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1화 (101/604)

동굴 밖의 산 위에는 사람이 다닐 만한 길이 나 있지 않아 갈수록 걷는 것이 힘들어졌다. 재와 낙엽들이 엉켜 질퍽거리고 경사도 좀 있어서 잘못 발을 헛디디면 미끄러졌다.

나중엔 튼튼한 메스키트를 지지대 삼아 팔을 꼭 붙들고 걸었다. 주변이 난장판인데 걸을 때마다 더러워지는 우리들과 달리 드라이어드들의 옷들은 깨끗해서 너무 신기했다.

노토스는 소나무들과 함께 성큼성큼 잘도 이동했다. 다른 이들은 지형이 험난하자 부츠로 갈아 신었는데 부츠 바닥에 징이 박혀 있어 잘 미끄러지지 않아 부러웠다. 전투 장비만 갖춰 입으면 다가 아니었구나. 등산화도 사고 그래야 했나 보다.

느낌상 18번째 테라리움과 많이 멀어진 것 같았다. 중간에 이리스의 지도를 보니 주변의 테라리움들과 멀리 떨어진 구역이었다. 이대로 아래로 향한다면 17번째 테라리움이 나오고 위로 향한다면 7번째와 8번째의 테라리움 사이가 나올 터였다.

“보통 테라리움으로 곧장 향하는 길목들을 이용하니 이런 곳은 확실히 발견하기 힘들겠어요.”

오래 걸었던 탓에 다들 잠깐 휴식 시간을 갖기로 했다. 민들레 아이들도 다시 불러왔다. 푹 쉬었는지 아이들은 생기발랄해 보였다.

“이 주변은 굉장히 척박해 보이는데 정말 가막살나무 군락지가 있을까요?”

산 초입은 그래도 푸른 잎의 식물이 많이 보였는데 위로 갈수록 갈색투성이었다. 그러자 노토스가 10여 년 전만 해도 이곳도 나름대로 푸르렀다고 답해 주었다.

“이런 곳인데도 10여 년 전엔 사람들의 왕래가 보였다. 다만 그들이 보이는 나무를 전부 벌목해서 소나무들이 볼 수 없는 구간이 늘고 있다. 차림이 남루한 것으로 보아 테라리움의 사람들론 보이진 않는다.”

“그럼 이곳에 마을이 있다는 건가? 세금 때문에 테라리움에 입주하지 못한 사람들끼리 모여 마을을 형성하는 경우는 자주 본 적 있으니…. 하지만 불의 위험은 피하기 힘들었을 텐데. 드루이드라면 번호가 크더라도 테라리움에 입주했을 테니 분명 일반인들만 모여 있을 거야. 그럼 이미 불에 당했을 확률도 높고.”

테라리움에 입주하지 못한 사람들의 마을이 있다고? 앗, 그럼 우리 28번째에 오라고 하면 좋겠다! 그렇게 막연히 생각하고 있는데 이리스가 곧 날이 어두워진다며 갈 길을 재촉했다.

아픈 다리를 두드리며 내 드라이어드들이 안 볼 때 몰래 체력 회복제를 까 마셨다. 전에 뒈질 것 같아도 체력 회복제로 버텨 가며 행동한 것을 들킨 이후로 내가 이걸 마시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이놈의 허접 체력 스탯. 언제 오르려나.

한참을 걸었을까, 앞장선 노토스가 무엇인가 발견했다고 말했다. 설마 드디어 가막살나무 군락지를 발견한 거야? 어떤 모습일까? 민들레 군락지는 민들레 꽃이 광활하게 펴 아름다운 노란빛 물결처럼 보였는데!

가막살나무는 흰 꽃이 피는 나무라고 했지? 그럼 하얀 눈송이가 소복하게 덮인 것과 같은 모습일까? 꽃나무들이 한데 어울려 피어 있는 건 정말 아름다울 거야!

열심히 발을 놀려 노토스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노토스는 커튼처럼 드리운 나뭇가지를 걷어내고 서 있었다. 그의 옆에 서서 바라본 곳은 상상했던 것과 너무 많이 달랐다.

“세상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이게 다…. 너무 참혹한 광경이야.”

“역시 불에 당했나 본디….”

“노토스, 혹시 소나무들로 이곳 땅의 기억을 볼 수 있겠어?”

“아니. 불가능하다. 소나무들은 아주 오래전에 이곳에서 전부 사라졌어. 전부 벌목 당했다.”

온통 검은색뿐이었다. 분명히 풍성한 숲이 있었던 것 같긴 하다. 스러지고 무너진 것들이 전부 나무들로 보였다.

벽이 다 무너진 집의 형태들도 많이 보였다. 이리스의 추측처럼 오래전에 마을이 있었던 것 같았다. 불에 다 타 버린 천막도 보였고 가재도구들도 보였다.

“여태 봤던 테라리움 밖 마을 중 제법 크기가 커요. 아마 이곳이 가막살나무 군락지가 맞을 거예요. 방화수를 산울타리로 삼아서 오래 버틸 수 있었겠죠.”

“나무가 전부 불에 당해서 없어진 것으로 보이진 않는디. 이것 봐, 벌목해서 밑동이 드러난 것들이 상당히 많아.”

헤르마의 말은 사실이었다. 벌초기가 한 번 지나간 것처럼 둥근 나무 밑동이 굉장히 많았다. 비록 불에 타 버려 까맣다 해도 거칠게 팬 곳이 많이 보였다.

“이건 가막살나무 군락지를 찾았다고 해야 할지…. 군락지가 있었던 곳이 되어 버렸네요.”

“내 주인, 제이. 굉장히 강한 불의 기운이 느껴집니다.”

메스키트의 말에 다들 당황하며 무기를 꺼냈다. 강한 불이라고? 이곳은 주변의 테라리움과 멀리 떨어진 곳이라 그런 불이 있을 수 있는 건가?

“제이 님의 스페셜급 드라이어드가 강하다고 할 정도면 어느 정도인 거죠? 대비해야겠어요.”

이리스가 아티팩트에서 드라이어드를 불러오는 것이 보였다. 빛 무리와 함께 짧은 상아색 머리의 남성형 드라이어드가 나타났다.

드라이어드는 온몸이 알록달록 현란해서 눈에 굉장히 띄었다. 피부도 물감 칠을 한 것처럼 오색으로 빛이 났다. 파랑, 노랑, 초록, 분홍, 주황, 검정, 온갖 색채가 그 드라이어드에게 담겨 있었다.

“디글럽타, 팀의 메인을 너로 한다. 방어에 주력해.”

그녀를 시작으로 제퍼와 헤르마가 다른 드라이어드들을 꺼내는 것이 보였다. 제퍼의 도깨비바늘도 다시 나타났다. 그들이 드라이어드를 부르는 것과 메스키트의 설명으로 이름을 알 수 있었다.

이리스의 드라이어드는 ‘저먼 아이리스’, ‘란타나’, ‘유칼립투스 디글럽타’였다. 제퍼의 드라이어드는 ‘도깨비바늘’, ‘히아신스’, ‘아네모네’, 그리고 헤르마의 드라이어드는 ‘크로커스’, ‘월계수’였다. 노토스는 소나무만 있고.

“누구냐!”

갑자기 우렁찬 소리가 들려왔다. 우리 중 누군가의 소리는 아니었다. 이리스의 디글럽타가 방패를 들고 막아서는 것과 동시에 긴 검이 그를 내려쳤다. 퍼석하고 방패가 부서지는 것이 보였다.

“헐! 방패 박살 났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유칼립투스 디글럽타 드라이어드의 특기는 바크 탈피예요. 내구도가 좀 떨어지는 반면 많은 껍질을 가지고 있어서 방어에 유용해요. 헌 바크는 버리고 바로 새 바크로 갈아탈 수 있어요.”

그녀의 말대로 디글럽타의 팔엔 어느새 다른 방패가 자리하고 있었다. 다만 색깔이 파란색에서 분홍색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를 공격하고 있는 것은 놀랍게도 드라이어드였다. 그것도 온몸이 까맣게 타서 위태로워 보였다. 드라이어드라는 것은 왼쪽 가슴에 장식된 하얀 꽃으로 알 수 있었다.

그 드라이어드는 일격으로 힘을 소진했는지 한쪽 무릎을 털썩 꿇고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헉헉… 이 기운은… 드루이드? 어떻게 드루이드가 이곳에….”

“어리석은 드라이어드여. 검을 거두어라! 감히 작은 세계수에게 상처를 입힐 셈이냐?”

주인이 없는 드라이어드 같은데. 설마 자연 발생 드라이어드인가?

“가막살나무 드라이어드군요. 군락지에서 운 좋게 피어난 드라이어드 같습니다.”

메스키트가 그 드라이어드를 보며 말했다. 오오, 가막살나무!

“와, 자연 발생 드라이어드라니! 그런데 모습이 너무 처참한데. 설마 혼자야? 왕이 아니면 오래 버티기 힘들었을 텐데.”

“이곳에 당신들이 가져갈 만한 것은 아무것도… 아무것도 없다! 돌아가라!”

가막살나무 드라이어드는 이리스의 말에 성을 내며 소리쳤다. 하얀 은발은 재가 잔뜩 묻어 더러웠고 들고 있는 검도 이가 많이 빠져 있었다. 방어구는 불에 타거나 그을려 성한 곳이 없어 보였다.

“모체가 방화수라 불의 공격에도 견뎌 낸 것인가 본디. 크기도 그렇고 저대로 놔두면 세계수로 돌아갈 것 같긴 한디.”

“드루이드를 경계하는 드라이어드라니. 수치예요. 작은 세계수는 우리의 안식처가 되어 주는 사랑스러운 존재. 모든 드라이어드라면 세계수를 경외하는 만큼 작은 세계수도 사랑할 줄 알아야죠.”

제퍼를 꼭 껴안은 도깨비바늘 드라이어드가 가막살나무 드라이어드에게 새침하게 말했다. 그녀의 소매에 달린 가시에 제퍼의 볼이 상처투성이가 되어가고 있었지만, 그는 마냥 좋다고 웃고 있었다.

그녀의 말에 바곳이 움찔 몸을 떠는 것이 느껴졌다. 과거의 자신이 떠올랐나 보다. 얘도 상식이 없어서 마구잡이로 공격하긴 했지. 하지만 얘는 인공적으로 태어나 아무것도 몰라서 그렇고.

“드루이드도 결국 인간. 인간은 아주 욕심이 많은 자들. 나 역시도 드라이어드이기에 당신들을 절대 상처 입히고 싶지 않다. 그러니 돌아가라.”

그렇게 말하는 가막살나무의 표정이 무척이나 괴로워 보였다.

“내 주인, 제이. 저 드라이어드를 보고 떠오르는 것이 없나요?”

“응?”

갑자기 메스키트가 내게 물었다.

“제이는 저 드라이어드와 같은 종을 한 번 본 적이 있답니다. 드루이드와 함께였죠. 마지막 생명을 끌어모아 불을 막고 있었어요.”

“어… 설마 28번째 테라리움의 전 행정 관리원? 스케어크로우! 드라이어드랑 그래프트를 쓰고 있었는데. 아, 그 드라이어드가 가막살나무랬지. 어쩐지 어디서 들어 본 적 있다 했어!”

“스케어크로우…라고? 그 아이가 살아 있다는 건가…?”

그는 말을 멈추고 갑자기 온몸을 끌어안고 고통스러워했다. 놀랍게도 그의 몸이 불타고 있었다.

“위험해! 저러다 죽겠어!”

제퍼가 도깨비바늘을 시켜 힘을 사용하게 했다. 그녀는 못마땅한 눈치였지만 제퍼가 시키기에 느릿하게 가막살나무에게 힘을 주었다.

“영혼의 연결이 맺어진 상태가 아니면 우리들 회복의 힘으로도 큰 소용이 없어요.”

가막살나무를 태우던 불은 곧 사그라졌다. 그는 숨을 몰아쉬며 벌게진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저렇게 보니 좀 무서운데.

“말해 다오. 스케어크로우, 그 아이는 살아 있나? 잘 지내고 있는지… 그 아이의 안부를 알려 줘….”

“아이라고 하기엔…. 음… 28번째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원이기도 했고….”

그녀의 집무실에서 젊었을 적 초상화를 보긴 했지만 내가 마지막으로 본 모습은 노인이었지. 생명력을 모두 소모해서. 결국 죽어서 엘더의 힘으로 그녀를 땅에 묻었다.

“아아… 다행히 잘 도망쳤구나…. 다행이야… 다행….”

스케어크로우의 희소식을 바라는 입장인 그에게 차마 그녀의 부고를 알려 주기 힘들었다. 아는 사이였나? 그녀와 함께했던 그 가막살나무 드라이어드와 관련이 있는 건가?

“모체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갑자기 메스키트가 그에게 물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굉장히 매서웠다.

“돌아가라…. 돌아가.”

“대답해라. 이곳에 강한 불의 기운이 느껴진다. 너의 모체와 관련이 있나?”

“이곳엔 아무것도… 아무것도 없다.”

메스키트의 위압감이 장난 아닌데도 가막살나무 드라이어드는 용케 잘 버텼다. 그를 차가운 눈으로 내려다보던 메스키트가 “산울타리로군.” 하면서 어느 쪽을 바라보았다.

“내 주인, 제이. 저 드라이어드의 모체가 불을 막고 있어요. 그날 28번째 테라리움에서 보았던 것처럼. 한때는 군락지의 왕이었던 자이니 가능한 일일 거예요. 비록 지금 그에게 위탁된 영혼은 하나도 보이지 않지만. 어떻게 하실 거죠?”

“세상에… 맨몸으로 불을 막고 있다고?”

나뿐만 아니라 모두가 놀란 눈을 했다.

“인간의 도움 따윈 필요 없다… 돌아가!”

위태한 것치고 가막살나무의 태도가 너무 확고했다. 대체 뭐 때문에 저렇게 인간 불신에 걸린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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