것이 없는디. 보통 그 정도 크기의 불이면 뭐라도 떨어뜨리는디”
“무슨 소리야? 얻은 게 왜 없어? 우리 길드 입단 테스트에 합격했다고! 무려 테라리움 전속 길드야!”
“정말 합격했어? 제이 님! 개처럼 일할게요! 부디 다이아만 많이 주세요!”
“넌 그것밖에 안 보이지? 우릴 뭐라고 생각하겠어?”
잠시나마 멋있어 보이던 제퍼의 평가가 다시 돌아왔다. 이리스는 이미지를 생각하라며 제퍼를 타박하기 시작했다.
아티팩트를 뒤덮고 있던 검은 재들도 사라졌다. 민들레 아이들을 먼저 돌려보냈다. 아이들은 훌쩍 자란 바곳의 옷을 잡아당기며 신기해하다 얌전히 돌아갔다.
겁쟁이 울보였는데 이젠 의젓해진 바곳이 대견했다. 문득 바곳의 후드에서 흔들거리는 스태프 조각이 눈에 띄었다. 이젠 이걸 뽑아도 안 울겠지? 망설여졌지만 너무 궁금해서 참기 힘들었다. 만약 수류탄이 터진다 해도 다들 한 파티니까….
“바곳, 나 이거 뽑아 본다? 이제 안 울지?”
바곳이 애매하게 웃었다. 스태프 조각의 줄기를 잡고 다시 멈칫했지만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힘을 주어 뽑았다. 갑자기 풀썩 바곳이 품에 안겨 왔다. 아이일 때와는 힘의 차이가 다르니 몸이 절로 휘청거렸다.
“역시… 버티긴 힘들어요. 그래도 이젠 참을 수 있어요.”
스태프 조각을 뽑은 상태의 바곳은 홀로 죽음의 늪에 남겨졌을 때의 기억이 지배하는 바곳. 그때의 기억을 이겨 내고 어느 정도 힘을 제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아이고 대견하다, 대견해! 바곳을 마주 안아 주었다.
“잘 자라긴 했지만 아직 더 노력해야겠군요.”
바곳을 훈계할 때와 달리 메스키트의 목소리는 많이 풀어져 있었다.
“그리고 이건 이제 이렇게 보관할게요.”
바곳은 그렇게 말하며 내게서 스태프 조각을 빼앗아 갔다. 그러곤 자신의 스태프의 상단에 꽂았다. 스태프 조각의 아래에서 뿌리 같은 것이 자라나더니 이윽고 바곳의 스태프 상단을 덮었다. 단순히 민들레 꽃씨를 닮았다고 생각했는데 진짜 꽃씨였을 줄이야. 뿌리가 감싸는 것을 멈추더니 하얀 솜털 부분이 떨어져 나갔다. 그러곤 작고 노란 민들레 꽃이 피어났다. 정말 신기한 광경이었다.
“이 꽃이 이렇게 봉오리를 오므리면 제이 님이 원하는 대로 제 능력을 변화시킬 수 있어요.”
그러곤 잠시 뒤 꽃이 피기 전의 모습처럼 봉오리를 오므렸다. 바곳은 다시 내 품에 바르작거리며 안겨 왔다. 아이, 귀엽당. 좀 더 커다래진 남동생이 생긴 것 같아 마냥 귀여웠다.
“이제 그만 돌아갈까요?”
내 말에 다들 기지개를 켜거나 몸을 풀며 빨리 여관으로 돌아가 쉬고 싶다고 아우성이었다.
“가막살나무는 28번째 테라리움으로 갈 거지? 앞으로 잘 부탁해.”
아티팩트를 달고 있는 손목을 내밀자 그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러곤 눈부신 빛과 함께 사라졌다. 데이지2에게 설명이라도 해 줬어야 하는 걸까? 하지만 이미 아티팩트로 가 버린 후였으니 늦었다. 알아서 잘 하겠지.
“어떻게 그 드라이어드를 설득한 거예요? 진짜 까다로워 보이던데.”
이리스가 저먼 아이리스만 남기고 모든 드라이어드를 아티팩트로 돌려보내며 물었다.
18번째 테라리움으로 되돌아가며 가막살나무가 했던 이야기를 전해 주었다. 스케어크로우의 이야기를 자세히 풀기엔 28번째 테라리움이 당한 사건에 깊게 관여되어 있어 적당히 각색해서 말했다.
그녀는 그런 우연이 다 있냐며 무척 신기해했다. 오히려 제가 가막살나무 군락지를 보고도 연관성을 늦게 떠올린 거였더라고요.
이렇게 돌아가는 길이 마냥 평화로울 줄 알았는데 갑자기 메스키트가 앞을 막아섰다.
“아, 저희가 요란하긴 했죠. 동선을 어지럽혀 놨지만 불과의 전투가 워낙 컸으니 눈치를 챘나 봐요. 그래도 이렇게 시간이 걸린 걸 보면 히아신스와 월계수의 힘이 아주 제대로 먹혔나 보죠?”
이리스가 아티팩트를 문지르며 말했다. 그녀는 돌려보냈던 드라이어드들을 언제라도 다시 불러올 수 있도록 대비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어… 설마?”
“네, 제이 님을 쫓고 있다던 그 조직들이 이 앞에 있는 것이 분명해요. 어떡하죠? 돌아가기엔 너무 늦은 것 같은데.”
메스키트가 방패가 아닌 랜스를 들었다. 그와 동시에 덤불이 흔들리며 후드 로브를 뒤집어쓴 사람들이 나타났다.
“같잖은 함정을 설치했더군.”
“그런 함정에 빠져서 여태 헤맨 게 너희들 아냐?”
이리스가 날 자신의 뒤로 물리며 앞으로 나섰다. 그녀와 함께 다른 이들도 날 보호하며 섰다.
“드디어 찾았군. 카나비스 드라이어드는 어디에 있지?”
“이미 주인 찾아 줬는뎅?”
능청스러운 내 목소리에 후드 안에서 이가 빠득 갈리는 소리가 들렸다.
“배신자는 어딨지? 그에게 우리에 대해 어디까지 들었지?”
“아니 그렇게 묻는다고 곧이곧대로 답해 줄 사람이 어딨는지, 참.”
“곱게 보내 줄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그가 손짓하자 드라이어드들이 나섰다. 수로 보아 우리 쪽과 비슷해 보였다.
“그렇게 저항력이 없는 드라이어드들을 꺼내서 되겠어? 굳이 아티팩트의 필드를 불러오지 않아도 상대가 안 될 것 같은데?”
이리스의 파티엔 디버프를 걸 수 있는 지원형 드라이어드가 많았다. 그녀의 말로 유추해 보건대 좀 전의 우리처럼 디버프를 해제할 수 있는 드라이어드가 그들에겐 없는 것 같았다.
“물론 그 힘을 사용하기 전에 너희들을 묶으면 되지. 또한 혼란의 능력에 저항할 수 있는 힘은 만일을 위해 아껴 뒀을 뿐이다.”
갑자기 뜨거운 기운이 훅 끼쳐 왔다. 나를 포함해 다들 혼비백산하며 물러났다. 갑자기 이 타이밍에 불이 나타났다고? 그런데 불길이 퍼져 온 곳은 놀랍게도 반대편 적들에게서였다.
“대체 뭐야? 단순히 불을 섬기는 조직인 줄 알았는데 불의 힘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고? 저런 경우는 본 적 없어!”
“당연하지. 이 능력을 보고도 살아남은 사람은 없으니까. 우린 너흴 살려 보낼 마음이 없다.”
“역시 이상했어! 드루이드가 아닌 일반인이 왜 섞여 있나 했는데!”
제퍼가 이리스를 붙잡고 자신의 의심이 정당하다며 소리치다 발길질을 당했다. 그나저나 몬스터 불이 아니라 사람이 불 마법도 사용할 수 있는 거였어?
단순히 무기만 휘두르는 것이 아니라 마법이라니! 마법사가 있다면 분명 무슨 소식이든 얻어들었을 법한데 처음 알게 된 사실이었다. 저기요! 전직은 어디서 하나요? 화염 마법사밖에 없나요?
드루이드들을 향해 산발적으로 불길이 솟구쳐 오고 드라이어드들끼린 전투가 벌어졌다. 무지막지하게 쏟아지는 공격들을 보며 새삼 민들레 아이들을 아티팩트로 미리 돌려보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원형 드라이어드들과 우리들에게만 집중적으로 불을 뿜는 것을 보니 디버프를 사용할 틈을 주지 않으려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들의 생각처럼 호락호락하게 당해 줄 마음은 없었다.
메스키트에게 소나무들이 능력을 사용하자 그녀는 모래 방패를 두르고 모든 공격을 혼자 맞으며 다른 드라이어드들이 움직일 틈을 만들어 주었다.
전투가 벌어짐과 동시에 이리스가 아티팩트에서 불러낸 란타나가 빙글 꽃 우산을 돌리자 아주 진한 향기가 풍겨 나왔다. 적들에게 일곱 빛깔의 무지개 같은 꽃잎이 고리처럼 둘러졌다.
“오, 저게 무슨 능력이에요?”
“앞으로 일곱 번, 저들은 마음대로 행동할 수 없어요.”
보스전에서 란타나가 힘을 사용했을 때, 불의 움직임이 더디었던 것은 그녀의 힘 때문이었던 것 같다.
뒤이어 히아신스와 지원형으로 턴 오버 한 월계수가 힘을 사용했다. 월계수 묘목과 히아신스 꽃이 어우러져 피어나자 코가 매울 정도로 꽃향기의 자극이 강해졌다.
그때였다. 쩡! 하고 유리창 깨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적들의 뒤로 매서운 뱀의 눈 환영이 나타났다. 리더로 보이는 남자의 손에 완전히 박살 난 유리 조각들이 보였다. 그것들이 피부를 뚫고 깊은 상처를 냈어도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적들은 모두 입가에 가느다란 검은 핏줄기를 흘리며 기괴하게 웃었다.
“아아… 카나비스를 데려갔으면 이처럼 좋은 각성제가 되었을 텐데 말이야, 쿨럭.”
드라이어드들의 디버프로 그들이 정신을 못 차릴 거라 예상했던 것과 달리 공격은 멈추지 않았다.
“스스로에게 독이라도 쓴 것 같은데? 이야, 하나같이 지독한 새끼들만 모여 있네.”
이리스가 내 마음이라도 읽은 것처럼 아주 신랄하게 말을 뱉었다.
“어차피 소모전으로 간다면 이 상태에선 우리가 유리한디.”
그러나 헤르마의 예상과는 달리 적들은 유리로 만든 무언가를 깨뜨린 후부터 기세가 더욱 강해졌다. 우리를 향해 쇄도해 오는 불의 공격도 마찬가지였다.
설상가상으로 주변 마른 나무들에 불이 옮겨붙으며 불바다가 되어가고 있었다. 너 죽고 나 죽자는 심정으로 달려드는 느낌이었다.
“와! 이 불은 끌 수 있다! 야, 백날 쏴 봐라!”
웃기게도 몬스터 불과 달리 마법사들이 사용한 불은 내 투척용 소화기 총에 진압이 되었다. 총알이 터져 나간 주변으로 둥글게 하얀 수증기가 일며 불이 꺼졌다. 실시간으로 비싼 총알이 뭉텅뭉텅 땅을 향해 떨어졌다.
드디어 도움이 된다는 생각에 마구잡이로 발사했다. 손목이 조금 뻐근한 느낌이 들었다. 진짜 백날 쏘면 안 되는데. 총알 그렇게 많이 없는데…. 강짜를 부린 것이 조금 후회되기도 하고….
내 말이 끝남과 동시에 저쪽에서 한발 빠르게 아티팩트의 필드를 불러와 영역 선포를 하는 것이 보였다.
뜨겁고 강한 바람이 불어오며 투명한 반구가 이 일대를 덮었다. 동시에 발밑에 거친 사막의 모래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이리스의 트로피칼 필드와 겨뤘던 데저트 필드였다.
하지만 저들은 실수했다. 우리 중 최강 드라이어드의 자생필드가 마침 데저트 필드였다. 디글럽타와 적당히 나눠서 어그로를 끌고 있던 메스키트는 마치 물 만난 물고기처럼 더욱 활개 치기 시작했다.
데저트 필드의 스페셜리스트를 처음 보니? 이래서 상대 드라이어드가 무엇인지 잘 알아야 한다는 것이 중요하다는 거군.
이리스는 메스키트를 보곤 구태여 아티팩트에서 필드를 불러오지 않았다. 메스키트가 혼자 방패와 랜스를 자유자재로 다루며 진열을 무너뜨리고 있었다.
위기 상황 속에서 미친 듯이 굴러가던 머리가 문득 기발한 생각을 떠올렸다.
“어? 잠깐만! 쟤, 혼란의 능력에 저항할 수 있다고 안 했어요? 중독이랑 혼란은 다른 개념이잖아!”
우리 애 이제 나름대로 자유자재로 능력 바꿀 수 있다! 죽음의 늪이라고 들어 봤냐! 우리 애 칭호가 무려 ‘독약의 왕’이다! 본때를 보여 주라며 아직 지원 회복형 상태였던 바곳을 잡아끌었다.
바곳은 날 보며 조금 망설였지만 이내 입을 굳게 다물고 스태프를 높이 들어 올렸다. 바곳의 스태프에 활짝 피어 있던 민들레 꽃봉오리가 다물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