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집단에 잘못 걸리셨네요. 워낙 비밀스러운 집단이라 저희도 아는 건 많지 않지만 들리는 소문은 항상 좋지 않았어요.”
그리고 굉장히 어두운 얼굴이 되어 날 걱정했다. 이리스는 내가 쫓기고 있단 소리를 들은 후 드라이어드들을 데리고 내 후방에 섰다. 노토스는 좀 더 성큼 나가 전방을 주시했다.
“어떤 소문인지 알 수 있을까요?”
협곡은 물이 흐르고 있었는데, 흐르는 양이 신발 밑창을 겨우 적실 정도로 적었다. 어쩐지 과거엔 더 많은 물이 흘렀을 것 같다. 내 어깨높이의 커다란 바위들이 물의 흐름에 둥글둥글하게 깎여 있는 것이 보였다. 불의 영향으로 여기 물이 말라 버린 것일까?
물기를 머금을 자갈들을 자각자각 밟으며 나아갔다. 졸졸 흐르는 물소리와 돌 밟히는 소리 외에 어떠한 생명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28번째 테라리움의 근처엔 새가 날아다니던 것에 비하면 묘하게 주위가 조용했다.
“아마 불을 숭배하는… 집단이라고 했던 것 같아요. 온갖 악행은 다 저지르고 다니고… 그 집단과 관련된 화재 사건도 굉장히 많다고 했고. 아, 소문으론 어딘가의 테라리움을 통째로 불로 태워 버린 적도 있다고 해요. 사실일진 모르겠지만 참 기괴한 집단이죠? 사람이나 드루이드나 가리지 않고 소속되어 있다고 하는데. 드루이드는 그래선 안 되는 거잖아요? 어떻게 세계수의 축복의 힘을 갖고 세계수를 해할 수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아요.”
메스키트는 그녀의 말에 동의하듯 짧게 침음성을 흘렸다.
“조직의 이름도 구성원도 모르지만 몸 어딘가에 있는 불꽃 같은 화상 흉터로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고 해요. 저흰 여행을 많이 다니긴 했어도 아직 그들과 얽힌 적은 없어서 들리는 소문만 말씀드린 거예요.”
제대로 잘못 걸렸다 싶었다. 불을 숭배하는 집단이라니. 하긴 내 세계에도 악마를 숭배하는 자들이라든가, 이상한 걸 숭배하는 종교는 많았다. 이 세계의 악의 축은 불일 테니 불은 악마쯤 되는 걸까?
그런데 불을 숭배해서 뭐 하는 거지. 이성도 없고 가릴 것 없이 주변을 다 태워 버리는 존재들이잖아. 그리고 숭배한다면 모여서 얌전히 불한테 기도나 하지, 카나비스 드라이어드는 왜 납치하려던 건데. 어이가 없네.
테라리움 밖을 나와 멀어지자 크고 작은 불들을 마주치기 시작했다. 역시 앞 번대의 테라리움이라 그런지 세계수 가지의 축복의 힘이 강해 불의 개체 수나 영향력이 전체적으로 아주 약해 보였다.
민들레 아이들은 아무리 작은 불이라도 볼 때마다 겁을 먹었지만, 오히려 작은 불 쪽에서는 우릴 보면 멀어졌다. 선공 몹이라도 레벨 보고 어그로를 띄우는 걸 보면 이성이… 있는 건가?
주변에서 곧잘 불도 감지해 내며 착실히 드론의 역할을 하던 민들레의 꽃씨들이 드디어 무언가를 발견했다. 가막살나무와 비슷한 나무를 찾아냈다고 했다.
협곡을 따라 쭉 걷던 것을 멈추고 협곡의 위로 올라갈 방법을 찾다 중간에 뚫린 동굴을 발견했다. 바위들로 가려져 있어 발견하기 힘든 곳이었으나 민들레 꽃씨들이 반딧불이처럼 날아다니며 위치를 가르쳐 주었다.
동굴 안은 어두웠지만 멀지 않은 곳에서 위쪽에서 쏟아지는 햇빛이 보였다. 다이아로 불을 끌어와 안이라도 밝혀야 하나 생각하던 중 이리스와 노토스가 램프를 꺼냈다. 역시 고렙은 템도 다양하지.
잠시나마 미개인처럼 생각한 것이 부끄러워 주머니에서 다이아를 굴리던 손을 화들짝 뺐다.
그들이 가진 램프로 어둠을 헤치고 햇빛을 향해 걸어 나갔다. 이 세계는 어둠이 깔려도 꽤 밝은 편이라 이런 동굴에 대비하지 못했는데, 다음에 잡화점을 방문하면 꼭 램프를 사야겠다고 다짐했다.
위로 올라가는 길은 직각처럼 보이는 꽤 가파른 곳이었지만 듬성듬성 바위가 계단처럼 놓여 있어서 짚고 오른다면 충분히 오를 수 있는 길이었다.
데이지나 다른 드라이어드들, 하다못해 민들레 아이들도 폴짝폴짝 뛰어 올라가고 이리스와 노토스마저도 바위를 타는 것에 꽤 거리낌 없어 보였다.
문제는 나였다. 호기롭게 팔을 뻗어 바위에 손을 올렸지만 나무에 매달린 나무늘보처럼 찰싹 붙어 있을 뿐이었다. 아씨… 제가 점프력 스탯이 많이 부족해서 그런데…. 어이없고 쪽팔려서 웃음이 실실 나왔다.
데이지가 위쪽에서 덩굴로 날 감아올리려는 것을 옆에서 내가 하는 양을 웃으며 지켜보던 메스키트가 손을 저어 저지했다. 그러곤 무턱대고 내 허리를 덜렁 들어 올리는 엘더와 다르게, 메스키트는 정중히 날 안아 들고 한 번의 점프만으로 위로 훌쩍 올라갔다.
풀썩 안겨 있는 것이 부끄러웠지만 메스키트가 너무 멋있었다.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어요….
“아, 정말 가막살나무가 맞네요. 비록 한 그루뿐이지만.”
민들레 아이들은 기특하게도 가막살나무를 발견했다. 작고 둥근 붉은 열매를 포도처럼 매달고 있는 나무였다. 잎이 듬성듬성 나 있고 썩 건강하게 보이진 않는 나무였지만 주변 나무들에 비하면 목질은 튼튼해 보였다.
을씨년스럽게 낙엽이나 마른 가지를 잔뜩 드리운 나무가 한가득이었다. 이리스는 나무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음… 필드가 가막살나무의 자생 필드와 유사해요. 아래로 물이 흐르고 뒤로 높은 산도 있고. 위쪽은 비교적 바위가 적고 평평하네요. 비록 한 그루뿐이지만, 이 나무가 있다면 근처에 군락지가 있을 법도 해요. 이런 곳이라면 소나무가 나고 자랐을 확률도 높고. 노토스의 드라이어드들이 좋은 소식을 물어 올 수도 있겠어요.”
굉장히 인적이 드문 곳 같았다. 확실히 사람들이 다니기엔 길이 좀 험난해 보였다. 이 정도면 날 쫓는 그 조직들도 애먹지 않을까?
살짝 힘을 주기만 해도 바싹 구운 생선 가시처럼 덤불들이 바스러졌다. 로브에 붙은 잔여물을 털어 내고 있는데 이리스가 꽤 오래 한 자리에 머물러 있는 노토스를 보더니 말했다.
“이쯤에서 제퍼와 헤르마를 불러오는 것이 좋겠어요. 저렇게 오래 땅의 기억을 읽는다는 건 뭔가 발견했다는 걸 뜻하거든요.”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도깨비바늘 열매를 꺼내 손으로 뭉개 버렸다. 분명 감정이 실려 있었다.
“음… 그러고 보니 네 분은 벌을 안 쓰시나요? 단편적이지만 문자를 주고받는 게 더 편한 거 같아서요.”
칼롱의 말벌을 받고 얼마 되지 않아 기억난 것이었다. 내 질문에 이리스는 간단히 답했다.
“벌은 비싸서요.”
그렇군.
“하나의 힘은 읽지 못했고 둘의 힘은 이곳에 사람이 오간 것을 읽어 냈다.”
“10년은 더 된 기억이란 뜻이에요.”
노토스가 제자리에서 소나무들과 하던 것을 멈추고 이쪽으로 다가오더니 날 보며 말했다.
“나무를 잔뜩 수레에 싣고 길을 가는 상인의 모습을 봤습니다. 과거에는 비교적 왕래가 잦았던 것 같습니다. 18번째 테라리움으로 향하는 길에서는 혼자일 때도 있고 여럿일 때도 있었습니다. 일행은 매번 얼굴이 바뀌었습니다. 그의 자취를 역으로 따라가다 보면 군락지를 발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때요, 제이 님? 저희가 정말 군락지를 발견한 것 같아요!”
칭찬해 줘요, 입단 테스트에 좋은 점수 받았나요? 하는 눈으로 이리스가 말했다.
“아직 발견했다고 말하기엔 이르다.”
노토스가 우리가 가야 할 방향을 짚으며 말했다. 그러곤 민들레들에게 그 방향으로 꽃씨를 보낼 것을 부탁했다.
민들레 꽃씨가 정찰할 동안 우린 제퍼와 헤르마를 기다렸다가 함께 가기로 했다. 평평한 바위를 의자 삼아 둘러앉아 군락지를 발견하면 어떻게 할지 이야기했다.
“제이 님은 가막살나무를 어디에 쓰시려는 건가요?”
“앗, 그건 딱히 생각해 본 적 없어요. 그냥 정말 아무도 발견하지 못했다고 하기에 궁금했을 뿐이에요. 보물찾기처럼…?”
다이아가 많은 사람들은 가끔 나처럼 범인이 이해하기 힘든 행동을 한다며 이리스가 작게 중얼거렸다. 그녀의 말에 그동안 다이아를 온갖 곳에 낭비해 온 내 모습이 떠올랐다.
이 사람이 아직 제가 다이아를 물 쓰듯이 쓰는 모습을 못 보셨군요. 다이아로 비 내리는 건 보신 적 있으세요?
“제이 님의 28번째 테라리움에 울타리로 쓰시는 건 어떠세요? 방수목이라고 하니 불을 막기엔 아주 좋을 거예요!”
“음… 글쎄요. 나무들을 다 옮길 방법도 없고… 군락지를 파괴하고 싶진 않아요.”
군락지는 드라이어드가 태어날 확률이 높은 곳이니까. 민들레 군락지가 떠올랐다. 그곳에 수북하게 핀 민들레 꽃 하나라도 꺾기 싫었었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민들레라지만, 꽃은 그곳에 함께 피어 있는 것이 가장 아름다웠다.
그 뒤로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눴다. 가막살나무의 군락지는 어떤 곳일까? 나무들이 한데 모여 자라고 있으면 얼마나 멋있을까? 인적이 드문 곳이긴 해도 왜 아무도 발견하지 못한 걸까? 하며 꽤 오랜 시간을 보냈다.
“제퍼와 헤르마가 늦네요…. 길을 못 찾나? 왔던 길에 제 드라이어드의 힘으로 꽃을 피워 놓긴 했는데 그 꽃이 사라지려면 아직 한참 멀었거든요. 그래서 꽃을 발견하지 못했을 리는 없는데. 늦어도 너무 늦네.”
노토스가 왔던 방향으로 집중적으로 꽃씨를 보내던 민들레 아이들을 불러왔다. 우리가 왔던 방향으로 꽃씨를 보내 제퍼와 헤르마를 찾길 부탁했다.
“무슨 일이 생긴 거 아닐까요?”
“근방에 불은 적었고… 걔들이 불에 당할 애들은 아니고….”
한참을 기다리자 드디어 민들레 아이들이 답해 주었다. 제퍼와 헤르마를 찾긴 했는데 그들뿐만 아니라 곁에 다른 많은 드루이드와 드라이어드의 기운이 느껴진다고 했다.
그러곤 아이들은 녹초가 되어 풀썩 주저앉았다. 놀라서 아이들에게 다가가는데 메스키트가 그 모습을 보며 말했다.
“내 주인, 제이. 아직 묘목 아이들이라 많은 것을 감지하기엔 힘이 부족해서 그렇답니다. 그래도 꽤 오래 버텨 주었네요. 너무 걱정 마세요. 제이의 아티팩트로 돌아가 쉬게 하면 금세 회복될 거예요.”
그 말에 아이들을 황급히 아티팩트로 돌려보냈다.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발을 구르던 아이들은 결국 빛 무리에 이끌려 사라졌다.
“다른 드루이드와 드라이어드들이라면… 혹시 제이 님을 쫓고 있다던 그자들이 아닐까요?”
“헐, 저 때문에 제퍼와 헤르마가 말려들었다면 어떡하죠?”
이리스는 우리가 왔던 방향을 보며 오래 고민했다. 그러곤 날 덤불이 무성한 곳으로 끌고 갔다.
“아직 그들이 전투를 벌이고 있는지 어떤지는 알지 못해요. 저와 노토스만 가서 확인해 보죠. 그들이 노리는 것은 제이 님이니 여기에 숨어 계시는 것이 좋겠어요.”
그들이 무척 걱정됐지만 쪼렙인 나보다 고렙인 그들이 어련히 알아서 잘하겠지 싶었다. 그녀의 말을 따라야지.
이리스와 이야기를 나눈 노토스가 소나무들을 아티팩트로 돌려보내는 것이 보였다. 그들은 덤불 속에 무릎을 모아 얌전히 앉아 있는 날 보곤 왔던 방향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부디 걱정할 일은 생기지 않으면 좋겠는데.
메스키트와 엘더가 그들이 사라진 방향으로 서서 주위를 경계하는 것이 보였다. 둘은 덩치가 커서 덤불에 숨을 수 없으니 적당히 바위나 나무 뒤에 몸을 숨기고 주변을 살피는 것이 났다고 했다.
몸집이 작은 데이지와 바곳만이 내 양옆에 찰싹 붙어 덤불을 이불처럼 뒤집어쓰고 고개를 좌우로 까닥거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