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2화 (102/604)

“도와줘야 하지 않을까? 태도는 저래도 너무 괴로워 보이는데. 도저히 그냥 두고 갈 수 없겠어.”

“저런 녀석은 그냥 놔둬.”

도깨비바늘이 회복 능력을 사용할 때도 꿈쩍하지 않던 엘더가 뾰로통하게 말했다. 엘더는 이미 가막살나무 드라이어드를 두고 떠날 마음이 한가득인지 몸을 틀고 있었다.

“드루이드도 많은데 불을 해치우고 가는 것이 좋겠어요. 가만두면 다른 테라리움에도 위해를 끼칠 수 있으니. 어느 쪽이죠?”

이리스가 디글럽타를 불러들이며 말했다. 다들 이리스의 말에 동의하는지 드라이어드들을 정비하는 것이 보였다.

“그만둬! 너희들은 녀석의 상대가 못 된다. 이미… 이미… 내 형제가 먹혔다. 드라이어드를 먹은 불이다. 결코… 상대해선 안 돼.”

모두가 경악했다. 세상에! 드라이어드를 먹은 불이라니. 그런 불은 상대하기 굉장히 까다로웠다.

민들레 묘목을 삼켰던 불을 상대한 적 있었지. 묘목이고 노멀 등급인 민들레였지만 상대하기 무척 힘들었다. 민들레 드라이어드의 능력을 사용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능력으로 큰 피해를 입을 뻔하기도 했다.

가막살나무는 레어랬지. 더 상대하기 까다로울 거야.

노토스가 가막살나무에게 명령하듯 말했다.

“죽기 전에 모체를 거둬라. 불은 우리가 상대한다.”

“제발… 돌아가라.”

“쉽게 모체를 거둘 생각이 없어 보이는데. 우리가 직접 모체를 치우고 불을 상대해야겠어.”

제퍼의 말을 들은 가막살나무가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그를 막아서기 위해 검을 드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그건 그를 끔찍하게 사랑하는 도깨비바늘에게 아주 버릇없는 광경이었다.

그녀가 스태프를 이용해 풀 스윙으로 가막살나무를 후려치는 것이 보였다. 당신 회복형이라고 안했어…?

그때였다. 가막살나무가 쓰러지자 마을의 왼편에서 크게 불길이 치솟는 것이 보였다. 가막살나무는 다시 불에 휩싸여 괴로워했다.

“저쪽이야!”

이리스의 파티가 불길을 향해 뛰었다. 나만이 가막살나무가 걱정이 되어 남았다. 엘더의 등을 퍽퍽 치고 다이아로 회유해서 겨우 회복의 힘을 사용하게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도깨비바늘의 말처럼 영혼의 연결을 맺은 상태가 아니라 효과가 미미했다.

불은 엘더가 힐을 퍼부은 덕에 겨우 사그라들었다.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거야? 우리들에게 맡기면, 특히 저쪽 팀은 나보다 더 강해서 불은 금방 잡을 수 있을 텐데.”

“저 불은… 드루이드가 불러온 것이다. 불을 불러온 것도 인간, 이곳을 전부 태운 것도 인간… 나는 인간을 믿지 않는다. 다만 그 아이만 제외하고.”

“스케어크로우?”

그 이름에 가막살나무가 퍼뜩 어깨를 떨었다.

“스케어크로우가 여기 살았었어?”

“다 죽고… 그녀만 겨우 살려 냈다. 그녀가 아주 어린아이였을 때, 형제를 시켜 그녀를 도망 보냈다.”

대체 여기선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멀리서 “모체 치워, 이 자식아!” 하는 이리스의 외침이 들려왔다. 불이 있는 곳은 근방이었나 보다.

“소용없다…. 그들이 강하더라도 그 불은 이길 수 없다. 나와 같은 가막살나무 드라이어드를 먹은 불이기에.”

“레어 등급이라서? 그래도 저 팀은 드라이어드도 꽤 많고 아티팩트에서 필드를 불러올 수도 있는데.”

“아니. 먹은 드라이어드가 가막살나무이기 때문이다.”

“과연 그랬군.”

메스키트가 그의 말에 수긍하며 침음성을 흘렸다.

“왜? 가막살나무인 게 뭐가 문제인데?”

“가막살나무 드라이어드는 방어형이라 먹은 불도 튼튼한 것이 문제가 되지만… 정말 큰 문제는 그들의 능력 때문이랍니다.”

드라이어드의 능력을 사용할 수 있는 불이니까 예상은 했는데. 가막살나무의 능력이 뭔데? 방화수 말고 다른 특이한 것이 있나?

“꽃말의 힘을 사용할 수 있는 드라이어드가 당했나 보군요.”

“…그렇다. 우리의 꽃말은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 사랑하고 염원하는 것이 죽기 전까지 우리는 절대 죽지 않는다. 불이 원하는 것은 나, 내가 죽기 전까지 불은 절대 꺼지지 않아.”

이른바 동귀어진! 둘 다 죽어야 하다니. 영국의 어떤 마법 소설의 두 캐릭터 관계와 같잖아?

“분명 당신이라면 불을 없애기 위해 목숨을 버릴 것처럼 보이는군.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는 건 당신의 꽃말의 힘도 작용하고 있다는 거겠지. 당신은 무엇에 묶여 있는 것이지?”

메스키트의 질문에 그는 답하지 않았다.

“그의 말처럼 그가 죽기 전까지 불은 꺼지지 않을 거랍니다. 저 드루이드들에겐 의미 없는 싸움이 계속될 거예요. 장기전으로 가게 되면 무척 힘들 거랍니다.”

“그렇다고 이 드라이어드를 죽일 순 없잖아?”

“모체 치우라고 이 새끼야! 너 때문에 우리만 일방적으로 처맞잖아!”

열에 뻗친 이리스의 외침이 다시금 들려왔다. 그녀가 제퍼를 대할 때도 느꼈지만 상당히 화끈하고 거침없는 성격이었다.

“꼭 죽이는 것만이 방법은 아니랍니다.”

“앗, 방법이 있어?”

“그를 다시 태어나게 하면 된답니다. 그가 설익은 열매에 영혼을 담아 드루이드와 영혼의 연결을 맺으면 작은 세계수만의 드라이어드로 다시 태어나는 거예요.”

그것도 큰 난관이었다. 그는 인간 불신이 대단한 드라이어드였다. 그가 쉽사리 영혼의 연결을 맺으려 할 리도 없었고 그의 꽃말이 묶인 조건이 있는 한 죽지도 않았다.

“곱게 치우랬지!”

이리스의 외침이 또 들리고 가막살나무가 팔을 붙잡고 아픈 얼굴을 했다.

“결국 참지 못하고 모체를 공격했군요.”

메스키트가 여상하게 말했다. 말을 듣지 않으니 맞아도 싸다는 말투였다. 곧이어 펑펑 터지는 엄청난 소리가 들려왔다.

멀리 높다랗게 불의 차폐막이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끝내 전투를 시작한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이리스 파티는 저 불의 상황에 대해 전혀 몰랐다. 이 가막살나무 드라이어드가 죽기 전까지 불을 상대로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전투를 물리기엔 이미 보스전이 시작되어 무리였다.

그렇다고 이 사실을 전달해 줄 수도 없었다. 이리스 파티가 탈진할 때까지 전투가 계속될 것이었다.

방법은 하나. 이쪽에서 가막살나무 드라이어드의 마음을 돌려야만 했다. 그래도 스케어크로우의 얘기엔 반응해 주던데. 이걸 공략해 봐야 하나?

“난 사실 스케어크로우와 같은 세계수의 28번째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원이야. 그녀의 직책을 물려받아 일하고 있어.”

앗, 입을 꾹 다물고 땅만 바라보고 있던 가막살나무가 반응을 보였다.

“그 아이는… 아직 잘 살고 있나?”

“사실… 그게… 음…. 늙어 죽었어….”

살아 있다고 거짓말할 순 없잖아. 만나고 싶다고 생각하면 어떡해? 거짓말이 들통나면 파국으로 치닫는 거야!

“그래… 그렇단 말이지. 인간의 생명은 참 짧군…. 그 아이는 드루이드로 태어났으니 더 오래 살 것이라 생각했는데. 본인의 명을 다 살고 죽었다면 이제 더는 만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안심이 된다….”

“아니 그게….”

머리를 쥐어뜯었다. 스케어크로우는 결코 곱게 죽지 않았다. 이걸 말해도 될까?

“그… 그래! 스케어크로우 이야기 좀 해 줄 수 있어? 많이 알고 지낸 사이는 아니라.”

잠깐 만났을 뿐이지만 너무 강렬한 만남이었어. 28번째 테라리움의 불이 밖으로 나오지 않게 자신의 생명력을 모두 소모해 가며 지켰지. 멋있었어.

고통스러워하던 가막살나무의 얼굴에 처음으로 미소가 어렸다. 옛 생각을 떠올리는 그는 기분이 매우 좋아 보였다.

“본래 이곳엔 우리 가막살나무의 군락지가 있었다. 산의 한쪽을 다 뒤덮을 정도로 넓고 푸른 곳이었다. 이곳에 세계수의 축복이 담긴 꽃씨를 받고 형제가 셋 태어났지. 가장 먼저 태어난 것이 나다. 영혼의 그릇이 큰 내가 형제들의 영혼을 위탁받아 왕이 되었지. 군락지를 지키며 보내는 매일이 즐거웠다.”

목소리가 퍽 즐거운 듯했다.

“언젠가부터 인간들이 하나둘 군락지에 모여들었다. 그들은 거주지가 없는 자들이었다. 우리 나무들은 방화수라 불에 잘 타지 않으니 안전한 곳에 몸을 위탁하고 싶어했지. 그들 중 드루이드가 없어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우린 기꺼이 군락지의 한쪽을 내주었다. 그들에게 집이 되어줄 나무도 목재로 내주었지. 인간들은 어디선가 자꾸 모여들었고 그들의 군락도 꽤 커졌다.”

저쪽에선 불의 차폐막이 세워져 한참 치열한 전투를 치르고 있는 와중 이쪽은 옛날이야기를 하며 너무나 평온했다. 참으로 상황이 대조적이었다.

“어느 날 아이가 하나 태어났는데 세계수의 축복을 영혼에 담고 있었다. 드루이드가 될 수 있는 아이였다. 참으로 사랑스러운 아이였지. 그 아이를 볼 때마다 아늑함이 느껴져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세계수의 축복은 햇살처럼 따뜻하고 깨끗한 물처럼 청량함이 느껴지는 것이더군.”

그 아이가 스케어크로우구나.

“우리 형제는 그 아이가 어서 빨리 자라기만을 고대했다. 우리만 일방적으로 인간들의 말을 듣는 것보다 서로 대화하고 싶었다. 식량으로 쓸 수 있는 단 열매가 많이 맺힌 곳이나 불이 나타나 위험한 곳 등 인간들에게 알려 주고 싶은 지혜는 참 많았다. 하지만 드루이드가 아니기에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었지. 드디어 아이가 자라 말을 할 수 있게 되었을 때부터 행복한 날이 계속되었다. 아이는 똑똑했고 항상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아이가 자랄수록 영혼에 담긴 세계수의 축복도 힘이 커져서 우린 더욱더 아이를 아끼고 사랑할 수밖에 없게 되었지.”

가막살나무는 그때를 회상하면서 정말 행복한 얼굴이 되었다. 그의 얼굴에 잔뜩 묻은 재 가루도 미소의 빛을 가릴 수 없었다.

“우린… 우린 그 아이가 원한다면 영혼의 연결을 맺고 싶었다. 그 아이의 드라이어드가 되어 평생 지켜 주고 싶었지. 아이와는 언젠가 함께 밖으로 여행을 떠나기로 약속도 했다. 그날을 기다리며 수련도 열심히 하며 힘을 키웠지. 그렇게 기다리기만 하면 될 줄 알았다. 그자가 군락지에 찾아오기 전까진.”

가막살나무의 표정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자신이 상인이라는 자가 찾아와 귀한 목재를 놀린다며 값을 낼 테니 팔라고 했다. 처음에 인간들은 함부로 가막살나무를 해할 수 없다며, 큰 은혜를 입고 있기 때문에 그럴 수 없다고 그를 쫓아냈다. 하지만 그는 끈질겼다.”

그 상인은 이리스가 목공소에서 군락지에 대한 정보를 물었을 때 들었다던 그 상인이 분명했다. 그의 발자취를 쫓아 이곳을 발견하기도 했고.

“하지만 그가 목재를 판 돈으로 다이아를 모으면 테라리움에 입주할 수 있다고 회유하자 넘어가는 인간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지. 모두에게 평범하게 그늘을 제공하고 불을 막는 산울타리가 되어 주던 나무들이었지만… 그들은 자신의 집주변 나무는 자신의 소유라며, 소유권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소유권을 주장한 나무를 베어다가 상인에게 파는 인간들이 늘기 시작했다. 집 주변에 있지 않은 나무는 먼저 베어 낸 사람이 임자가 되었다. 그러자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앞다투어 나무를 베어 버리더군. 상인을 따라 군락을 떠나는 사람들만큼 나무들도 사라졌다.”

아니 불도 쫓아 줘, 집 만들라고 목재도 내어 줘. 그렇게 잘해 준 나무들한테 너무 한 거 아냐? 완전 아낌없이 준 나무인데? 내가 다 부끄러워져 얼굴이 화끈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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