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7화 (97/604)

노토스와 소나무들이 또 앞서 나가 탐지를 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나름대로 범위를 잡아 주었으니 이제 민들레 아이들의 능력을 확인해 볼 타임인 것 같았다.

“메스키트, 민들레들 훈련 성과는 어때? 단델리온처럼 꽃씨를 탐지용으로 쓸 수 있을까?”

자신들의 이야기가 나오자 민들레들이 걸음을 멈추고 날 바라보았다.

아이들은 민들레 군락지 이후 처음으로 테라리움 바깥세상에 나와 본 것이었다. 둘이 붙여 두면 좀 전의 이리스와 제퍼를 보는 것처럼 투닥거리며 잘 싸웠었는데 지금은 서로 손을 꼭 잡고 싸우지도 않고 조용했다.

처음으로 떠나는 모험이 많이 무서웠나 보다. 그렇게 싸워도 결국 서로에게 제일 의지하는 것이 귀여웠다.

“꽃씨에 닿는 무언가를 느끼는 것은 비로소 가능해졌지만 정확도는 많이 떨어지더군요. 범위도 그렇게 넓지 않아서 민들레의 왕처럼 넓은 지역을 탐지하려면 역시 묘목 아이들이 더 자라야겠어요.”

“그래? 그럼 한번 보여 줄래?”

나는 멀리 있는 노토스에게 손짓을 했다. 저쪽도 무턱대고 소나무로 이곳저곳 쑤시는 것보다 좀 더 방향성을 잡게 되면 나을 것이다.

노토스와 소나무들이 돌아왔다. 민들레 아이들의 곁에 쌍쌍이 서니 꼭 틀린 그림 찾기를 하는 기분이다.

머리 모양에 따라 그나마 구분이 되는 우리 민들레들과 달리 소나무들은 좀처럼 구분이 어려웠다. 머리 모양은 물론 둘 다 남성형이었다.

혹시 노토스는 둘을 구분할 수 있을까? 만약 구분한다면 둘을 부르는 이름도 다를까? 어떻게 부를까? 입을 좀처럼 열지 않는 사람이니 듣는 것도 힘들겠지.

“여기 아이들은 보시는 것과 같이 민들레예요.”

“세상에… 아직 묘목인 아이들이네요. 귀여워라. 자연 발생 드라이어드인가요? 저희도 여태 여행하는 동안 자연 발생을 본 건 손에 꼽거든요. 묘목 드라이어드를 보는 건 정말 오랜만이에요.”

놀랍게도 자연 발생 드라이어드는 제게 셋이나 있죠. 바곳도 자연 발생이니까. 이 민들레 묘목 아이들이 잔뜩 있는 군락지도 본 적 있답니다.

“두 민들레 드라이어드는 연리지로 키우시는 건가요? 민들레는 많이 봤지만 연리지로 묶는 분은 처음 뵙네요.”

“아, 딱히 그렇게 키우려고 마음을 먹은 건 아니고요. 같이 데려온 아이들이라 함께 있으려고 하는 편이에요. 나중엔 포레스트를 만들어 하나를 왕으로 삼을 수도 있어요. 다만 보시는 바와 같이 아직 어리기도 하고. 둘 중 하나가 두각을 드러내는 것도 아니라서요.”

처음 보는 사람들 앞에서 꼬물꼬물 두 손을 꼭 잡고 찰싹 붙어 있는 민들레 아이들 뒤로 키가 엄청 큰 소나무들이 지그시 내려다보고 있었다. 얘들아, 저기 연리지 선배들이 있네.

“자, 어제 메스키트와 배운 그걸 사용해 볼래? 내가 찾으려는 건 가막살나무 군락지인데. 어, 잠깐. 그런데 가막살나무가 어떻게 생겼지?”

아니, 나조차도 뭘 모르는데 이런 애들한테 어떻게 찾으라고 해? 여긴 식물도감 없나요? 가막살나무는 어떻게 생겼나요….

“드루이드님, 저희가 이 묘목 아이들을 좀 봐도 될까요?”

그때 소나무 드라이어드 하나가 내게 말을 걸었다. 청량함이 느껴지는 미성이 섞인 청년의 목소리였다.

당신들 솔잎 향이 나는 캔 음료가 있는데, 아는가 몰라. 그걸 내 귀에 부은 기분이야. 맛대가리는 없는데 끝에 쿵, 하고 코를 때리는 청량함이 남는 음료지.

“앗! 얼마든지!”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춰 두 소나무가 무릎을 꿇었다. 풀꽃에 대한 나무의 예의 같아 보여 기분 좋은 웃음이 나왔다.

“세계수에서 자란 우리와 다르게 품 밖에서 싹이 튼 아이들이라 드루이드님이 찾고자 하는 것에 대해 모를 것입니다. 아직 어려 모체의 선조들이 축적한 지혜도 깨닫지 못하죠. 더 많은 태양을 쬐어 하늘과 먼저 가까워진 성목으로서 작은 세계수의 지지대가 되어 줄 묘목들에게 버팀목 역할을 기꺼이 하겠나이다.”

그러면서 아이들 손바닥의 몇 배나 되는 손을 뻗어 머리 위에 얹었다. 아직 여린 줄기가 하늘로 곧게 뻗을 수 있도록 큰 가지가 자리를 내주는 것 같았다. 아이들은 똘망똘망한 눈을 소나무들과 마주하며 짧지도 길지도 않은 시간을 흘려보냈다.

“멋있다…. 엘더, 보고 느끼는 거 없어? 엉? 성목으로서 묘목들에게 엉? 그런 거 없냐고.”

얘, 옆집 소나무는 다 컸다고 애들한테도 친절하고 아주 매너가 나무를 만들어 놨더라. 너는 허구한 날 집구석에서 다이아나 축내고 말야. 너 말이야, 메스키트 손에서 컸다면서!

어떻게 저런 올곧은 메스키트 밑에서 너같이 삐뚤어진 녀석이 나왔나 몰라! 엄마는 아주 걱정이다! 걱정이야!

엘더는 대꾸도 없이 고개를 픽 돌려 버렸다. 내가 아주 저놈 얼굴만 못났어도? 응? 하지만 얼굴은 잘났으니 보는 재미로 산다.

“작은 세계수님! 알겠어요!”

“작은 세계수님! 제가 더 먼저 알았어요. 쟨 아는 척만 하는 거예요.”

“웃기지 마! 네가 뭘 알아? 가막살나무는 작고 흰 꽃이 수북하게 피는 나무야!”

“그건 나도 알아! 빨갛고 작은 열매를 송이송이 맺는 나무야!”

아이들은 서로 자기가 더 잘 안다며 다투기 시작했다. 첫 여행의 긴장을 잊고 다시 활발한 모습을 보여서 보기 좋았다.

“자, 그만 싸우고. 내가 그 가막살나무를 찾으려는데 도와줄 수 있겠니?”

“제가 금방 찾을게요!”

“아뇨, 제가 쟤보다 더 먼저 찾을게요!”

“아니.”

각자 주먹을 꼭 쥐고 있는 두 아이의 손을 펴 서로 맞잡아 주었다.

“너희 둘은 둘이 같이 힘을 사용해야 더 세진다고 했으니까 함께해야지. 자, 누구 하나 먼저 하지 말고 같이 하는 거야.”

아이들은 심통 난 얼굴을 하고서도 내 말을 들어주었다. 억지로 맞잡게 했던 손은 내가 손을 떼도 자의로 꼭 붙들려 있었다. 아이들은 잡지 않은 손으로 들고 있던 스태프를 머리 위로 모아 끝부분을 맞대었다. 쪼르르 다가온 바곳이 내 옆에 찰싹 붙어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두 개의 동그란 솜덩이 같은 하얀 민들레 꽃씨가 은은하게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새벽이슬을 맞아 깨어난 듯한 청초한 풀꽃향이 아주 약하게 주변을 떠돌았다. 그 향기를 리듬 삼아 아이들이 갑자기 바지런히 꿀을 옮기는 꿀벌처럼 재잘재잘 노래하기 시작했다.

“먼 옛날 땅에 큰 홍수가 났을 때.”

“우리 민들레 선조는 물에 잠겨 죽을 뻔했단다.”

“그때 우리의 신인 세계수가 말하셨단다.”

“널리 꽃씨를 보내 물에 잠기지 않은 땅을 찾으렴.”

너의 행복이 내 가지가 닿는 곳에 아직 남아 있으니, 힘을 내어 멀리멀리 날아간다면 찾을 수 있을 거란다. 그때 바람을 타고 하늘을 날던 느낌을 잊지 말렴.

잊지 않는다면 다시금 하늘을 날아 너의 작은 세계수의 행복을 찾아 줄 수 있단다.

아이들이 노래하는 이야기는 단델리온에게 들은 적 있었다. 그녀의 스태프 조각을 떼어 낼 때 그 전설을 들었다. 노래 가사의 말투는 단델리온의 것이 분명했다.

노래의 음조는 꼭 조용한 자장가 같았다. 아이들이 잠들 시간 단델리온이 다정한 목소리로 불러 줬을, 성목의 지혜가 담긴 노래.

노래가 끝나자 초겨울에 내리는 작고 고운 눈송이 같은 하얀 민들레 꽃씨가 민들레 아이들의 스태프에서 폭죽처럼 터져 나왔다. 꽃씨들은 단델리온의 것보다 수가 적었지만 다 흩어지지 못한 구름처럼 듬성듬성 바람을 타고 멀리멀리 퍼져 나갔다.

날아가다 내 코끝에 붙은 것을 잡아떼었다. 손에 닿자마자 꽃씨는 허상처럼 바스러졌다. 역시 진짜 꽃씨가 아니라 아이들의 힘이 응축되어 꽃씨의 형태를 갖게 된 것이었다.

꽃씨에 닿은 부분이 시원했다. 이 꽃씨도 도깨비바늘의 열매처럼 미약하게나마 치유의 힘이 깃들어 있었다.

바곳에게 자랑하기 위해 힘을 썼던 때보다 빛 무리가 더 정교하고 밝게 퍼져 나갔다. 내가 세상모르고 푹 자고 있던 그 짧은 시간에 큰 성과를 보인 민들레 아이들이 기특했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우리 묘목들은 분명 커서 단델리온 왕처럼 대단한 드라이어드가 될 거야. 암, 누구 드라이어드인데!

“힘을 사용하는 것은 잘했어요. 이제 집중해야죠. 함께 훈련했던 걸 잊으면 안 된답니다.”

메스키트가 아이들을 격려해 줬다. 이리스는 꽤 아름다운 장면이라며 꽃씨들이 떠다니는 모습을 즐겁게 감상했다. 아이들이 무언가라도 찾아내기만 한다면 딱이었다.

다만 이 평화는 내 핸드폰에서 재난 경보라도 울리는 것처럼 시끄럽게 알람이 터지면서 깨졌다.

핸드폰에 보호 필름처럼 붙어 있는 말벌집이 오렌지빛으로 반짝였다. 시끄럽게 웽웽거리는 것이… 혹시 이거 내게 칼롱이 말벌을 보낸 거야?

핸드폰을 깨우자 커다란 말벌이 핸드폰 화면 위로 홀로그램처럼 떠올랐다. 저 엄지손가락만 한 위협적인 벌침은 아무리 봐도 적응이 되질 않는다. 이런 징그러운 것이 내 핸드폰에 살고 있어….

말벌은 화질 나쁜 영상처럼 지지직 일그러지더니 작은 육각형들로 조각조각 깨졌다. 깨진 조각들은 한데 모여 글자를 만들었다.

혹시 밖? 그들 눈치챔 당신 찾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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