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6화 (106/604)

이리스가 파나케이아를 건넨 내 손을 붙잡아 밀며 말했다.

“엘더 플라워의 말이 맞아요, 제이 님. 노토스에겐 드라이어드가 둘이지만 제이 님께 드라이어드가 더 많고 메스키트를 우선해야 하니 제이 님이 약을 마셔요. 그리고….”

그녀가 민들레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조금이나마 가능성이 있는 건 민들레 드라이어드들이니 운 좋게 특수한 회복의 힘을 깨닫게 될 수 있지 않을까요?”

바곳을 잘 모르는 그녀였기에 아이 역시 그런 류임을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좋아요! 제가 마실게요! 메스키트, 빨리 이걸 떠올리지 못해서 미안해!”

파나케이아 병의 고급스러운 둥근 뚜껑을 열고 입에 대었다. 씁쓸한 풀 향이 훅 끼쳐 왔다. 정말 다시 맡아도 향기만으로 건강해지는 기분이야. 목 넘김이 화한 액체가 머리를 맑게 하고 온몸을 개운하게 만들었다.

내게서 시작된 영롱한 진주 빛이 파도 타듯 내 드라이어드들에게로 옮겨 갔다. 물방울을 닮은 작고 노란 민들레 꽃잎이 빙글빙글 드라이어드의 주위를 춤추듯 돌았다.

민들레 꽃잎들은 먹구름을 몰아내는 햇빛처럼 드라이어드들에게 드리워진 재 가루를 걷어 냈다.

“앗! 작은 세계수님, 이제 눈이 보여요!”

“제가 더 먼저 보였어요! 쟤 눈 안 보인다고 울었대요!”

“너도 울었잖아!”

민들레 아이들이 다시 활기차게 쫑알거리는 걸 보니 마음이 놓였다. 아이들은 메스키트가 상대하고 있는 거대한 불을 보자마자 쪼르르 내 뒤로 숨었다.

“야, 숨으면 어떡해? 우리가 작은 세계수님을 지켜야지!”

“네가 먼저 숨었잖아! 먼저 나가! 내가 뒤따라서 나갈게.”

옥신각신하는 아이들의 높은 미성이 이 암담한 분위기를 조금이나마 밝게 만들었다. 재 가루를 걷어 낸 단델리온의 파나케이아처럼 아이들은 햇빛 같은 마성이 있었다.

“쩨이 님… 저도 이제 눈이 보여요.”

하도 비볐는지 발개진 눈가로 바곳이 말했다. 아이의 안경엔 온통 눈물 자국이 묻어 있었다.

“많이 힘들었지?”

바곳을 꼭 안아 주었다. 파나케이아가 실명 디버프를 해제했다. 남은 건 지원형 스킬에 걸린 제약과 회복 불가 디버프인데….

메스키트를 바라보았다. 안타깝게도 그녀에게 감긴 불덩이는 사라지지 않았다. 회복 불가 디버프는 해제할 수 있는 종류가 아니었나 보다. 저것만 사라졌어도 훨씬 수월했을 텐데!

메스키트가 방패를 들었다. 그녀의 버프 스킬을 사용해 볼 모양인 것 같았다. 하지만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엘더 역시 미간을 찌푸리며 자신의 손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 주인, 제이. 테라리움 아티팩트에 이상이 생긴 것은 그대로인가요?”

그녀가 멀리서 소리쳤다. 황급히 팔을 들어 확인해 보았다. 거뭇한 재가 그대로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뭐야, 이건 안 사라지네?”

“가막살나무의 제약을 거는 능력이 정말 귀찮은 방식으로 발휘되는군요. 설마 했는데 드루이드가 죽지 않는 한 능력이 풀리지 않게 걸려 있어요. 단순히 드라이어드의 특수한 회복의 힘으론 해제할 수 없습니다.”

진짜 지독한 새끼네! 내가 죽으면 내 드라이어드들도 무사할 수 없잖아. 회복 불가와 지원형 서브 스킬 사용 불가를 디폴트로 쓰고 들어가는 놈이라니! 가막살나무가 메스키트의 말에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설마, 너희들도 실명이 풀렸는데 힘을 못 쓰는 건 아니지? 뭐라도 좋으니 한번 힘을 써 볼래? 특히 바곳, 네가 제일 중요한데!”

만약 바곳과 민들레들이 힘을 쓰지 못한다면 내 파나케이아는 꽝에 소비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나마 디버프 해제를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희망들이었다. 민들레 아이들은 회복형이라 다행이지만 바곳 역시 지원형 특성이 서브로 달려 있었다.

아이들은 내 부탁에 스태프를 맞대었다. 바곳 역시 검보라색 종 모양 꽃이 달린 스태프를 들었다. 아이들에겐 하얀 민들레 씨가 흩날리고 바곳에게선 은은한 산약초 향이 풍겨 왔다. 다행히 아이들은 힘을 사용할 수 있었다.

“아, 이거 어떡하죠? 제가 파나케이아를 낭비해 버린 것 같은데. 역시 노토스가 마시게 할 걸 그랬나 봐요. 제 결단이 틀렸어요.”

“아니에요, 저희도 차마 예상 못 했으니까요.”

민들레 아이들이 내 로브를 죽죽 당기며 말했다.

“작은 세계수님은 틀리지 않았어요! 제가 할 수 있어요!”

“작은 세계수님은 제 힘이 필요하신 거죠? 제가 작은 세계수님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보여드릴게요!”

“작은 세계수님은 내가 필요해!”

“아냐, 네가 뭘 알아? 나야!”

아이들은 그렇게 말하며 민들레들이 조금이라도 가능성이 있다고 말한 이리스를 바라보았다. 그녀에게 동의를 구하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래, 너희들이 저 드라이어드들의 보이지 않는 눈을 트이게 해 주면 엄청 도움이 되겠지.”

이리스가 허리를 숙여 아이들과 눈높이를 마주하며 말했다.

그사이 꽤 오랜 시간을 혼자 버텨 준 메스키트에게 전투의 상흔이 늘어나 있었다. 디글럽타가 교대로 들어가고 메스키트가 돌아왔다.

소모전이 너무 오래 지속되고 있었다. 메스키트는 엘더에게서 힐링을 받으며 다시 전투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민들레 묘목들이 그들의 왕처럼 능숙하게 힘을 사용해 주면 좋겠지만, 아직 뿌리가 그만큼 영글지 않았어요. 모체의 지식을 좇기엔 연약한 뿌리는 그곳에 닿지 못할 겁니다.”

아이들이 스태프를 맞대고 낑낑대는 모습을 보며 메스키트가 말했다. 그러곤 이리스를 보며 우물쭈물하는 바곳을 바라보았다.

“다만, 뿌리가 닿아 있음에도 느끼지 못하는 쪽이 가능성이 더 높겠지요.”

“쩨이 님은 틀리지 않았어요….”

“맞아요, 나의 세계수는 절대 틀릴 리가 없습니다. 그것을 증명해 보이세요. 순리에 어긋나는 당신에게 기꺼이 영혼의 한 자리를 내어 주기로 결심한 나의 세계수에게 당신의 가치를 보이세요. 이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나무는 세계수의 영혼을 축낼 뿐입니다.”

“앗… 메스키트….”

그녀의 말투가 조금 무섭게 느껴졌다. 바곳은 민들레 아이들처럼 아직 어리니까….

“묘목들은 보호해야 할 존재지만, 보다 더 먼저 자라나는 나무들은 성목이 아니더라도 어린 묘목들에게 반드시 모범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잘못된 방향으로 뻗어 나간 뿌리는 잘라 내지 않는 이상 계속 엇나가 자랄 뿐이에요. 민들레 묘목들이 당신의 주저함을 배우길 원하나요?”

바곳은 메스키트의 기세에 눌려 더욱 어깨를 움츠렸다. 그녀의 말은 바곳에게 꼭 너는 외형은 묘목과 다름없으나 속은 그렇지 않으니 민들레 아이들과 같은 취급 받을 생각하지 말라 말하는 듯했다.

“당신은 데이지 아이와 다르게 묘목 상태로 돌아가 있던 게 아니에요. 마음껏 자라나지 못해서 햇빛을 덜 받은 나무처럼 작을 뿐이지요. 갓 태어나 아무것도 모르는 민들레 묘목들과 달리, 당신은 새순을 털어 내고 묵은 잎을 쥔 어엿한 나무예요. 우리를 곤란하게 했던 공격들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젠 어리광 부리는 것을 멈추고 뿌리의 다른 힘을 깨워야 할 때입니다.”

메스키트는 그렇게 말하며 내게 살짝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제이가 바곳을 대하는 태도를 나무라는 것이 아니에요. 그것이 제이가 할 일, 이것이 제가 할 일이랍니다.”

그녀와 영혼의 연결에 집중한 덕에 그녀의 생각을 알 수 있었다. 바곳에게 이야기를 끝내고 그녀는 다시 디글럽타와 교대하러 홀연히 가 버렸다. 돌아온 디글럽타에게 힐러가 둘이나 붙어 치유하는 것이 보였다. 전투로 인한 피로가 계속 누적되고 있었다.

아이고, 바곳아. 미안하다. 내가 호감도를 더 빨리 채웠어야 했는데. 메스키트의 말을 듣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바곳을 다시 한번 껴안아 주었다. 너도 엘더처럼 다이아면 다 되는 애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리스가 메스키트를 바라보고 눈을 빛내며 말했다.

“그녀는 정말 드라이어드들에게 모범이 되는 자네요. 스페셜 등급은 인성도 스페셜한가 봐요. 제이 님이 정말 부러워요. 저 메스키트가 나의 드라이어드였다면….”

“너희 드라이어들이 듣고 있는디? 질투할 거 아녀?”

“아니요, 드루이드님의 말엔 저희도 동의해요. 벨벳 메스키트의 존재로 부케가 정말 든든할 거예요. 드루이드님을 더 안전하게 지킬 수 있다면 무엇이든 좋아요.”

두 눈을 질끈 감은 란타나 드라이어드가 이리스의 팔뚝을 붙들고 말했다. 꽃잎이 겹겹이 쌓인 꽃 우산을 든 드라이어드는 이리스의 드라이어드들 특징답게 색깔이 매우 화려했다.

멀리서 제퍼가 도깨비바늘의 시선을 피해 입 모양으로 ‘메스키트 멋있어.’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쵸, 저희 애들이 진짜 멋있긴 해요. 어깨가 절로 높아진다.

“그나저나 이 처음 보는 드라이어드도 특수한 회복의 힘을 사용할 수 있는 종이었나 보군요. 생긴 것은 투구꽃 같은데 여태 본 드라이어드들과 조금 달라서 긴가민가했어요.”

“음, 투구꽃 종인 건 맞아요. 얘가 턴 오버로 지원형과 회복형의 특성을 가질 수 있는 애인데, 제가 호감도…가 많이 낮은 탓인지… 아직 힘을 사용할 줄 몰라서….”

“아, 호감도….”

이리스가 제퍼의 드라이어드들을 보며 이해한다는 눈빛을 했다.

“고된 짐을 덜어 버리고 잎을 뻗으리라!”

“아냐! 짓누른 짐을 떨쳐 내고 가지를 하늘로 뻗으리라! 이렇게 하셨어.”

스태프를 맞대고 낑낑대느라 한동안 조용하던 민들레 아이들이 다시 티격태격하기 시작했다.

“아냐! 넌 목소리도 달라! 좀 더 나처럼 우아하게 말해야 돼.”

“그래도 자세는 내가 더 잘해! 이렇게 팔을 뻗어야 해.”

“네가 뭘 알아? 키도 작은 게!”

“내가 너보다 더 커!”

내가 보기엔 둘이 거기서 거기였다.

“뭘 하고 있니?”

아이들은 내 질문에 앞다투어 단델리온을 흉내 내는 중이라고 말했다. 단델리온이 힘을 사용할 때를 따라 하며 어떻게든 디버프 해제의 힘을 깨워 보려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의 모습을 흉내 낸다고 해도 능력까지 흉내 내는 것은 힘들어 보였다.

“그만 싸우고. 너흰 아직 어려서 하나보단 둘이 힘을 합치는 게 더 낫지 않겠니? 메스키트가 그랬잖아. 연리지의 힘으로 가지를 엮어 하나의 나무 같은 힘을 내야 한다고. 자 화해하자.”

내 말에 아이들은 씩씩거리면서도 손을 붙잡았다.

“제이 님, 안타깝지만 제이 님의 드라이어드들이 힘을 깨울 때까지 더 기다려 줄 수 없겠어요. 드라이어드들의 피로는 계속 누적되고 나중엔 제대로 전투에 임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게 될 거예요.”

이리스의 말이 맞았다. 언제까지고 계속 바곳을 기다려 줄 수 없었다. 분명 제대로 된 디버프 해제 가능 힐러만 하나 있었어도 잘 풀릴 보스전이었다.

이번 불 보스는 반드시 탱커 셋이 필수에 메인 탱커가 리타이어되기 전에 빠르게 피를 깎을 수 있는 딜러, 그리고 다수의 회복을 감당할 수 있는 힐러들까지 필요한 전문적인 레이드였다.

각 특성을 고루 갖춘 드루이드 파티의 중요성을 보여 주는 전투였다. 새삼 홀로 움직이는 것이 이 세계에서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깨닫게 되었다.

“다만 방어형 드라이어드가 하나라도 자리에서 물러나면 불이 재생 능력을 사용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멈추지 말고 끝까지 공격을 해야 해요. 저 불이 또다시 재 가루를 뿜을 수 있으니 적절한 때에 근접 공격 드라이어드들이 빠져야겠어요. 한번 뿜고 나면 지속적으로 사용하진 않는 것 같으니 잠시간은 원거리 공격이 가능한 드라이어드들로 버텨야겠죠.”

그 말에 데이지가 단도를 두 개 이어 붙여 부메랑으로 만드는 것이 보였다. 우리 애는 마침 원거리 딜도 할 수 있는 다재다능한 능력자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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