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리스의 방어형 드라이어드인 유칼립투스 디글럽타가 주황색의 둥근 방패를 앞세우고 나섰다. 그새 바크 탈피 기술을 사용했는지 방패의 색깔이 바뀌어 있었다.
메스키트는 엘더의 말을 듣고 잠깐 생각하더니 있던 자리에서 크게 뒤로 물러났다. 그녀의 행동 때문에 무언가 변화가 생겼다.
메스키트를 감싸고 있던 불덩이들이 디글럽타에게 옮겨간 것이다. 메스키트가 전선에서 물러나자 불은 디글럽타를 타겟으로 톱을 휘둘렀다. 저쪽에도 건재한 회복형 드라이어드가 둘이나 됐지만 엘더처럼 디글럽타를 향해 능력을 사용할 수 없는 것이 보였다.
“번거로운 힘을 잔뜩 사용하지만 저 녀석 자체는 약해요! 저런 모습이 되기 전 처음으로 유효타를 먹였을 때 타격이 굉장히 커 보였어요. 빠르게 공격해서 해치워 버리는 것이 좋겠어요.”
이리스가 디글럽타에게 무의미한 힐링을 쏟아붓는 월계수 드라이어드를 저지하며 말했다.
멀리서 자릴 잡은 제퍼가 그의 아네모네 드라이어드와 함께 화살을 겨누자 그들의 공격형 드라이어드들이 뛰쳐나갔다. 이쪽에서도 늦을세라 데이지가 훌쩍 점프했다. 메스키트도 그럴 요량으로 랜스를 들었다.
이리스의 저먼 아이리스가 뾰족한 레이피어를 겨누고 말벌처럼 쇄도했다. 멀리서 위협적인 바람 소리를 내며 크로커스 드라이어드의 원반이 날아왔다. 모든 공격이 한 번에 불에 적중하면 금방 끝낼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생각만큼 그리 쉽지 않았다. 디글럽타가 방패로 막고 있는 톱을 제외하고 남은 두 개의 톱이 회전하며 공격을 모두 튕겨 내 버린 것이다. 저거 진짜 귀찮은 새끼네!
“이런… 저 나머지 톱들도 붙들고 있어야 공격이 통할 것처럼 보이는디.”
헤르마는 불에게서 튕겨 나와 자신의 옆에 꽂힌 제퍼의 화살을 보며 난처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게 마침 방어형이 둘 있으니 나머지 두 톱을 맡을게요!”
너무 타이밍 좋게 내게 방어형 드라이어드가 하나 더 생긴 참이었다.
혹시 모르니 팀의 메인을 메스키트로. 그녀와 영혼의 연결에 집중하자 드라이어드들의 주위로 방패형 이펙트가 빙글 돌다 사라지는 것이 보였다.
디글럽타는 힐을 못 받고 있지만 공격을 막아내는 것엔 큰 무리가 없어 보였다. 이리스의 말대로 불이 약하니 메스키트는 물론 가막살나무도 저 거대한 톱을 잘 버텨 낼 수 있겠지.
내 마음을 읽은 드라이어드들이 방패와 검을 앞세우고 날뛰고 있는 톱들을 향해 뛰었다. 그들이 각각 톱을 쳐 내며 막아 내는 모습을 보며 이젠 공략법을 알았으니 일이 잘 통할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큰 오산이었다.
갑자기 디글럽타의 방패가 큰소리를 내며 박살 나면서 그가 크게 다쳤다. 그가 입은 장비도 처참하게 상흔이 남은 것이 보였다.
“갑자기 공격이 거세져서…!”
그는 아직 주위에 불덩이를 감고 있어서 회복형 드라이어드들이 서포트를 해 줄 수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가막살나무도 상당히 버거워하는 것이 보였다.
그 상황 속에서도 다행히 뒤늦게 뛰어든 메스키트와 가막살나무에겐 회복 불가 디버프를 뜻하는 불덩이가 없었다. 엘더가 집중적으로 가막살나무를 서포트하자 곧 안정적인 탱킹이 가능해졌다.
“제이 님! 톱을 막는 드라이어드 수에 중첩하여 불의 공격력이 강해지는 것 같아요. 특히 제일 처음 순번으로 톱을 막는 드라이어드에게요!”
달려드는 족족 방패가 박살 나는 디글럽타에게 눈에 띄게 상처가 느는 것이 보였다. 더는 위험하다 판단한 이리스가 그를 뒤로 물리자 회복 불가 불덩이가 좀 더 불에 가까이에 있던 가막살나무에게로 옮겨 가는 것이 보였다.
“저 회복형 드라이어드의 힘이 통하지 않게 하는 능력을 막지 못하면 첫 순번 방어형은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인디….”
가막살나무에게 향하던 엘더의 힘이 역시나 뚝 끊겨 버렸다. 가막살나무가 열심히 막아서곤 있으나 메스키트와 함께하느라 공격력이 중첩된 톱의 기세를 막는 것이 점차 힘들어 보였다. 메스키트가 방패를 들어 올려 무언가 하려다 멈칫하는 것이 보였다.
“제가 맡을 테니 당신은 제이에게로 돌아가세요.”
위태해 보이던 가막살나무가 메스키트의 말에 결국 검을 물리고 뒤로 물러나는 것이 보였다. 불덩이는 다시 메스키트에게로 옮겨 갔다.
“지원형 기술을 사용할 수 없군요. 힘을 사용하려 하면 어둠에 휩싸인 것처럼 깜깜한 기운이 느껴집니다.”
메스키트의 말에 엘더가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말이 맞아.”
엘더도 회복 말고는 버프를 줄 수 없게 된 상황이 되어 버렸다. 지원형 드라이어드는 실명에 걸리게 하고 지원형을 서브 속성으로 가진 드라이어드는 그 기술을 막아 버리다니. 진짜 가지가지 한다.
“메스키트라면 분명 첫 순번으로 오래 버틸 수 있겠지만 불을 쓰러뜨릴 때까지 계속 버텨 주어야 해요.”
이리스가 디글럽타에게 포션을 사용하며 말했다.
“이럴 때 소나무들이 꽃말인 ‘장수’의 힘을 사용할 수 있다면 유용할 텐데 하필….”
눈을 비비며 낑낑거리는 우리 어린 드라이어드들과 달리 노토스의 소나무들은 팔짱을 낀 채 의연하게 눈을 살짝 감고 서 있을 뿐이었다.
“이쪽은 준비됐어요! 다시 한번 도전해 봐요! 메스키트가 물러나기 전에 공격을 퍼부어서 빨리 끝내 버려야 해요!”
이리스가 디글럽타의 등을 팡팡 치며 말했다. 이쪽도 막 가막살나무의 치료를 완료한 상태였다. 포션도 아낌없이 사용하고 엘더도 힐을 펑펑 써 주었다. 평소 투덜거림이 많은 엘더라도 전투에서만큼은 나름대로 진지하게 대해 줬다.
방어형 드라이어드들이 불에게로 뛰어들자 예상대로 그것의 공격이 거세지기 시작했다. 특히 메스키트의 경우는 더했다. 디글럽타처럼 바로 나가떨어지진 않았지만 표정을 보아 확실히 힘들어 보이긴 했다.
공격형 드라이어드들도 각자 무기를 들고 무기를 들고 불에게 달려들었다. 이번엔 이리스와 노토스도 무기를 꺼내 들고 전선에 나섰다. 나도 총이라도 꺼내야 하나?
화살이 적중한 곳에 저먼 아이리스의 레이피어가 뚫고 들어갔다. 크로커스의 원반의 궤도에 맞춰 데이지가 빠르게 움직이며 베어 내는 공격에 힘을 실었다. 오늘 처음 합을 맞추는 파티였지만 묘하게 손발이 잘 맞았다.
공격력이 3개나 중첩된 불의 공격에 회복 없이 버틸 수 있는 건 메스키트가 유일했다. 그녀가 무너지기 전 반드시 끝장을 봐야만 했다.
속수무책으로 밀리는 것처럼 보이는 불이 크게 몸을 떨었다. 재 가루로 뒤덮인 회오리바람의 차폐막에 불길이 용솟음치며 모습이 변화하는 것이 보였다. 설마 다음 페이즈로 돌입하는 건가?
크게 몸부림치던 불 보스에게서 훅, 하고 검은 재 가루가 한가득 뿜어져 나왔다. 공격을 하기 위해 근접해 있던 드라이어드들은 물론 이리스와 노토스 모두 재를 뒤집어썼다.
디글럽타가 황급히 소리쳤다.
“이리스, 나의 작은 세계수여! 돌아가세요! 당신이 영향을 받으면 당신의 드라이어드들도 온전치 않아요.”
이리스의 주위에 재 가루가 먹구름처럼 뭉쳐 떠다니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실명 디버프의 영향을 받지 않던 그녀의 드라이어드들 주위에도 같은 것들이 떠다니기 시작했다.
“한 번 더 맞으면 정말 위험해지겠는데… 앞이 흐릿해지기 시작했어.”
이리스가 무기를 거두고 돌아왔다. 이미 실명 디버프에서 자유롭지 못한 드라이어드들이 있기에 노토스는 남았다.
근접 공격형인 데이지도 결국 영향을 받았다. 그녀가 고개를 붕붕 흔들었지만 재는 떨어지지 않았다. 근접 딜러들에게 난항이 계속되었다. 원거리 딜러들에게 맡기기엔 처치 시간이 너무 길어졌다. 힐을 받지 못하며 계속 버티기엔 메스키트가 곤욕이었다.
메스키트를 물리고 다른 탱커와 교대시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다른 드라이어드가 첫 순번을 받고 빠르게 메스키트를 회복시킨 후 다시 이어받으면 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고 실행할 때였다.
메스키트가 뒤로 물러나고 디글럽타가 불덩이를 이어받으며 한 개의 톱이 여유로워지는 그 찰나의 순간, 사방에 뿜어졌던 재 가루가 다시 불 쪽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드라이어드들의 맹공격에 잘려 나가거나 뚫린 부위가 재생되며 활활 타오르는 것이 보였다.
“야 이놈아! 작작 해라!”
어이가 없어서 소리쳤다. 무슨 저렇게 상대하기 까다로운 놈이 다 있어! 탱 교대하면 재생까지 한다고? 기믹이 무슨 하드 콘텐츠 저리 가라네! 여태 만났던 불들은 앞뒤 가리지 않고 엄청난 파괴력으로 맹공격이었다면, 이번 불은 다양한 기믹과 디버프로 상대하기 까다로웠다.
결국 메스키트만큼 버티지 못한 디글럽타가 무너지며 불은 또 한 번 재생을 하기 시작했다. 방어형 드라이어드 하나가 처음부터 끝까지 첫 순번을 맡지 않는 이상 이 전투는 무한 굴레에 빠질 것이 분명했다.
“메스키트가 그녀의 기술을 온전히 모두 사용할 수 있다면 다른 도움 없이도 더 오래 버틸 수 있었을 거야.”
메스키트가 자주 사용했었던 기술들이 떠올랐다. 모래 방패를 둘러 공격을 세 번까지 막아 주던 버프라든가…. 확실히 버프 기술을 사용할 수 있으면 더 수월했을 텐데.
이미 보스의 피가 리셋되었으니 재정비를 하는 것이 낫다는 판단에 다들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이 보였다. 메스키트만이 남아 보스가 우리에게 주의를 돌리지 않도록 막고 있었다.
“지원형 드라이어드들의 힘이 필요해요.”
이리스가 수건으로 얼굴을 문질러 닦으며 말했다. 그녀의 주위를 감싸던 재 가루 구름은 불이 재생의 힘을 사용하며 많이 옅어진 상태였다.
“후반부를 길게 버티려면 특히 소나무 드라이어드들의 힘이 굉장히 도움이 될 거예요. 아니면 히아신스나 란타나의 힘으로 방어형 드라이어드의 부담을 덜어 줄 수도 있어요.”
나는 아직 앞을 보지 못하는 민들레 아이들과 바곳을 바라보았다. 아이들이 실명 디버프를 털어 내더라도 디버프 해제를 사용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회복형으로 턴 오버 하여 실명을 피한 월계수 드라이어드를 보면 바곳도 스태프 조각을 뽑아버려 공격형으로 전환하면 실명은 피할 수 있을 텐데….
하지만 그렇게 되면 바곳은 제어 불가 상태가 된다. 그리고 민들레 아이들보다 디버프 해제를 사용할 수 있는 확률이 높은 건 좀 더 자란 바곳이었다.
“아… 소나무들의 힘만 사용할 수 있다면…!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에요.”
공격형 바곳을 생각하니 떠오른 물건이 있었다. 그때 아이의 중독 디버프를 상대하며 사용했던 것. 단델리온이 준 파나케이아가 아직 반병 남아 있었다. 하얀 진주색의 액체가 찰랑이는 다이아 병을 꺼냈다.
“이걸 노토스가 마시면 될 거예요! 마시면 소나무들이 다시 앞을 볼 수 있을 거예요. 이건 모든 안 좋은 힘을 치료하는 약이에요. 일단 중독을 풀 수 있는 건 확인됐는데….”
마시기만 해도 모든 디버프를 해제해 주는 만병통치약! 내가 마시는 것보다 확실한 도움이 될 수 있는 노토스가 마시는 것이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시기만 해도 능력을 털어 낼 수 있는 약이 있다고요? 드라이어드의 힘이 응축된 것인가요?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연금술사는 흔치 않을 텐데…. 있다 하더라도 가격이 상당할 터인데….”
이리스와 헤르마가 파나케이아를 보며 놀란 얼굴을 했다.
“이 민들레 아이들의 왕이 오랜 세월 힘을 담아 만든 약이에요. 이 아이들이 더 컸다면 능력을 사용할 수 있었을 텐데 아직 어려서….”
“포레스트의 왕이 만든 약이라….”
“네가 마시는 게 낫지 않아? 메스키트의 힘을 해방시켜 주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엘더가 파나케이아 병을 보더니 툭 말을 던졌다.
아… 그런가? 생각해 보니 내가 마셔도 되긴 한데. 그런데 이 약으로 지원형 스킬을 사용할 수 없는 디버프도 풀리는 것 맞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