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7화 (107/604)

디글럽타와 가막살나무가 두 개의 톱을 향해 뛰어들자 공격형 드라이어드들도 무기를 들고 나섰다.

이번에 이리스는 자리를 지켰다. 드라이어드들만큼 빠르게 몸을 뺄 능력이 없다는 이유 때문이다. 그녀는 활을 들고 있는 제퍼를 바라보며 자신도 원거리 공격이나 배울 걸, 하면서 아쉬워했다.

“쩨이 님, 죄송해요…. 저도 혼자가 아니라 둘이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바곳이 손을 맞잡고 있는 민들레 아이들을 보며 시무룩하게 말했다.

“어머, 왜 네가 혼자니. 자 이것 봐, 이렇게 하면 너도 둘이지?”

바곳의 작은 손을 꼭 잡아 주었다.

“그거 아니? 드라이어드와 드루이드는 함께 힘을 사용할 수 있는 기술도 있어. 난 엘더와 사용해 봤는데 언젠간 너와도 가능할 거야. 그래프트라는 건데 내 영혼에 드라이어드의 영혼의 가지를 접목시켜서 증폭된 힘을 사용할 수 있는 기술이래. 그러니까 내가 비록 너와 같은 바곳 드라이어드는 아니라도 네 가지를 맡길 수 있는 나무는 되어 줄 수 있어. 그러니 우리 바곳, 얼른 무럭무럭 자라자!”

아이의 손을 더 꼭 잡아 주었다. 아이는 한참이고 내 손을 바라보았다.

그 무렵 불 보스의 상태가 2페이즈로 접어들고 있었다. 재 가루가 공장 굴뚝의 매연처럼 뿜어져 나올 때쯤 이리스의 공략법대로 근접 공격 드라이어드들이 물러났다. 메스키트가 여태껏 굳건하게 버텨 준 것이 너무 다행일 따름이었다.

성문을 공격하는 공성 무기처럼 그녀의 방패를 불의 톱이 매섭게 내려쳤다. 저 톱은 디글럽타의 방패를 몇 개나 부숴 먹은 것이었다.

“연리지의 힘은 가볍게 볼 것이 아니란다. 나와 이 드라이어드처럼 서로를 자신의 몸처럼 생각해야 해.”

이리스가 혹시 도움이 될지 모르겠다며 노토스의 소나무 드라이어드들을 데려온 참이었다. 그들 역시 실명 디버프에 당해 앞이 보이지 않아 이리스가 팔을 잡아끄는 대로 얌전히 따라온 상태였다.

“비바람이 몰아쳐도 혼자일 때보다 함께 지탱하는 것이 더 잘 버틸 수 있지. 다만 한 쪽이 쓰러지면 그 반동으로 다른 한쪽도 쓰러지기 쉽단다. 그러니 연리지는 서로가 서로를 돕겠다는 마음으로 행해야 한단다.”

연리지 선배인 소나무들은 민들레 아이들에게 좋은 조언을 많이 해 주었다. 둘 중 하나가 왕이 되지 않는 한 필수 불가결로 둘은 함께해야 했다.

“서로가 서로를 돕겠다는 마음으로….”

바곳이 소나무 드라이어드의 말을 작게 따라 하며 중얼거렸다.

“저는 쩨이 님께 항상 도움받기만 하고… 제가 도움이 되지 않았어요.”

단지 내가 꼭 붙들고만 있을 뿐이던 아이의 손에 힘이 실리기 시작했다.

“제이, 메스키트가 돌아오는 게 좋겠어. 재를 뒤집어쓴 탓에 행동이 조금씩 느려지고 있어. 톱을 막는 것 외에 튀어나오는 불꽃도 막아야 하는데 시야가 좁아져서 힘들어 보여.”

엘더가 스태프로 메스키트를 가리키며 말했다.

“내 의견은 절대 듣지 않을 거야. 그러나 너의 말은 듣겠지. 그녀가 자리를 뜨지 않고 계속 버텨 주어야 하는 것이 이 전투에서 중요하지만 저대로 놔두면 큰 상처를 입을 수도 있어.”

“엘더 꼬맹아, 난 네가 걱정할 만큼 그렇게 약하지 않단다. 넌 그저 날 돕지 못해 조바심이 날 뿐이야. 그 조바심을 나의 제이에게도 옮기지 말렴.”

“쳇….”

메스키트의 말에 엘더가 이를 악물며 고개를 돌리는 것이 보였다. 그는 애써 메스키트 쪽을 바라보지 않으려 시선을 가막살나무에게 고정했다. 화풀이하듯 가막살나무에게 넘치는 힐링이 쏟아지는 것이 보였다.

공격형 드라이어드들이 불을 처치하는 것과 메스키트가 쓰러지는 것, 둘 다 시간문제였다. 분명 메스키트를 믿지만 드라이어드들의 공격이 거세지는 만큼 불의 저항도 상당했다.

쏟아지는 불꽃 세례가 공격형 드라이어드에게 미치지 않도록 막는 것도 방어형들의 임무였다. 가막살나무와 디글럽타 역시 메스키트처럼 재 가루 구름이 드리워진 상태였다.

그들은 공격형 드라이어드들처럼 몸을 뺄 수 없었기에 정면으로 바람에 날리는 재를 맞았다. 파나케이아의 효능도 다한 상태라 이제 정말 이쪽에선 손을 쓸 수 없는 지경이 왔다. 재 가루 구름은 시간이 갈수록 색이 짙어졌다.

불은 딜러들의 매서운 공격으로 형태가 많이 훼손된 상태였다. 조금만 더 하면, 조금만 더 버티면 끝을 볼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그것을 알기에 다들 공격을 더욱 열심히 하고 있었다. 이 악물고 덤빈다는 표현이 어울렸다.

쾅! 하고 메스키트 쪽에서 큰 소리가 났다. 불도 메스키트가 지쳐 가는 것을 느꼈는지 그녀를 타깃으로 맹공격을 퍼붓고 있었다. 메스키트의 표정에 처음으로 여유가 사라졌다. 내게 그녀가 되돌아오게 명령하라던 엘더는 이미 한 번 쓴소리를 들었던 터라 절절매는 표정으로 어쩌지도 못하고 이를 악물고 있었다.

엘더의 말처럼 정말 되돌아오라고 해야 하는 걸까?

“안 돼요, 제이. 조금만 더 버티면 됩니다. 제가 물러나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제게 부디 돌아오라고 하지 말아 주세요. 이 정도는 할 수 있답니다.”

그녀의 희생정신에 감명받은 모든 드라이어드가 시선을 고정했다.

“조금만 더 버텨 주세요! 제가 빨리 해치워 버릴게요!”

데이지가 단도를 고쳐 쥐고 뛰어다니며 말했다. 다른 공격형 드라이어드들도 이를 악물고 무기를 휘둘렀다.

메스키트가 쓰러지기 전에 반드시 결판을 내야 한다!

“그만해요… 소중한 나의 작은 세계수… 손에 피가 나잖아요. 제발 드라이어드들에게 맡겨 주세요.”

도깨비바늘의 애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활을 쏘는 제퍼의 팔을 힘없이 붙들며 사정하고 있었다.

“나라도 거들어야지! 활 연습하고 좋네! 이리스는 근접이라 위험하니 이 몸이 화살이라도 멀리서 쏴줘야 하지 않겠어? 나 멋있지? 나중에 내 드라이어드가 치료해 주면 돼.”

이리스에게 매번 타박받던 그가 처음으로 멋있어 보였다. 나도 저 사람처럼 공격이라도 거들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내가 겨우 마련한 총은 위기 탈출용이라 위력은 세지 않다고 하던 상점 주인의 말이 떠올랐다.

에잇, 그래도 뭐라도 하자! 총을 꺼내 메스키트에게 향한 불의 톱을 열심히 쐈다. 총알이 퍽퍽 터지며 수증기를 냈지만 별로 도움이 되는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날아다니는 불꽃을 맞히기엔 사격 실력이 좋지도 않았다.

모두가 한 가지 목표를 바라보며 열심히 임했다. 반드시 제때 불을 쓰러뜨려야만 한다!

절체절명의 상황이 급박하게 치닫던 그때였다. 코를 찌를 정도로 화한 산약초 향이 확 퍼져 나갔다. 보랏빛 꽃잎들이 날갯짓하는 나비처럼 휘날리며 시야를 가득 채웠다.

동시에 눅눅한 송진 냄새가 산약초 향과 어우러지며 메스키트가 짙은 녹색 빛으로 감싸이는 것이 보였다. 그녀의 주위로 가지가 붙은 두 개의 소나무 거목이 만개한 생명력으로 피어나는 환영이 보였다.

“세상에! 드라이어드들에게서 재 가루가 사라졌어요!”

얼굴 주위를 감싸며 드라이어드들을 귀찮게 했던 재 가루 구름이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저건 노토스의 소나무들의 능력이에요. 꽃말인 ‘장수’의 힘을 사용해 자신의 생명력을 다른 드라이어드들에게 옮길 수 있어요. 소나무들이 능력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는 건….”

메스키트의 피통을 뻥튀기시키는 능력? 지원형 소나무 드라이어드가 능력을 사용했다고? 설마?

이리스의 말소리에 맞춰 등을 돌렸다. 그곳엔 키가 훌쩍 자라 데이지만 해진 바곳이 있었다.

아기 같던 통통한 볼의 젖살이 사라지고 갸름한 소년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팔다리도 길어지고 늘 울상이던 눈이 차분하게 변해 있었다. 바닥에 질질 끌리고 손을 가릴 정도로 소매가 길던 펑퍼짐한 옷도 체형에 딱 맞게 줄어 하얀 손이 보였다.

“제이 님, 제가 도움이 될게요.”

나와 눈이 마주친 바곳이 살포시 웃었다. 높고 째지던 가냘픈 미성도 어느새 저음이 베이스로 깔린 힘 있는 목소리가 되었다.

실명 디버프가 해제되자마자 상황을 파악하려 뚝딱거리는 드루이드들에 반해 드라이어드들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사방에서 다양한 꽃향기가 튀는 것 없이 어우러지며 불 보스의 움직임을 제어하고 방어형 드라이어드에게 힘을 실어 주었다.

제대로 된 디버프 해제 능력만 있다면 불을 무리 없이 해치울 수 있을 것 같다던 예상은 맞았다. 지원형 드라이어드들이 가세하고 메스키트가 더 굳건해지자 불은 아주 빠른 속도로 진압되어 갔다.

그렇게 몇 번이나 재도전할 정도로 모두를 애먹였던 불은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으며 결국 사라졌다. 메스키트의 주위를 맴돌던 불덩이가 사라지고 그녀가 가볍게 방패를 털어 내자 다른 드라이어들이 일제히 긴장이 풀렸는지 폼이 무너졌다.

“완전 몰라보게 자랐는걸? 네가 정말 대견해!”

매번 내가 허리를 숙여야 했던 것과 달리 눈높이가 많이 높아져 있었다. 이젠 아이라 보기 힘든 바곳의 손을 붙잡자 조금은 서늘한 온도가 느껴졌다. 늘 주눅 들어 있던 어깨도 곧게 펴져 있었다.

적당한 컬로 굽이쳐 턱까지 내려오는 청보라색 머리칼이 바곳을 유약한 학자 같은 인상으로 만들었다. 제법 자라 선이 생긴 이목구비를 보니 여기서 더 자라면 엘더만큼은 아니더라도 꽤 잘생긴 미청년이 될 것 같았다.

“늦게 자라서 죄송해요.”

“아니 제때 자랐어! 완전 나이스 타이밍이었어!”

“정말 좋은 타이밍이었어요. 세상에, 갑자기 저 묘목 같던 드라이어드가 성장할 줄 어떻게 알았겠어요?”

이리스가 놀란 목소리로 거들었다.

“그나저나 저희도 드라이어드들의 저항력만 믿을 게 아니라 제이 님의 바곳처럼 특수한 힘을 사용하는 드라이어드가 필요하단 걸 깨달았어요. 힘을 크게 들일 전투도 아니었는데 너무 애먹었어요.”

아, 정말 저거 껌이었는데, 하면서 이리스가 입맛을 다셨다.

“여러분들과 같이 군락지를 찾아 나선 것이 다행이라 생각해요. 팀플레이에 대해서 많이 배웠는걸요?”

“아니에요, 오히려 저희들이 다행이라 생각해요. 유용했던 드라이어드는 전부 제이 님의 드라이어드였으니까요. 메스키트가 오래 버티지 못했다면, 바곳이 제때 힘을 사용하지 못했다면 언제까지고 이곳에 갇혀 있어야만 했을 거예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턱을 문질렀다.

“아, 길드 입단 테스트로 좋은 모습을 보여드려야 했는데 오히려 도움받기만 하고….”

“아니에요! 결과는 합격이에요! 잘하셨으면서 무슨 소리예요? 바곳 성장에 소나무들도 큰 도움이 되었고 다른 분들도 정말 멋진 모습을 보여 주셨어요!”

내가 나서서 스카우트해야 될 판인데 합격 불합격을 따질 여유는 없었다. 내가 홀로 하는 것보다 이리스 파티와 같이 든든한 사람들이 내 편이 되어 준다면 훨씬 좋다는 것을 배웠다.

더구나 그들은 성실하고 의리도 있어 보여서 믿을 만했다. 내 결정에 메스키트도 별말 없이 그저 작게 미소를 지어 줬다.

돌아가는 즉시 길드 건을 마무리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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